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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63)화 (63/174)
  • 63화

    황제 폐하를 알현해야 했기에 일찍 식사를 마친 후 목욕재계하여 옷을 갈아입었다.

    하늘색 프릴 드레스였다. 허리를 둘러맨 리본을 앞으로 묶는 게 포인트인 드레스였는데, 느낌을 살려야 한다는 이유로 디자이너가 리본을 직접 묶어 주기까지 했다.

    마지막으로 치맛자락까지 잘 정돈한 후에야 드레스룸을 나올 수 있었다.

    “얼른 가셔요. 큰 아가씨께서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응. 가자.”

    칼리나가 나를 재촉했다. 엄마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 빠르게 계단을 내려왔다. 이미 바깥에는 칼리나의 말대로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

    내가 엄마를 부르자 엄마가 그제야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엄마가 나를 확인하고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쩜, 우리 벨은 뭘 입어도 예쁘네.”

    엄마가 내 뺨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나는 엄마의 손길이 기분 좋아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엄마 닮아서 그런가 봐.”

    “정말?”

    “응!”

    나를 꼭 끌어안아 준 엄마가 곧 나를 놓아 주었다. 대신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가자.”

    엄마의 손을 잡고 마차 앞으로 다가갔다. 마차 앞은 크라이튼 대공과 브라이언이 지키고 서 있었다.

    “잘 다녀오렴.”

    “무슨 일이 있으면 사람을 보내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와줄 테니.”

    황제 폐하를 알현하러 가는 것뿐인데 비장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런 일 없을 거예요. 저도 같이 가니까.”

    엄마는 피식 웃으며 크라이튼 대공과 브라이언에게 한마디 하고는 내가 마차에 올라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걱정하지 말고 편히 계세요, 아버지. 그리고 오빠도.”

    엄마 역시 마차에 올라탄 후 창문을 열어 여전히 우리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잘 다녀올게요. 할아버지, 그리고 숙부님. 엄마 말대로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나는 두 분이 걱정을 덜 수 있도록 일부러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제야 두 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 기다리고 있으마.”

    “무사히 다녀오렴, 벨.”

    두 분은 마차가 출발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마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도 마차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크라이튼 대공과 브라이언에게 손 인사를 건넸다.

    “벨! 위험하니까 바로 앉아. 마차 밖으로 머리 내밀고 손 내밀면 안 되는 거야. 알겠어?”

    “아, 으응.”

    그러나 엄하게 경고하는 엄마의 말에 얌전히 자리에 가서 앉았다.

    엄마는 내 모습을 확인한 후 마차 창문을 닫아 버렸다.

    * * *

    마차가 황성에 도착하고,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황성에 입성했다.

    “코넬리아!”

    “미라벨!”

    성 안쪽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황후 폐하와 에이드리안이 각각 엄마와 나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황후 폐하.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엄마가 먼저 황후 폐하를 향해 인사했다. 나도 그런 엄마를 따라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동안 건강하셨어요, 황후 폐하?”

    황후 폐하는 내 인사에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미라벨. 다시 만나 반갑구나.”

    “미라벨! 오늘 온다고 해서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황후 폐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에이드리안이 내게 말을 걸었다.

    그사이 자연스럽게 황후 폐하가 엄마와 대화하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나도 에이드리안과 함께 두 분을 따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응. 어제 폐하께서 널 부르는 편지를 썼다고 해서 그때부터 기다렸어.”

    “황제 폐하께서 편지 보낸 것을 전하께 알리신 건가요?”

    “응. 어제 디너 타임에 말씀해 주셨어.”

    생각보다 황제 폐하께서 에이드리안에게 사소한 것까지 이야기하는 모양이었다.

    일전에 엄마와 함께 황성에 왔을 때는 너무 무정하고 냉정해 보여서 그런 이미지를 상상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때, 응접실을 나서며 에이드리안과 마주쳤던 그 순간에, 에이드리안이 황제 폐하 때문에 황후 폐하가 슬펐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겨서 더욱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근데 제프리는 그 이후로 안 와?”

    “네. 바쁘거든요.”

    “아쉽다. 다음에 제프리가 오거든 꼭 날 불러 줘. 알았지?”

    “꼭 그렇게 할게요.”

    황제 폐하를 알현하러 가는 사이에 에이드리안이 지치지 않고 옆에서 재잘거렸다. 그 덕에 황제 폐하를 알현한다는 부담감을 조금은 덜 수 있어 좋았다.

    “고하겠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계실 응접실 앞에 도착하자 시종이 정중히 말했다.

    “그래.”

    황후 폐하께서 나를 한 번 확인한 후 대답했다. 시종은 조용히 문에 달린 고리로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똑똑, 청아한 소리가 울리고 난 후 시종이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 미라벨 크라이튼 들었습니다.”

    “들어오게.”

    안에서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 시종이 문을 열어 주었다.

    “잘하고 와. 기다리고 있을게.”

    엄마는 마지막으로 들어가기 전에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응원해 주었다.

    나는 걱정할 거 없다는 의미로 밝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응접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응접실은 이전에 보았던 것처럼 화려한 장식품이 이곳저곳에 놓여 있어 눈을 매혹시켰다.

    나는 눈만 움직여 안을 둘러보다가 마침내 정면에 나를 보고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까만 머리칼에 붉은 눈동자. 커다란 체격에 차분해 보이는 인상을 하고 있는 남자였다.

    제국의 황제. 제임스 바젯 카스트로.

    나는 그의 얼굴을 보며 이상하게 친근한 느낌을 받았다.

    일전에도 본 적 있는 얼굴이라 더욱 익숙하고 친근하게 느껴지는 걸까?

    거기까지 생각한 후에야 뒤늦게 그의 외모가 에이드리안과 많이 닮았음을 깨달았다.

    “인사는 안 하는 건가?”

    황제가 건조한 목소리로 나를 향해 물었다.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린 후 메이너드 자작 부인에게 배운 것을 떠올리며 느릿한 자세로 황제 폐하를 향해 인사했다.

    “제국의 주인인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아주 우아하고 완벽한 동작이었다. 메이너드 자작 부인이 봤다면 매우 뿌듯하게 느꼈을 것이 분명했다.

    “…….”

    그러나 황제 폐하로부터 들려 오는 대답은 없었다.

    나는 흘긋 눈만 들어 황제 폐하를 살폈다. 그만하라는 말이나 나를 향한 대화조차도 없는 상태였다.

    이대로 몸을 일으켜도 되는지 고민하는 찰나에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에이드리안이 그대를 최근 자주 찾는다는 말은 들었다.”

    나는 그 말을 신호로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비로소 내 앞에 있는 황제 폐하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복잡 미묘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게 그리 긍정적인 신호 같지는 않아 나는 황제 폐하 쪽에서 먼저 말을 꺼내기까지 침묵을 유지하기로 했다.

    그러자 황제 폐하가 천천히 나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성큼성큼 걷는 모양새가 아직 어린 나에게는 제법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내 앞으로 다가와 곧 오른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나와 눈높이가 같아진 황제 폐하는 처음 보았을 때와 달리 근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나를 살폈다.

    “과연…… 에이드리안이 빠질 만하구나.”

    “네?”

    “어쩜 코넬리아의 어릴 적과 이리 닮았는지.”

    쯧, 하고 혀를 한 번 찬 황제 폐하는 곧 손을 들었다. 영문을 모를 말과 행동에 당황해하는 사이, 그는 큰 손으로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 주었다. 우려한 것과 달리 조심스럽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잘 왔다. 일단 앉는 게 좋겠구나.”

    황제 폐하는 말을 마친 후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네, 알겠습니다.”

    내가 대답하자 황제 폐하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옆에 놓인 소파를 가리켰다.

    “앉으렴.”

    “네, 황제 폐하.”

    내가 권한 자리에 앉자, 황제 폐하는 상석에 앉았다.

    “황후에게 듣자 하니 주스를 좋아한다고 하더구나.”

    “네. 좋아하는 편이에요.”

    “그럼 주스를 준비해 오라 이를 테니 잠시만 기다리거라.”

    말을 마친 그는 소파 옆 작은 서랍 위에 놓인 종을 집어 들었다. 가볍게 종을 흔들자 문이 열리고 시녀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마실 차와 크라이튼 소공녀가 마실 주스를 준비해 오게.”

    “예, 황제 폐하.”

    시녀는 대답을 마친 후 응접실을 벗어났다. 그러나 차를 준비하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아마도 내게 편지를 보낸 시점부터 전부 준비가 되어 있던 모양이었다.

    다시 들어온 시녀가 우리 사이에 차와 주스, 그리고 간단하게 요기할 수 있는 스콘을 세팅하고 나갔다.

    나는 슬쩍 황제 폐하의 눈치를 살폈다. 이대로 먹어도 되는 건가 하는 마음에서였다. 안 그래도 황제 폐하와 알현한다는 생각에 입이 조금 마르던 터였다.

    “편히 들거라.”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

    그제야 마음을 놓고 주스를 마셨다.

    “그대와 에이드리안이 친구가 되기로 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사실이냐?”

    “네, 사실이에요.”

    무도회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친구가 되기로 했으니 황제 폐하의 귀에 들어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런 간단한 이야기를 하자고 부르신 걸까?

    조금은 싱거운 기분이 들었다.

    “에이드리안이 친구인 건 싫지 않으냐?”

    “……네?”

    뜬금없는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황제 폐하를 확인했다. 좀처럼 그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나는 그가 나를 왜 이곳까지 부르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으로 이어진 말 때문이었다.

    “싫지 않다면, 앞으로 우리 에이드리안과 좋은 친구가 되어 줄 수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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