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69)화 (69/174)

69화

“여신님, 어째서 저희에게 이런 시련을…….”

“예? 그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악룡 크립소의 씨앗이 될 아이요?”

“맙소사, 그런 일이……!”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제 분들 모두 저마다 반응을 보였다. 몇몇 이들은 탄식을 터트리며 듀아나 여신님을 찾았고, 내 말을 믿지 못해 되묻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욱 불리해진 형국에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다들 조용히 하십시오. 성녀님의 말씀을 더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나마 멀쩡한 정신으로 사제들을 진정시킨 건 플레온 사제였다.

“플레온 사제의 말이 맞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봐야 할 것 같군요.”

바론 대주교가 플레온 사제의 말에 힘을 실어 주었다. 그러자 소란스럽던 회의장도 점점 진정되기 시작했다.

조용해진 회의장을 확인한 바론 대주교가 나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 푸근한 미소를 담고 있던 얼굴이 이번에는 진중하게 굳어 있었다.

“자세한 설명을 해 주시겠습니까, 성녀님?”

“네. 약 일주일간 비브르가 다니엘의 행적을 따라다니며 수상한 점이 있는지를 찾아내기로 했어요. 그리고 그 결과, 다니엘이 빈민가에 감옥을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을 알아냈어요. 그곳에서 비브르가 악룡 크립소의 씨앗이 될 아이를 발견했다고 하더라고요.”

자세하게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다니엘이 악룡 크립소의 힘을 깨우는 건 14년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언제고 그 시기가 바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는 플레온이 성자였고, 내가 죽은 후였으니까.

내가 일찍 성녀가 되었으니 다니엘 쪽에서도 뭔가 변화가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지금까지 비브르와 나눈 대화를 생각해 봤을 때, 아직까지는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는 않은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었다.

“아마도 다니엘은 그 아이를 이용해 악룡 크립소의 봉인을 풀려 하지 않을까 해요. 이건 비브르와 제가 대화하며 나온 말인데요. 그 아이를 다니엘에게서 구출해 내는 게 어떨까요?”

내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성녀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그 아이를 구출해 내는 게 제일 낫겠죠. 그 아이가 없다면 다니엘도 악룡 크립소의 봉인을 풀기 쉽진 않을 테니까요.”

플레온 사제가 나와 비브르의 의견에 동의했다.

“맞습니다. 미래에 악룡 크립소의 봉인을 깨트리기 위해 그 아이가 필요했던 거라면, 미리 빼돌려 그의 계획을 막는 게 제일 최선일 겁니다.”

라이넬 사제도 동의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미리 막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건 없겠죠.”

“그리고 그 아이를 우리가 보호하며 듀아나 신전의 교리를 가르친다면 악룡 크립소에게 눈을 뜨는 일도 없지 않을까요?”

“그거 말이 되는군요.”

회의장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긍정적인 목소리로 들뜨기 시작했다.

“기뻐하는 와중에 정말 죄송한데요.”

한참 들뜬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렇게까지 부정적인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마냥 긍정적으로 진행될 거라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우리에게는 계획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그 아이를 구출해야 하잖아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여기까지는 저와 비브르도 대화를 나누었던 부분이지만, 이후 계획은 듀아나 신전의 사제님들과 의견을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이렇게 바로 찾아온 거예요.”

“그렇군요.”

바론 대주교가 차분한 얼굴로 수긍했다.

“신전의 병력을 투입하는 건 어렵겠죠?”

젊은 사제 한 명이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제안했다.

“눈에 띄게 움직여서는 안 될 겁니다.”

플레온 사제가 고개를 저으며 그의 계획을 부정했다.

“우리가 움직이는 걸 다니엘에게 들키면 다니엘이 대비를 하겠죠. 아이를 빼돌리든, 아니면 그 외의 수를 쓰든.”

“역시 그렇겠죠?”

젊은 사제는 빠르게 수긍하며 멋쩍게 웃었다.

“인원은 최대한 소수가 되어야 할 겁니다. 그리고 바로 대처가 되는 사람이어야겠고요. 우선 비브르 님께서 길을 안내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위험하겠지만 성녀님께서 동행을 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친 플레온 사제가 나를 돌아보았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우려를 담은 목소리에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걸 위해서 옷을 따로 챙겨 온 것이었다. 빈민가로 가려면 지금 내가 입고 있는 고급스러운 옷들은 문제가 될 테니까.

“저는 괜찮아요. 오히려 가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어요.”

내가 긍정적인 답변을 하자 플레온 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성녀님과 더불어 갈 인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되겠군요. 제 생각에는 한두 명 정도가 적당할 듯합니다.”

플레온 사제의 의견에 회의장은 분주했다. 대체 누가 다니엘의 사병이 지키고 있는 감옥을 가야 할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그들의 회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몇 번의 대화가 오가고 난 후에, 사제 중에서는 라이넬 사제가 나와 함께 가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현재 듀아나 신전에서 신력을 활용하는데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한 명, 우리를 지킬 사람으로 성기사 베트람이라는 사람이 동행하게 되었다.

“그럼 언제 출발하면 좋을까요?”

“저는 언제든 상관없어요. 오늘도 괜찮아요.”

“흠.”

바론 대주교가 시간을 확인하며 낮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회의 시간이 길어지는 바람에 시간은 벌써 3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늦은 것 같군요. 성녀님께서 저녁 식사 전에 돌아가셔야 하니 일은 다음을 도모하도록 하지요. 그때까지 우리 쪽에서도 빈민가에 숨어들 준비를 해야 할 테니.”

아쉬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지금 빈민가로 갔다가 시간이 늦으면 곤란해지는 건 나였으니까.

회의장도 어느 정도 분위기가 진정되고 있었다.

“그럼 성녀님, 돌아가시기 전에 성기사 베트람을 한번 만나 뵙는 건 어떻겠습니까?”

라이넬 사제가 내게 제안했다. 안 그래도 함께 움직여야 할 테니 얼굴 정도는 익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해 주시겠어요? 함께 움직일 테니 적어도 당일 만나는 것보다는 먼저 뵙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예, 알겠습니다. 전달을 해 놓을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라이넬 사제가 성기사 베트람을 호출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러는 사이에 플레온 사제가 내게 다가왔다.

“그나저나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비브르 님의 안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성녀님 역시 함께 동행해야 한다 말씀을 드리긴 했지만, 너무 위험한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되는군요.”

플레온 사제는 혹여나 내가 잘못될까 우려하는 듯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시다시피 지금은 어린 몸이지만, 원래는 용병이었는걸요. 이런 일은 그렇게 낯선 일도 아니니 괜찮을 것 같아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조금은 걱정을 덜 수 있겠군요. 그래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네. 그리고 혹시 모르니 다니엘이 내일 자리를 비우는지 확인하고 올게요. 만일 내일 다니엘이 저택에 남아 있다면 내일 움직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렇겠군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플레온 사제와 대화를 마칠 무렵, 회의실 문이 열리고 낯선 사람이 들어왔다. 다갈색의 머리칼을 깔끔하게 정리해 넘긴 건장한 체격의 남자였다.

라이넬 사제와 함께 들어온 것을 보아하니 저 사람이 성기사 베트람인 듯했다.

라이넬 사제를 따라 내 앞으로 다가온 베트람은 나를 확인하고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성녀님께 여신님의 은총이 깃들기를. 처음 뵙겠습니다. 듀아나 신전의 기사 베트람입니다.”

예상대로 그가 베트람이었다. 나는 키가 굉장히 큰 베트람을 올려다보며 잠시 눈을 깜박였다.

“저도 처음 뵙겠습니다. 베트람 기사님.”

기사라는 소리에 체격이 좋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내 생각보다 더욱 커서 문제였다.

“근데요, 플레온 사제님.”

“예, 말씀하십시오.”

“베트람 기사님은 몸이 너무 좋으셔서 너무 눈에 띄지 않을까요?”

“예?”

주변에서 당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오히려 당황하는 사제들의 반응이 더 당황스러웠다.

“저희가 갈 곳은 빈민가잖아요. 그런데 베트람 기사님처럼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있으면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까요?”

베트람 기사를 폄하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우리가 갈 장소의 특수성 때문에 꺼낸 말이었다.

빈민가는 제국의 가난한 국민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 이런 건장한 사람이 있다면 단숨에 관심을 끌기에 딱 좋을 터였다.

“그렇기는…… 하겠군요.”

뒤늦게 플레온 사제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성녀님, 설마하니 이대로 갈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네? 아니에요?”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자 플레온 사제가 픽 웃음소리를 내었다.

“마법의 힘을 빌릴 겁니다.”

“마법의 힘이요?”

“네. 외형을 다르게 보이도록 만드는 마법 아티팩트를 사용할 겁니다. 그 모습 그대로 들어갔다가 다니엘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아…….”

플레온 사제의 말에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모습을 바꿔 주는 아티팩트는 워낙에 비싼 물건이었기 때문에 용병 일로 벌어먹고 살던 내가 생각해 내기는 쉽지 않았다.

게다가 이곳은 신전이었다. 통상적으로 마법 아티팩트를 사용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나는 괜히 뺨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확인하며 손으로 뺨을 식혔다.

“제가 착각해서 무례를 범한 것 같아요. 용서해 주시겠어요?”

베트람 기사를 향해 사과했다. 베트람 기사는 무뚝뚝해 보이던 얼굴을 부드럽게 풀어 웃었다.

“괜찮습니다. 염려하지 마시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