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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64)화 (64/174)
  • 64화

    “친구요?”

    황제 폐하가 꺼낸 말이 너무 뜻밖이어서 나는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황제 폐하는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입을 축인 후 말을 이었다.

    “그래. 에이드리안이 황태자라고는 해도, 아직 일곱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라 친구가 많이 필요할 테지. 그런데 다른 귀족 자제들은 에이드리안을 마냥 어려워하는 것 같더구나.”

    황제 폐하는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그 너머에 에이드리안이 있을 것을 아는 듯한 눈빛이었다.

    “내 아들이지만, 참 외롭고 가여운 아이야.”

    작게 중얼거린 황제 폐하는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더니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나를 돌아보았다.

    “사실은 이런 부탁을 하기까지 많이 고민했다. 그대는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만, 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에이드리안에게 사랑을 많이 주지 못했거든. 어리석게도.”

    황제 폐하의 목소리에는 짙은 회한이 섞여 있었다.

    “에이드리안도 애정이 고픈 아이라는 걸 내가 너무 늦게 깨달았구나. 그동안 바보같이 내 아집에 휩싸여서.”

    황제 폐하의 말씀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어 모호한 점이 있었다. 그러나 엄마의 과거를 아는 나에게는 그의 말이 엄마에 대한 감정을 이제는 정리했다는 듯이 들렸다.

    “에이드리안에게 한참 못난 모습을 보여 주었는데, 이제야 좋은 아버지 노릇을 하려고 한단다. 부디 그대가 도와주겠느냐?”

    “네, 폐하. 그런 거라면 어렵지는 않아요. 이미 황태자 전하와 저는 친구인걸요.”

    내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자 황제 폐하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안심한 듯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말해 줘서 정말 고맙구나.”

    “그런데요, 폐하.”

    “그래, 말해 보렴.”

    “직접 표현하지 않으면 황태자 전하께서 폐하의 마음을 모르시지 않을까요?”

    주제넘은 말이기는 했지만, 어린아이가 멋모르고 하는 말인 것처럼 나는 두 눈을 깜박거리며 말했다. 지금 내 나이가 아홉 살인 걸 고려한다면 그렇게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을 터였다.

    내 말을 들은 황제 폐하는 다시금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구나. 천천히 에이드리안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겠지.”

    여기서 더 끼어드는 것은 지나친 간섭일 것 같아 나는 더 말을 꺼내는 대신 황제 폐하를 따라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가 봐도 되는 건지 속으로 궁금해하고 있을 때, 황제 폐하께서 어렵게 입을 열었다.

    “괜찮다면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느냐?”

    “네? 어떤 것을요?”

    “그러니까…….”

    황제 폐하는 아까보다도 더 머뭇거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표정을 보아하니 괜히 이야기를 꺼낸 듯한 얼굴이었다.

    “혹시 가일 경이, 좋은 아버지였는지 물어봐도 되느냐?”

    오랜 망설임 끝에 황제 폐하의 입에 언급된 것은 내 아버지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황제 폐하께서 씁쓸하게 웃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지금보다 더 어릴 때 돌아가셨으니 너 역시 기억이 온전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미안하다. 방금 질문은 잊어 주렴.”

    확실히 황제 폐하의 말씀대로였다.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억이 온전히 남아 있는 게 더 말이 안 될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분명히 기억하는 것은, 내 희미한 기억 속에서도 어린 나와 놀아 주던 아버지의 미소가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엄마가 잊지 못한다는 것도.

    “좋은 아빠였어요. 마을 자경단에 자원해서 항상 바쁘셨지만, 저녁에는 저와 놀아 주었고, 멀리 순찰가는 날에는 저와 엄마를 위해 꽃을 꺾어 오는 자상하고 좋은 아빠였어요.”

    나는 내 기억 속 아빠의 모습을 천천히 꺼내었다. 이미 돌아가신 지금에도 엄마가 아빠를 잊지 못하는 건 아빠의 사랑이 여전히 그리웠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아빠의 모습을 희미하게나마 기억하고 있었다.

    내 말을 들은 황제 폐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생각할 것이 많은지 몇 번이고 한숨에 가까운 숨을 내쉬며 침묵을 유지할 뿐이었다.

    “그래. 그럴 만한 사람이지.”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던 황제 폐하는 긴 들숨을 내쉬며 내 말에 동의했다.

    “내 기억 속에서도 네 아버지, 가일 휴스턴은 그런 온화한 사람이었단다. 기사를 하기에는 너무 무른 사람이 아닌가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절대로 자신이 관철하는 바를 굽히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지. 소공녀에게도 그런 사람이었나 보구나.”

    그에게서 흘러나온 말은 체념에 가까운 말이었다.

    “이제 되었다. 남은 다과를 편안히 먹고 네가 좋을 때 가도 좋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앞에 놓인 스콘을 하나 집어 먹고, 남아 있는 주스를 모두 마셔 버렸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 폐하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럼 만나 뵈어서 정말 영광이었습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폐하.”

    “생각보다 빠르게 가는구나. 나와 있는 게 많이 불편하느냐?”

    다과를 먹고 가도 좋다고 하기에 내 딴에는 예의상 준비된 스콘 하나와 주스 한 잔을 마신 건데 너무 마음이 앞선 모양이었다.

    조금 민망한 기분으로 황제 폐하의 눈치를 살폈다.

    “그게 아니라, 밖에 엄마가 기다리고 계실 거 같아서요. 같이 왔거든요.”

    “코넬리아가?”

    “네.”

    갈등하는 듯 황제 폐하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러더니 픽, 맥없이 웃음을 흘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 보거라.”

    “예, 폐하.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다시 한번 황제 폐하를 향해 정중히 인사를 올린 후 종종거리는 걸음으로 응접실을 벗어났다.

    밖에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엄마와 황후 폐하, 그리고 에이드리안은 복도에 없었다.

    하기사,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데 계속 복도에 있을 수는 없었겠지.

    나는 빠르게 수긍하고 날 기다리고 있던 칼리나와 아니타를 바라보았다.

    “다른 분들은?”

    “근처에 있는 다른 응접실에서 기다리신다고 하셨어요.”

    “그래? 나도 거기로 갈게.”

    “예.”

    “모시겠습니다, 크라이튼 소공녀님.”

    황성의 지리를 모르는 칼리나와 아니타를 대신하여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대답했다.

    일전에 황후 폐하와 처음 만났을 때 봤던 시녀였다.

    “저번에 봤는데 혹시 이름이 뭐야?”

    “브리지나 마빈입니다. 브리지나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녀, 브리지나는 나를 향해 빙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 역시 그녀를 향해 미소로 화답했다.

    “그럼 브리지나, 안내해 줄래?”

    “예.”

    브리지나는 조금 전 내가 황제 폐하와 알현한 응접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다른 응접실로 나를 안내했다.

    똑똑, 브리지나가 가볍게 문을 두드리자 맑고 청아한 소리가 울렸다.

    “크라이튼 소공녀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렴.”

    황후 폐하께서 허락을 내리자 곧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딱딱하고 어색한 공기가 흐르던 황제 폐하의 응접실과 달리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흐르고 있었다.

    “벨, 어서 오렴.”

    엄마가 소파 옆자리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나는 잰걸음으로 달려가 엄마가 가리킨 곳에 앉았다.

    테이블에는 화려한 디저트가 빼곡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황태자 전하는요?”

    내가 황제 폐하를 알현하러 갈 때만 하더라도 황후 폐하와 함께 있던 에이드리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에이드리안이라면 공부하러 갔단다.”

    황후 폐하게서 다정한 목소리로 내게 설명해 주었다. 나는 금세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바쁘시네요.”

    “그런 편이지. 장차 황제가 되려면.”

    쓰게 웃던 황후 폐하가 문득 나를 보며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황제 폐하는 잘 뵈었니?”

    “네.”

    “무슨 말씀을 하시든? 아, 혹시 말하기 곤란한 거라면 말하지 않아도 된단다.”

    조심스럽게 배려하는 황후 폐하의 말에 나는 그런 일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황태자 전하의 좋은 친구가 되어달라고 하셨어요.”

    “……뭐?”

    내 말에 황후 폐하께서 놀라셨는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들고 있던 찻잔과 컵 받침을 하마터면 떨어트릴 뻔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황후 폐하는 테이블에 컵 받침과 찻잔을 차례로 올려놓은 후 나를 다시 돌아보았다.

    “황제 폐하께서 미라벨 네게 에이드리안과 좋은 친구가 되어 달라고 했단 말이니?”

    믿지 못하시는지 황후 폐하는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며 물었다. 나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맞아요. 그 이야기를 하러 부르셨대요. 그전까지는 황태자 전하께 너무 소홀했다고요. 지금까지는 못난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앞으로는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으시대요.”

    “…….”

    내 말에 황후 폐하는 울 것처럼 미간을 찡그렸다.

    “정말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

    엄마가 확인차 내게 물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응. 그렇게 말씀하셨어.”

    굳이 이 자리에서 황제 폐하께서 내 아버지에 관해서 물어보았다는 것을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입술을 꾹 다물었다.

    엄마는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준 후 곧 황후 폐하를 바라보았다. 미안함과 안도가 섞인 눈빛이었다.

    “정말 잘 되었어요, 황후 폐하.”

    “응.”

    엄마가 손수건을 꺼내어 황후 폐하에게 건네자 황후 폐하께서 손수건을 받아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었다.

    “고마워, 코넬리아.”

    먼저 엄마를 향해 인사를 건넨 황후 폐하는 이내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맙단다, 미라벨. 나도 부탁할게. 부디 우리 에이드리안과 좋은 친구가 되어 주렴.”

    “네. 그리고 황제 폐하께도 말씀드렸지만, 전 이미 황태자 전하와 친구가 되기로 했는걸요. 약속을 어기진 않아요.”

    “그렇게 말해 줘서 더 고맙다.”

    황후 폐하는 붉게 물든 눈가를 곱게 접어 웃었다.

    우리는 응접실에서 조금 더 시간을 보낸 후, 저녁 식사 시간이 될 즈음이 되어서야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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