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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68)화 (68/174)
  • 68화

    “……무슨. 그럼 다니엘 말고도 우리가 상대해야 할 존재가 더 있다는 말이야?”

    미래를 생각해 본다면 당장 다니엘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것 같았는데, 이제는 나와 비브르의 관계와 같은 존재가 악룡 크립소에게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지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다니엘만 상대하면 된다고 생각했을 때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으면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지금은 과연 그게 가능하긴 한 일인지 의아해졌다.

    [지금 상황에서는 확신하기가 어려울 것 같구나.]

    “그럼? 악룡 크립소의 힘의 씨앗인 존재가 우리 편이 되기라도 할 거라는 말이야?”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야. 들어 보렴. 나는 그 아이가 다니엘이 감시하는 감옥에 있다고 말했단다.]

    “그랬지.”

    [그리고 다니엘은 악룡 크립소의 봉인을 풀길 원하지. 그럼 다니엘에게 필요한 건 뭐겠느냐?]

    천천히 생각을 되짚었다. 그런 후에야 비브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악룡 크립소를 깨울 힘이 필요하겠지. 내가 비브르 널 실체화한 것처럼 강력한 힘을 가진.”

    나는 무심코 대답하다가 내가 말한 내용에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한 가지 함정이 있었다.

    나는 펜던트에 봉인된 비브르를 실체화하는 것만으로도 신력의 소모가 심해 죽음을 경험할 뻔했다.

    그렇다면 아예 봉인을 깨트리려면 얼마나 더 큰 힘이 필요한 걸까?

    “나보다 강하겠구나.”

    [어쩌면.]

    “어쩌면?”

    나는 나름대로 확신에 차서 말했는데, 비브르는 애매하게 받아쳤다.

    [적어도 내가 본 그 아이의 가능성은 미라벨 너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큰 정도였다. 너도 그렇고 그 아이도 아직 어리니 나중에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는 일이지.]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비브르의 말을 곱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비브르, 넌 그 아이를 이번에 처음 본 거야?”

    [그래.]

    “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말이 안 되잖아. 너는 미래를 봤을 텐데, 그 아이가 미래에도 있다면 너도, 그리고 성자님도 보셨겠지. 안 그래?”

    [사실 한 가지 가능성이 있긴 하단다.]

    비브르는 마지못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악룡 크립소를 깨우기 위해서는 마력이 필요하지. 그 아이는 마력을 담을 그릇이나 마찬가지고. 그런데 다니엘에게 그 아이가 달갑지는 않을 거란다. 그자는 성정이 이기적인 자니까. 그러니 그 아이 역시 쓰다 버릴 말 정도로만 사용하겠지. 감옥에 갇혀 있던 그 두 인간들처럼.]

    일리 있는 말이었다. 다니엘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래서 미래에 그 아이가 없었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그 아이도 안쓰럽게 느껴졌다. 지금도 다니엘에게 붙잡혀서 감옥에 갇혀 있다는 거니까.

    “그럼 우리가 그 아이를 빼돌리면 어떨까?”

    [안 그래도 내가 제안하고 싶었단다. 일전에 이곳에서 다니엘이 악룡의 힘을 사용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이미 다니엘은 악룡 크립소의 힘을 체험한 상태일 거다. 그럼 그 아이를 어떻게든 이용해서 악룡 크립소의 봉인을 풀어 제 힘으로 삼고 싶어 하겠지. 그러나 미라벨 네가 그 아이를 빼돌린다면, 다니엘도 쉽사리 악룡 크립소의 부활을 꿈꾸지는 못할 것이다.]

    비브르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다니엘을 막을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도 그 아이를 빼돌리는 것이었다.

    [이 일은 우선 듀아나 신전의 사제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편이 좋겠구나. 내일 오후에 듀아나 신전에 가거든 내용을 그대로 전달해 보자꾸나.]

    “……알았어.”

    일단은 나 혼자 결정할 만한 사안은 아닌 듯했다. 내일 오후에 듀아나 신전에 방문하면 라이넬 사제에게 부탁하여 회의를 소집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순순히 수긍하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불만인 점을 깨닫고 비브르를 노려보았다.

    [왜 그런 눈빛으로 날 보느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눈빛으로 비브르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루비 같은 붉은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보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지만, 그런 귀여운 모습을 보여 준다고 해서 내 불만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왜 그런 얘길 미리 나한테 말 안 했어? 다니엘이 수상한 짓을 하고 있으면 나한테도 공유해 줬어야지.”

    툴툴거리며 비브르에게 묻자 비브르가 고개를 옆으로 갸웃거렸다.

    [그렇지만 내가 보고 들은 것을 미라벨, 너에게 전달하였더니 질색하지 않았느냐. 어차피 일주일 뒤에 만나기로 했으니 기왕이면 자세한 사항을 말해 줄 수 있는 지금 얘기하려 했단다.]

    “그래도 기왕이면 중요한 내용은 나한테 바로바로 알려 줘. 그래야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겠어?”

    내가 눈을 더욱 가늘게 좁히자 비브르가 가는 혀를 날름거렸다.

    [참 모르겠구나. 난 다니엘 그자가 만나는 모든 인간이 경계할 만한 대상이라고 생각했는데.]

    비브르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다음부터는 미라벨 네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하마.]

    “응. 정확히 무슨 말인지 알지? 다니엘이 사업을 벌이거나 지인을 만나 차를 마시든 식사를 하든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너도 알다시피 악룡 크립소에 대한 것들이야. 관련 내용이면 더 좋고, 아니면 그것과 관련된 정보로.”

    [……알겠다. 그리하마.]

    똬리를 튼 몸에 고개를 묻은 비브르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또 괜히 한마디 했나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래도 고생했어. 다니엘이랑 같이 있기 싫었을 텐데”

    [정말 색다른 경험이었단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구나.]

    단호하게 말하는 비브르의 말을 들으며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언제 또다시 비브르가 필요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 * *

    다음날이 되어 오전 일정을 마친 나는 만약을 대비하여 내가 처음 대공가에 왔을 때 입었던 허름한 옷을 찾아 가방에 넣은 후 마차에 올랐다.

    “여신의 은총이 깃들기를. 어서 오십시오, 미라벨 님.”

    마차에서 내려서자 라이넬 사제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내게 인사했다.

    “라이넬 사제님께도 여신의 은총이 깃들기를.”

    완전히 내려선 이후 라이넬 사제를 향해 인사했다.

    “들어가시죠.”

    라이넬 사제를 따라 평소와 같이 수련장으로 향했다.

    “들어가요, 사제님.”

    “네? 아, 네, 네.”

    평소와 다른 내 모습에 라이넬 사제가 어안이 벙벙한 듯 대답했다. 그러고는 나와 함께 수련장 안으로 들어섰다.

    “미라벨 님, 그 가방은 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평소에는 수정 하나 들고 들어오던 내가 뜬금없이 가방을 챙겨 오니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나는 별거 아니라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별거 아니고, 제가 크라이튼 대공가로 들어오기 전에 입었던 옷이에요.”

    “아, 옷이군요. 그런데 옷을 왜 준비하신 건지…….”

    빠르게 수긍했던 라이넬 사제가 이내 더욱 깊어진 의아함에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이따 말씀드릴게요. 그나저나 오늘은 수련 못 할 것 같아요. 중요한 일이 있으니 대사제분들을 모아 주시겠어요?”

    “중요한 일이면…… 다니엘에 대한 겁니까?”

    “네.”

    내가 즉각적으로 대답하자 라이넬 사제의 얼굴이 굳었다.

    “알겠습니다. 여기서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아니에요, 차라리 뒷문을 통해 회의실로 먼저 가 있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럼 안내를…….”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저도 이제 신전 회의실이 어디인지는 아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대신 빠르게 대사제분들을 모셔 주세요.”

    내가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자 라이넬 사제도 더 제안하지 않았다. 대신 라이넬 사제는 내가 부탁한 것처럼 대사제들을 호출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나는 가방을 챙겨 든 채로 수련장 뒷문을 통해 신전의 대회의장을 찾아 걸어갔다.

    오래 걸리지 않아 대회의장에 도착했다.

    내 짧은 다리로 걸어왔음에도 대회의장에 도착한 것은 나뿐이었다.

    나는 평소 내가 앉았던 자리에 올라앉아 가방을 끌어안고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오래 걸리지 않아 듀아나 신전의 대사제들이 하나둘씩 회의장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신님의 은총이 깃들기를. 성녀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네, 잘 지냈어요.”

    플레온 사제가 나를 보며 알은체했다. 나는 그런 플레온 사제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뒤이어 다른 사제들 역시 나를 향해 여신의 은총이 깃들기를 기원해 주었다.

    신전에 익숙한 대사제 분들이 모이고, 마지막으로 라이넬 사제가 바론 대주교님을 모셔 왔다.

    라이넬 사제는 바론 대주교님이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한 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바론 대주교가 테이블에 놓인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나를 보며 푸근히 미소를 지었다.

    “여신의 은총이 깃들기를. 성녀님, 오늘 중요한 일이 있어서 회의를 소집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일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바론 대주교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어제 비브르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에요. 다니엘에게 악룡 크립소의 씨앗이 될 아이가 붙잡혀 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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