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71)화 (71/174)

71화

회의장에 모인 사람들의 이목이 바론 대주교를 향해 모여들었다. 바론 대주교는 특히나 나와 라이넬 사제, 그리고 베트람이 자신을 주시하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우선 최우선으로 할 것은 성녀님의 안전입니다. 라이넬 사제, 그리고 베트람 경. 그대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성녀님을 지키는 것을 일 순위로 하게.”

“알겠습니다, 대주교님.”

“명심하겠습니다.”

바론 대주교의 말에 라이넬 사제와 베트람이 순서대로 대답했다.

“그리고 성녀님, 만일 무슨 일이 벌어지거든 이 마법 스크롤을 찢으십시오. 듀아나 신전 근처로 이동하게 될 겁니다.”

바론 대주교가 손바닥만 한 종이를 내게 건네주었다. 그 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글자와 도형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이동 스크롤인 모양이었다. 혹시나 다른 데 떨어트릴까 걱정되어 주머니에 잘 챙겨 두었다.

“감사해요, 대주교님.”

내 인사에 바론 대주교가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이내 라이넬 사제와 베트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여기를 나가면 비브르 님의 안내에 따라 빈민가로 가겠죠. 거기 들어가게 되면, 비브르님이 보았다던 아이를 구출해 내는 게 목표입니다. 하지만 만일 상황이 여의치 않거든 아이는 포기하고 돌아오셔도 됩니다. 아직 우리에게는 시간이 남아 있으니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라이넬 사제와 베트람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게서 굳은 결의가 느껴졌다.

“그럼 성녀님, 라이넬 사제, 그리고 베트람 경. 부디 아이를 구출하고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겠습니다. 듀아나 여신님께서 세 분을 지켜 주시길…….”

바론 대주교가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다른 사제들 역시 바론 대주교가 했던 것처럼 두 손을 모아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볼게요.”

내가 먼저 기도를 마친 바론 대주교에게 말했다. 바론 대주교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십시오.”

바론 대주교의 말이 떨어지자 라이넬 사제와 베트람이 고개를 숙여 바론 대주교에게 인사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먼저 회의장을 나섰다. 뒤이어 라이넬 사제와 베트람이 나를 따랐다.

신전을 나서며 라이넬 사제와 베트람을 흘긋흘긋 바라보았다.

베트람은 어제 처음 본 사이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그동안 익숙하게 보아 왔던 라이넬 사제의 모습이 그의 평소 모습과 정반대로 바뀌니 어딘가 낯설고 어색했다.

“제 모습이 많이 이상합니까?”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라이넬 사제가 내게 물었다. 나는 괜히 찔리는 기분이 들어서 어색하게 웃었다.

“네, 조금요. 그동안 계속 보아 왔던 얼굴이 아니니까 더 어색하게 느껴져요.”

“그럴 겁니다. 대신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더라도 제 정체가 탄로가 나지는 않으니 좋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렇기는 해요.”

순순히 수긍했다. 이 상태라면 내가 아는 사람들,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자면 엄마나 크라이튼 대공, 브라이언, 그리고 엘리엇을 마주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를 알아볼 확률은 전무할 것이었다.

그러니 이번에 좀 더 편안하게 다닐 수 있겠지.

“근데 외모뿐만 아니라 체형도 바꿔 주나 봐요.”

어제는 크고 체격도 건장했던 베트람의 모습이 호리호리한 몸으로 바뀌어 있으니 신기했다.

용병으로 생활할 때는 이런 종류의 마법 아티팩트보다 몸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이나, 공격에 치중된 것들을 보았기 때문에 지금 이 아티팩트가 별세계의 물건 같았다.

“저도 처음 해 봤는데 가능한 모양입니다.”

베트람은 얼떨떨한 음색으로 대답했다. 확실히 성기사로 살아온 베트람이 이런 마법 아티팩트를 사용할 일이 있을 리가 없었기에 나는 순순히 수긍했다.

“비브르, 이제 어디로 가야 해?”

신전에서 나와 빈민가로 향하며 비브르에게 물었다.

빈민가의 위치는 알고 있었지만, 다니엘이 감옥으로 사용하는 곳의 위치는 오직 비브르만이 알고 있었다.

[일단 빈민가 근처에 다다르면 알려 주마.]

“알겠어.”

안내는 조금 더 이동한 후에야 자세히 해 주려는 모양이었다.

“비브르 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라이넬 사제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내게 물었다.

“빈민가 근처에서부터 안내해 주겠대요. 일단은 이대로 계속 가면 될 거 같아요.”

무심코 대답하다가 문득 라이넬 사제를 돌아보았다.

“비브르 말 안 들려요? 전에 수정방에서는 듣지 않으셨어요?”

이전에 듣기로는 신력이 있는 존재들이라면 구체화된 비브르의 존재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수정방에서 다른 사제들 모두 비브르를 볼 수 있었다.

[보이긴 하겠지만, 내 목소리까지 그에게 닿지는 않을 거란다.]

내 호기심에 대답한 것은 비브르였다.

“수정방에 있을 때가 특수한 경우였습니다. 비브르 님의 모습이 보이기는 하지만, 애석하게도 목소리까지 들리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바론 대주교님도 위험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성녀님을 저희와 함께 보내신 거고요.”

“그랬군요.”

몰랐던 것들이었다. 그래도 라이넬 사제만큼 신력이 많고 활용하는 능력조차도 뛰어나다면 대화 정도는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라이넬 사제조차도 그건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대화를 하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니 마침내 빈민가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깔끔하게 정비된 마을과 달리 빈민가는 허름하고 낡은 주택들이 불규칙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나마 입구 쪽은 청소가 되어있는 모양이었지만, 육안으로 확인되는 깊은 골목은 쓰레기나 오물이 아무렇게나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주황색 지붕에 파란 문이 달린 집을 찾으렴. 그 집을 왼쪽에 끼고 골목으로 들어가야 한다.]

“주황색 지붕에 파란 문이 달린 집을 왼쪽에 끼고 들어가야 한대요.”

나는 비브르에게 들은 내용을 곧바로 라이넬 사제와 베트람에게 전달했다.

두 사람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내가 말한 것과 일치하는 주택을 찾아내려 했다.

“저기 있군요.”

먼저 그 집을 발견한 건 베트람이었다. 우측으로 쭉 걸어가 파란 문 앞에 선 나는 비브르에게 곁눈질을 하며 물었다.

“이 집을 끼고 가는 거 맞지?”

[그래.]

“맞대요. 그럼 이쪽으로 가요.”

내가 손가락으로 방향을 지시하자 라이넬 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죠.”

[검은색 낙서가 되어 있는 벽을 발견하거든 오른쪽으로 돌아서 두 블록 앞으로 가렴. 그다음에는 왼쪽으로 돌아서 다섯 블록을 지나면 2층 건물이 보일 게다.]

우리는 비브르가 설명해 주는 길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빈민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주변 분위기가 적막해지는 기분이었다.

“주변에 혹시 우리를 지켜보거나 그런 사람 없나요?”

라이넬 사제와 베트람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 정도까지 가까이 왔는데도 반응이 없으니 초조해져 갔다.

“없는 것 같습니다.”

“저도 달리 느껴지는 게 없군요.”

두 사람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고 하니 어쩌면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능력자가 있는 거거나, 아니면 경계를 할 생각조차 안 한 것이 틀림없었다.

대체 왜 아무런 경비나 보초를 세워두지 않은 거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비브르, 네가 다니엘과 갈 때도 이랬어?’

미심쩍은 기분에 비브르를 향해 물어보았다. 비브르는 고개를 위아래로 까딱거리며 답했다.

[그때와 지금이 다른 것 같지는 않구나.]

‘그래?’

비브르까지 그렇게 말한다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십 분 정도를 걸어간 끝에 비브르가 언급한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허름한 집이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사람이 사는 흔적을 도무지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나는 들어가기 전에 라이넬 사제와 베트람을 한 번씩 살폈다.

두 사람은 혹시나 주변에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들어가요.”

“예.”

“엄호하겠습니다.”

다 떨어진 문을 피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집은 폐가나 다름없었다. 집기가 다 부서져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모습 하며, 낡은 벽에는 거뭇한 곰팡이가 가득 피어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로 습하고 눅진한 곰팡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나는 소매로 코를 가린 후 주변을 살폈다.

‘감옥이 어디 있다는 거야?’

[작은 방으로 가 봐. 그리고 거기 깔린 낡은 카펫을 들추면 아래로 내려가는 통로가 있을 거다.]

비브르의 말을 들으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작은 방은 해가 드는지 그나마 다른 곳보다 좀 더 상태가 좋았다.

나는 작은 방 안으로 들어와 바닥에 깔린 먼지투성이 카펫을 들추었다.

그러자 밑으로 가는 통로가 나왔다.

“여긴가 봐요.”

“그런 것 같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제가 먼저 내려가겠습니다.”

베트람이 내 앞에 서서 먼저 지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가 그 다음으로 내려갔고, 뒤에는 라이넬 사제가 날 보호하듯 뒤따르고 있었다.

지하는 깜깜했다. 아무래도 지하인 탓에 빛이 없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신력을 사용하겠습니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아주 적은 양이면 알아채기 어려울 겁니다.”

라이넬 사제의 말을 반박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그는 내게 신력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스승이었다.

신전 내에서는 신력을 가장 섬세하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자였기에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예.”

대답이 끝나고 나자 주위에 아주 희미한 빛무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나조차도 신력을 사용한 건지 아닌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세심하고 옅은 신력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의 불빛으로도 내부를 확인하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지하는 바깥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았다. 땅을 파서 대충 만들어 둔 공간인 듯 주변에 흙더미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계단을 완전히 내려온 우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을 확인했다.

“으으.”

그때 어디선가 아이의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정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