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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66)화 (66/174)
  • 66화

    다행히 아무도 비브르가 다니엘의 머리 꼭대기 위에 올라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평소와 같은 날처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가족들과 식사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모처럼 비브르가 없는 밤을 맞이했다.

    마차를 오래 타고 있어 피곤했기에 바로 잠들까 하다가 퍼뜩 드는 생각에 눈을 떴다.

    그러고는 침대에 누운 채로 조용히 눈을 감고 비브르를 떠올렸다.

    ‘비브르, 내 말 들려?’

    실체화 된 비브르와 이토록 멀리 떨어져 본 적이 없기에 혹시나 싶은 마음에 시도해 본 대화였다.

    듀아나 신전에 있을 때는 조금 떨어져 있어도 비브르의 말을 들을 수가 있었다.

    만일 거리가 있어도 비브르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거라면, 한번 실험해보고 싶은 게 있었다.

    ‘안 들려?’

    기본적으로 비브르와 나는 생각으로써 대화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비브르가 실체화 된 이후로 이렇게 떨어져 본 적이 없었기에 이런 식의 대화가 되나 싶어 도전해 본 것이었다.

    정신을 집중하면 그래도 들리지 않을까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들리는구나.]

    ……대답이 없다고 생각한 순간, 비브르에게서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집중하느라 감았던 눈을 뜨고 상체를 일으켰다.

    ‘내 목소리가 들려? 정말로?’

    내가 헛소리를 들은 건 아닌가 싶어 재차 비브르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대답은 즉각적으로 들려왔다.

    [그래, 들린다고 하지 않았느냐?]

    툴툴거리는 목소리로 비브르가 내게 대답했다.

    [그러는 미라벨, 너는 내 목소리가 들리느냐?]

    ‘들리고말고! 그러니까 놀란 거잖아.’

    대답을 하면서도 신기했다.

    멀리 떨어진 대상과도 이런 식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게 꼭 마법 같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이런 소통은 마법이라기 보다는 나와 비브르의 존재 자체가 특이해서 그런 거겠지만, 어쨌든 신기한 것은 신기한 것이었다.

    ‘거기는 어때? 보아하니 다니엘도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간 것 같던데.’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다니엘이 이 저택 방에서 무엇을 하는지.

    일전에 아무도 몰래 악룡 크립소의 힘을 풀어내었던 기억 때문인지 왠지 방에서도 수상한 것들을 숨겨두고 꿍꿍이를 꾸미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직까지는 특이한 게 없단다. 책상에 앉아서 서류를 처리하는 것 같기에 읽어 보았더니 그가 하는 사업에 관한 내용인 것 같구나.]

    그러나 비브르에게서 들려온 대답은 너무 식상한 내용이었다.

    조금 김이 새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크라이튼 대공가에서 대놓고 일을 벌이지는 않는 건가?’

    [글쎄, 그건 두고 볼 일이겠지.]

    ‘알겠어. 그럼 다니엘이 무슨 일을 저지르는 것 같으면 바로 내게 말해 줘.’

    [알았다. 밤이 깊었는데 어서 자거라. 인간 아이는 어려서 잠을 많이 자야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하니, 훌륭한 성녀가 되기 위해 지금은 잠을 푹 자 두거라.]

    묘하게 다정한 말투에 나는 허탈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럼 잘 자.’

    [벌써 잊은 모양이구나, 미라벨. 나는 잠을 자지 않는단다. 밤새 다니엘이 수를 쓰는지 확인해 보도록 하마.]

    비브르의 마지막 말에는 굳이 답하지 않았다.

    과거로 돌아와 대공가에 머무르게 된 이후로 어떤 방식으로든 비브르가 항상 곁에 있었기에 별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비브르가 내 곁을 떠나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하니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깊이 생각하면 비브르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지만, 그래도 내 곁에 있고 없고의 차이가 생각보다 컸다.

    괜히 허전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폐부가 채워질 때까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여전히 허전하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내 스스로 마음을 정리하기에는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 * *

    비브르가 다니엘에게 간 지 오늘로 일주일이 지났다. 비브르는 그동안 다니엘의 자잘한 사항에 대해서 보고했다.

    다니엘이 사업을 위해 자리를 비우는 일이나, 지인을 만나는 일까지 지나칠 정도로 상세하게 보고하는 탓에 그냥 확실한 건 아니면 전달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까지 한 상황이었다.

    오늘도 내 일과는 새벽부터 엘리엇과 함께 검술 훈련에 몰두했고, 아침을 먹고 난 후에는 메이너드 자작 부인을 만나 공부를, 점심 이후에는 듀아나 신전에서 신력을 배우는, 평소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일정이었다.

    조금씩 검술 실력도 늘고 있었고, 신력을 사용하는 데도 능숙해지고 있었다. 메이너드 자작 부인의 교양은 아직까지도 어려운 편이었지만, 그래도 못 따라갈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 미라벨 님, 오늘도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돌아가셔서 푹 쉬시고 내일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신력 훈련을 마치고 나니 라이넬 사제가 평소처럼 나에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라이넬 사제님. 그럼 저도 들어가 볼게요.”

    나는 라이넬 사제를 향해 정중히 인사를 마친 후 복도에 마련된 의자에서 기다리는 칼리나와 아니타를 대동한 채 돌아가는 마차에 올라탔다.

    나를 기다리면서 심심했던 건지 칼리나는 아니타에게 수놓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니타, 수놓는 거 재미있어?”

    “네! 아직 서툴지만 하얗던 공간이 제가 꾸미는 대로 채워지는 게 정말 재미있어요.”

    아니타가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 어리고 서툰 탓에 아니타의 손에 들린 천에는 꽃으로 보이는 엉성한 수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 수를 놓기 위해 날카로운 바늘에 찔려 가며 진땀을 뺐을 아니타의 수고가 보이는 듯해 웃을 수가 없었다.

    “그럼 손 줘 봐.”

    “손을요?”

    “응.”

    아니타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저택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신력을 사용한다고 해도 다니엘에게 들킬 일이 없었고, 무엇보다 아니타와 칼리나는 내가 신력을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아니타의 손에 신력을 사용했다.

    미세한 실처럼 내 손에서 흘러나온 빛이 아니타의 손을 감싸기 시작했다.

    “와아!”

    짧은 빛무리가 아니타의 손가락에 스며들었다.

    아니타는 신기해하며 자신의 손을 감싼 반창고를 떼어냈다. 다행히 아니타의 손가락은 아무런 상처도 없었던 것처럼 매끈하기만 했다.

    “정말 감사해요, 작은 아가씨.”

    뺨을 발그레 붉히며 웃는 아니타의 모습이 귀여웠다.

    “아냐. 아니타가 안 아프면 됐어.”

    “제가! 꼭 작은 아가씨를 위해서 예쁘게 수를 놓아 드릴게요.”

    “나한테?”

    뜻밖의 제안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타는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지금 수놓는 것도 아가씨 드리려고 놓는 거예요!”

    그 말에 나는 아니타가 수를 놓는 손수건과 칼리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맞아요. 아니타가 그래서 열심히 수를 배우고 있는걸요.”

    아니타의 말이 사실인 듯했다.

    그 말을 들으니 손까지 다쳐가면서 수를 놓는 아니타가 정말 고맙고 짠하게 느껴졌다.

    나는 아니타를 향해 시선을 옮긴 후 아니타의 손을 꼭 잡았다. 아직 나보다 작은 아니타의 여린 손이 내 작은 손에 꼭 들어왔다.

    “고마워, 아니타. 꼭 소중히 보관할게. 그래도 무리해서 하지는 마. 손 찔리면 아프잖아.”

    “괜찮아요. 작은 아가씨가 낫게 해 주실 거잖아요.”

    아니타는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타의 상처라면 당연히 그래야지.”

    내 대답이 기뻤는지 아니타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한참 웃음꽃을 피우고 있는 사이 마차가 저택에 도착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마차에서 내린 후 저택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미라벨!]

    그때, 붉은 카펫 위로 하얀색의 귀여운 실뱀 한 마리가 나를 향해 빠른 속도로 기어 오고 있는 게 보였다. 머릿속을 울리는 익숙한 목소리는 굳이 기억을 더듬지 않아도 누구인지 뻔히 알 수 있었다.

    ‘비브르!’

    내가 두 눈을 휘며 웃었다. 비브르가 나에게 올라타기 편하도록 잠시 자리에 멈추어 섰다.

    “작은 아가씨?”

    의아함을 느낀 칼리나가 나를 불렀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녀를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가자.”

    “네. 알겠습니다. 혹시 어디 불편하신 거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응. 꼭 그렇게 할게.”

    대답을 마칠 때쯤에는 이미 비브르가 내 어깨에 올라온 상태였다.

    ‘그동안 잘 지냈어?’

    다니엘을 따라다니며 시끄럽게 재잘거리던 것이 귀찮아서 사소한 건 일일이 공유할 필요 없다고 얘기한 게 불과 나흘 전의 일이었다.

    내가 조용히 해 달라고 부탁한 이후로는 통 대답이 없어서 조금 답답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섣부르게 비브르에게 말을 걸 생각은 하지 못했다. 혹시나 그랬다가 또 첫 사흘 동안 그랬던 것처럼 멈추지 않고 재잘거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비브르의 모습을 보니 반가움이 먼저 올라왔다.

    [잘 지냈지. 미라벨, 이 상태의 나를 해칠 수 있는 존재는 거의 없어. 악룡 크립소가 나를 해치거나, 성녀로서 나와 이어져 있는 널 해치지 않는 이상은.]

    ‘내가 다치면 비브르 너도 다치는 거야?’

    그건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이었다.

    나는 말 그대로 사념체의 실체화일 뿐인 비브르를 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있어도 처음 비브르가 말했던 것처럼 악룡 크립소의 힘이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다치면 비브르 역시 다치게 되다니.

    [당연하단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실체화된 건 너의 신력 덕분이니까. 만일 실체화하지 못할 정도의 부상을 당한다면, 나는 다시 펜던트 안으로 돌아가게 될 거란다.]

    ‘그건 몰랐네.’

    [그럼 앞으로는 알아 두도록 하렴. 그리고 나를 위해서라도 다치지 않도록 주의하렴. 이건 너를 위한 충고이기도 해.]

    비브르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내게 말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의할게. 그래서, 뭔가 수확은 있었어?’

    아무런 수확도 없이 다니엘을 따라다니기만 한 게 아닌가 싶어서 물었다.

    최근 나흘간 아무런 말도 없었기에 사실 기대하지 않으며 물어본 것이었다. 그러나 비브르는 자못 비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있었지. 그것도 아주 큰 수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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