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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67)화 (67/174)
  • 67화

    ‘수확이 있었다고?’

    미처 예상하지 못한 비브르의 대답에 최대한 놀라지 않으려 애를 쓰며 대답했다.

    ‘일단 이 얘기는 나중에 하면 안 될까? 주변에 사람이 있어서 편하게 얘기하기 힘들 것 같아. 그래도 저녁 먹고 나면 시간이 남으니까 그때 얘기해 줘.’

    비브르가 큰 수확이라고 할 정도면 악룡 비브르나 다니엘에 대해서 무언가 커다란 단서를 잡은 것이 틀림없었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이런 대화를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할 자신이 없어 대화를 나중으로 미뤘다.

    [그렇게 하도록 하마.]

    비브르도 내 부탁에 수긍했다.

    식당으로 향하는 내내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기분이었다.

    생각만 같아서는 저녁 식사쯤 한 끼 굶고 비브르가 보고 온 것들을 모두 확인하고 싶었지만, 내가 저녁 식사를 안 먹었다가는 엄마와 크라이튼 대공, 그리고 브라이언과 엘리엇이 번갈아 가며 내 침실로 찾아와 걱정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비브르와 대화를 나눌 시간이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느니 차라리 저녁 식사 한 시간을 할애하여 가족들과 편안히 식사한 후 남은 시간을 활용하는 게 최선일 듯했다.

    저녁 식사 자리에는 비브르가 도착한 것처럼, 다니엘 역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다른 사람은 아직 도착하기 전인지 나와 다니엘뿐이었다.

    껄끄러움을 숨기며 평소 내가 앉는 자리에 앉았다. 다니엘에게는 대각선 자리였다.

    “오늘도 밖에 나갔다가 오시나 봐요, 작은할아버지.”

    별로 말을 걸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더 불편할 듯하여 먼저 다니엘에게 말을 걸었다.

    다니엘은 어린이인 나에게 보내는 것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싸늘하고 냉랭한 시선을 보내며 대꾸했다.

    “그래. 그러는 너도 나갔다 오는 모양이구나.”

    형식적인 질문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네. 아시잖아요. 새벽에는 숙부님께 검술 훈련을 받고, 오전에는 메이너드 자작 부인께 교양 수업을 받고, 또…….”

    “말이 길어지는구나. 자고로 귀족 영애란 말이 길어지면 매력이 없는 법이다.”

    다니엘은 더 이상 나와 대화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고리타분한 말로 내 말을 끊으니 조금 어이가 없기도 했다.

    “하지만 메이너드 자작 부인은 그런 말씀 없으셨는걸요?”

    내 예의범절 교육을 진행했던 메이너드 자작 부인을 언급했다. 하지만 불똥이 메이너드 자작 부인에게로 튀어 버리는 건 원치 않았기에 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근데 항상 하고 계신 브로치요. 그거 건강을 기원하는 의미로 하는 거라면서요?”

    “뭐?”

    내 말에 다니엘이 반사적으로 옷깃에 달린 브로치를 매만졌다.

    “나중에 저도 하나 사 주시면 안 될까요? 엄마한테 선물로 주고 싶어서요.”

    괜히 천진한 눈으로 바라보자 다니엘이 불쾌한지 눈살을 찌푸렸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조용히 있어라.”

    “……네.”

    좀처럼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 다니엘의 화법에 나는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적당히 삐친 어린아이로 보일 정도면 되었다.

    나라고 해서 다니엘과 대화하는 게 좋은 건 아니었으니까.

    “오, 다니엘 웬일로 오늘은 일찍 나왔구나. 그리고 미라벨도.”

    내 곁으로 다가온 크라이튼 대공이 큰 손으로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껴졌지만, 요즘에는 익숙해진 손길이었다.

    “일정이 많이 힘들지는 않니?”

    크라이튼 대공이 나를 향해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크라이튼 대공을 마주 보고 웃으며 대답했다.

    “네. 괜찮아요.”

    “그래, 만일 힘에 부치거든 언제든 말하거라.”

    “네, 할아버지.”

    크라이튼 대공은 내 대답을 들은 후 의자에 착석했다. 뒤이어 브라이언과 엘리엇이 식당 안으로 들어왔고, 마지막으로 엄마가 식당에 도착했다.

    식사시간은 화기애애했다.

    용병이었을 때는 귀족가 식탁 위는 어쩐지 좀 어색하고 불편할 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편견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가족 구성원들이 화목하면 그런 건 크게 의미가 없는 듯했다.

    * * *

    식사를 마친 후에는 욕실로 들어가 목욕한 후 내 침실로 돌아왔다.

    이제부터 새벽까지는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었다.

    커다란 침대에 걸터앉은 나는 어깨에 있던 비브르의 앞에 손을 내밀었다. 비브르는 금세 내 손으로 올라왔다.

    나는 비브르를 그대로 내 침대 위에 올려 주었다.

    이제야 비브르와 마주 보고 대화할 시간이 찾아온 것이었다.

    “다니엘을 따라다니면서 뭘 본 거야?”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와 비브르에게 물었다.

    비브르는 고개를 들어 나를 확인한 후 혀를 한번 날름 내밀고는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사실 닷새 동안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조금 실망하던 차였단다. 내가 첫 닷새 동안 다니엘을 따라다니면서 본 건 너도 알다시피 그가 사업을 위해 사람을 만나고, 움직이는 것뿐이었으니까.]

    여기까지는 아는 내용이었다. 다만 내가 아는 날짜가 사흘에서 닷새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계속 말해봐.”

    [그렇게 닷새가 지났지. 그날은 다니엘이 아침부터 크라이튼 대공가를 떠나있는 날이었단다. 그날도 사업을 하기 위해 움직인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경로가 이상하더구나.]

    “어떻게 이상했는데?”

    [내내 화려하고 좋은 것만 보고 다니던 다니엘이 빈민가를 찾더구나.]

    확실히 다니엘이 빈민가를 찾는 건 이상하게 느껴지기는 했다.

    크라이튼 대공의 동생이며, 사업가인 다니엘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장소가 빈민가였다.

    [자선사업이라도 하나 했더니 아니더구나.]

    비브르가 감질나게 말을 끊었다.

    “그럼? 대체 왜 빈민가에 간 건데?”

    내가 답답함에 재촉하자 비브르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눈꼬리를 내렸다.

    [빈민가의 어느 집을 찾아갔지. 그리고 그곳의 지하에 감옥이 있었단다. 감옥에는 네 명의 사람이 갇혀 있었는데, 그중에는 미라벨 너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더구나.]

    “내가 아는 사람?”

    외부에 내가 알 만한 사람은 몇 없었다. 그나마 기억나는 건 제프리 하나였다.

    “설마 제프리는 아니지?”

    [아니, 그 아이 말고. 일전에 편지로 문제를 일으킨 이 저택의 집사 두 명. 기억하니?]

    “……기억해.”

    다니엘이 무슨 꼼수를 부렸는지 아들의 짝사랑에 대한 복수로 편지를 빼돌렸다고 거짓말한 집사와 그를 감싸 준 집사.

    엄마와 크라이튼 대공이 용서하여 저택에서 쫓겨났던 두 사람이 비브르를 통해 거론되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이 감옥에 갇혀 죽어가고 있더구나.]

    “…….”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비브르를 바라보았다.

    기억하기로 세드릭과 윌터라 불린 두 사람은 다니엘의 체스 말 중 하나일 거라 믿었다.

    그런 두 사람이 다니엘만 아는 감옥에서 죽어가고 있다니.

    “실컷 이용하고 버리는 거구나. 편지 분실 사건이 일단락되었으니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을 테니까.”

    [아마도 그런 것 같았단다. 그들은 말라 죽어가는 와중에 다니엘을 발견하고 간절히 빌었단다. 살려 달라고. 약속대로 죄를 뒤집어썼는데 왜 자신들을 죽이려는 거냐고. 아직도 두 사람의 비명에 가까운 처절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구나.]

    비브르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수호룡인 그에게도 그런 모습들은 보고 듣기 껄끄러운 듯했다.

    [하지만 단순히 버리는 말이기에 그러는 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째서? 다니엘에게 그 두 사람이 이 이상으로 쓸모가 있었어?”

    내가 말하고도 다시 생각해 보니 이상하게 느껴지기는 했다.

    다니엘 같은 간악한 자가 세드릭과 윌터를 살려 줄 그 어떤 이유도 없었다.

    증거인멸을 위해 바로 죽이지 않은 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혹시 내가 모르는 일이 또 얽혀 있는 걸까?

    켜켜이 쌓여가는 의문에 대한 해답은 직접 눈으로 보고 온 비브르만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미라벨.]

    비브르는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비브르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내가 어떻게 실체화하게 되었는지 기억하느냐?]

    비브르의 뜬금없는 질문에 맥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당연하지. 그걸 어떻게 잊겠어? 두 번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인데. 내 몸에 있는 신력과 나를 도와주는 사제들의 신력을 사용해서 실체화한 거잖아.”

    내가 대답하자 비브르가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날 실체화한 건 미라벨 오직 너의 신력 덕분이란다.]

    “뭐? 하지만 그때 분명 듀아나 신전의 사제들이 다 같이 모여들었잖아. 그럼 그들은 뭘 한 건데?”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내가 되묻자 비브르가 곧 답을 내놓았다.

    [신력을 흡수하는 수정에 미라벨 네가 닿지 않도록 도움을 주었지.]

    “아…….”

    [그들이 한 것은 그것뿐이란다. 나를 실체화시키기 위해서는 아주 큰 힘의 신력이 필요하지만, 그들의 미약한 힘으로는 미라벨 널 띄우는 게 고작이다. 물론, 수정들 사이에서 신력을 사용하는 건 인간들 중에서도 아주 뛰어난 신력 보유자임은 확실하단다. 다만, 그들이 보유한 신력이 지금의 성녀인 미라벨 네 힘에 비하면 미약할 뿐이지.]

    비브르는 단정하며 대답했다.

    나는 그제야 그의 말에 수긍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이유가 있으니까 그 일을 언급했을 거잖아. 안 그래?”

    [맞아.]

    비브르가 짧게 대답한 후 뜸을 들였다. 무슨 이야기이기에 이리 뜸을 들이나 했더니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이 충격적이었다.

    [악룡 크립소에게도 있단다. 그런 존재가. 그리고 그 씨앗이 될 아이가 내가 본 감옥에 있는 듯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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