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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70)화 (70/174)
  • 70화

    베트람과 인사를 나눈 후 라이넬 사제와 함께 수련장의 뒷문을 통해 수련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 후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수련장을 벗어났다.

    “벌써 끝나셨어요?”

    칼리나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회의만 하고 나온 탓에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수련장에서 나오게 되었다.

    “오늘은 좀 피곤해서 사제님께서 일찍 끝내 주셨어.”

    내가 대충 둘러대며 말했다. 라이넬 사제는 맞는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몸이 많이 안 좋으세요?”

    그러나 내 선택이 잘못되었는지 칼리나가 놀라며 내 상태를 살폈다. 괜히 걱정을 끼친 모양이었다.

    “아니, 몸이 안 좋은 건 아니고. 오늘은 좀 일찍 쉬고 싶어서 그런 거야.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칼리나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칼리나는 내 말에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은 내가 괜찮다고 하니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오늘은 일찍 가자. 칼리나랑 아니타도 오늘만큼은 일찍 돌아가서 쉬고.”

    “네, 알겠습니다.”

    “네, 작은 아가씨!”

    칼리나와 아니타를 대동한 채로 신전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요, 작은 아가씨.”

    한참 걷고 있으니 아니타가 내게 말을 걸었다.

    “왜?”

    “아침에 가방 가져오시지 않았어요?”

    아니타가 나를 보며 궁금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신전으로 올 때는 가방을 들고 왔는데 나갈 때는 빈손이니 의아했던 것이었다.

    “가방은 수련할 때 쓸 거라서 수련장에 뒀어. 나중에 다 쓰면 그때 챙기려고.”

    “아! 그런 거군요.”

    아니타가 뒤늦게 이해했다는 듯이 탄성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우리의 속도에 맞추어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미라벨 님.”

    “네. 오늘도 감사했어요, 사제님.”

    라이넬 사제와 인사를 마치고 마차에 올랐다.

    돌아가는 내내 비브르가 해 준 말들을 하나하나 되새겨 보았다. 기왕이면 한 번으로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무래도 실패한다면 다음을 도모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다니엘이 어떤 방식으로 나올지도 모르고.

    눈을 감은 채로 흔들리는 마차에 몸을 의지했다. 복잡한 머릿속이 차분히 가라앉을 수 있도록 내게 주는 휴식이었다.

    * * *

    다음날이 되어서 아침 식사 이후 비브르를 다니엘에게 잠시 보냈다.

    혹시라도 다니엘이 오늘 빈민가로 간다면 일정을 미뤄야 하기 때문이었다.

    메이너드 자작 부인의 교양 수업을 받으며 나는 내내 다니엘의 오늘 일정 중 외출이 없기를 깊이 바랐다.

    지금 당장 비브르에게 물어볼 수는 있었지만, 일정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일이라 나는 비브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비브르가 다시 돌아온 것은 점심이 다 끝나갈 때가 되어서였다.

    점심 식사를 모두 마치고 내 곁으로 다가온 비브르를 어깨에 얹었다.

    ‘다니엘은 어땠어?’

    [오늘 외부 일정은 없는 것 같구나. 하루 종일 저택에 있을 거라고 했단다.]

    ‘다행이네. 그럼 오늘 실행하면 되겠다.’

    [그게 좋겠구나.]

    ‘그럼 가자.’

    오늘 일을 거행할 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겉으로 티 내지 않으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늘 하는 일만 잘 처리되면, 다니엘이 악룡 크립소를 부활시키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도 무방할 터였다.

    일전에 저택에서 다니엘이 크립소의 힘을 개방하여 사용한 적이 있기는 하겠지만, 그 이상의 힘을 얻기는 힘들 터였다. 그리고 그 정도의 힘이라면, 충분히 사람들을 모아 다니엘을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크라이튼 대공가가 다니엘의 손에 넘어갈 일도 없겠지.

    모든 것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작은 아가씨.”

    불현듯 아니타가 나를 불렀다.

    “불렀어?”

    아니타를 바라보며 묻자, 아니타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저 다 완성했어요.”

    내용이 빈 말이었지만, 나는 아니타가 무엇을 완성했다고 말하는지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 보여 줘.”

    “여기요.”

    아니타가 꺼내든 건 작게 포장된 선물이었다.

    나는 선물을 받아 들고 아니타를 다시 바라보았다.

    “내가 열어 봐도 돼?”

    “네! 제가 작은 아가씨 드리려고 열심히 만들었는걸요. 당연히 작은 아가씨께서 풀어 보셔야죠!”

    아니타는 조금 흥분해서 내게 외쳤다.

    설레는 마음으로 포장을 뜯자 어제까지도 아니타가 열심히 만들었을 손수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툰 솜씨로 노란 꽃을 수놓은 손수건을 바라보며 작게 감탄했다.

    고작 내 나이 또래인 아니타가 어설프긴 해도 수를 놓아 나에게 선물을 해 주었다.

    그 정성이 고마워서 가슴이 뭉클했다.

    “정말 고마워, 아니타. 소중히 간직할게.”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다음에는 더 예쁘게 수놓아 드릴게요.”

    “응. 고마워.”

    아니타가 준 손수건을 곱게 접었다. 기왕이면 수를 놓은 부분이 위로 가도록 가만가만 접어 놓은 나는, 손수건을 주머니에 곱게 챙겨 넣었다.

    “작은 아가씨, 신전에 도착했습니다.”

    어쩐지 그 사이에 마차가 느려지는가 싶더니 듀아나 신전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려 라이넬 사제와 인사하고 곧장 수련장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간 후에는 뒷문을 통해 나와 회의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회의장에 들어서니 이미 안에는 사제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처음 보았던 베트람이라는 기사도 함께였다.

    “오셨습니까, 성녀님?”

    여신의 은총이 깃들기를.

    모두가 나에게 정중히 여신의 은총을 빌어 주었다. 나 역시 그들에게 여신님의 은총을 기원해 준 후 내 자리로 가서 앉았다.

    “오늘 확인해 보니까 다니엘은 외출 계획이 없다고 하네요.”

    “잘됐군요. 그럼 계획을 오늘 실행해도 되겠습니다.”

    플레온 사제가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여기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바론 대주교를 확인했다.

    “부디 성녀님도, 그리고 라이넬 사제와 베트람 경도 무사히 다녀오길 빌겠습니다.”

    바론 대주교는 특히나 나에게 더욱 미안하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물품은 모두 준비되었습니다. 옷도 준비해 놨는데, 성녀님은 그 외에도 따로 옷을 준비해 두신 것으로 압니다.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으셔도 무방하니 탈의실에서 갈아입고 와 주십시오.”

    젊은 사제가 나에게 옷가지와 팔찌 하나를 건네주었다.

    옷은 제법 깔끔해 보였으나, 생활감은 거의 없어 보였다.

    나는 고민한 끝에 신전에서 준비한 옷이 아니라 내가 이전에 입었던 옷을 챙겨 들었다. 그러고는 사제가 안내해 준 탈의실로 향하여 옷을 갈아입었다.

    크라이튼 대공가로 들어온 이후 항상 화려하고 좋은 옷만 입다가 예전에 입던 허름하고 낡은 옷을 걸치니 뭔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거울을 보고 한참이나 내 모습을 확인했다.

    예쁘게 꾸며져 있는 모습과 허름한 원피스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칼리나가 손질해 준 머리를 다시 빗어 하나로 엉성하게 모아 묶었다.

    그리고 신전에서 준비한 팔찌를 손목에 끼웠다.

    성인이 하는 크기의 팔찌였기에 빠지면 어떡하나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도 손목에 끼우자 자동으로 팔찌의 사이즈가 맞춰졌다.

    신기해서 손목에 달린 팔찌를 감상하다가 이내 고개를 들었다. 그랬더니 거울에 낯선 여자아이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와아.”

    모습을 바꿔 주는 아티팩트라고 하더니 정말로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새침하게 올라갔던 눈매는 유순하게 휘어 있었고, 갈색 머리칼은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피부도 핏줄이 보일 정도로 창백해 보여서 어딘가 아파 보이기도 했다.

    나는 거울 속의 내 모습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지금 이게 내 모습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때, 똑똑 하고 탈의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녀님, 아직인가요?”

    나를 탈의실로 안내한 사제의 목소리였다.

    “금방 나갈게요.”

    옷을 정리해 잘 걸어놓은 후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성녀님?”

    사제는 너무 변한 내 모습이 낯설었는지 의아해하며 나를 불렀다.

    나는 내가 맞는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맞아요. 얼른 회의실로 가요.”

    그래도 목소리는 바뀌지 않는 모양이었다.

    사제의 안내를 받아 다시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에 처음 보는 사람이 두 명 있었다.

    아마도 그 두 사람이 나와 함께 빈민가로 향할 라이넬 사제와 베트람인 듯했다.

    “성녀님이신가요?”

    처음 보는 검은 머리의 남자가 나를 향해 물었다. 목소리가 아주 익숙했다.

    “라이넬 사제님이시죠?”

    “맞습니다.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날카롭게 째진 눈을 휘어 웃는 모습이 조금 무섭게 느껴지는 외모였다.

    라이넬 사제를 확인한 나는 이번에는 베트람을 확인했다.

    베트람은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수한 차림의 청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잘 어울리시네요.”

    이전에 보았던 모습이 그야말로 성기사의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흔하게 볼 수 있는 마을 청년 같은 모습이었다.

    베트람이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허리춤에 그건 검이에요?”

    막대기처럼 보이는 걸 허리춤에 매고 있기에 물었더니 베트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렇게 보여도 실전에서는 멀쩡한 검의 모습일 겁니다.”

    “신기하네요.”

    작은 소리로 감탄을 터트렸다. 마법 아티팩트의 세계는 참으로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인 듯했다.

    우리 셋이 서로를 확인할 때까지 기다렸던 바론 대주교가 손뼉을 치며 이목을 끌었다.

    “그럼 오늘의 계획을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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