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62)화 (62/174)

62화

비브르가 천천히 내 팔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신기하고도 묘한 기분에 두 눈을 깜박이며 비브르가 하는 양을 바라보았다. 내 어깨에 올라온 비브르는 즐거운 듯이 꼬리를 흔들었다.

퍽 귀여운 모습이었다.

뱀을 보고 귀엽다고 생각한 적이 그동안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비브르는 예외였다.

“그런데 아까 처음이라 도와준다고 했는데, 그럼 구체화를 또 할 일이 있는 거야?”

기억을 되짚으며 물었다.

[언젠가는 그럴 때가 올 수도 있단다.]

비브르는 애매하게 말을 흐렸다.

“그때가 안 올 수도 있는 거지?”

[그래.]

“그럼 됐어. 다음에 다시 구체화할 일이 생기면 그때는 두 번 다시 안 할 거야. 그냥 펜던트로 남아 있어.”

체내의 신력이 고갈되고 내 생명력마저 모조리 뽑혀 나가는 듯한 그 감각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그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마.]

비브르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도 방법은 배워 둘게.”

비브르가 힘없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이 무척 귀여워서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비브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다행히도 싫지 않은지 비브르가 내 손가락에 머리를 비볐다.

“플레온 사제님, 오늘 할 일은 끝난 건가요?”

“예, 오늘은 신력을 쓰느라 많이 피곤하셨을 테니 이만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플레온 사제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나 역시도 플레온 사제를 향해 인사를 마쳤다.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래야 성녀님을 모시는 분들이 의심하지 않을 테니까요.”

라이넬 사제가 때를 맞추어 내게 제안했다. 나는 빙긋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라이넬 사제님.”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사제들에게 인사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대주교 바론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왜 부른 건가 싶어서 바라보니 그가 나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아까 비브르 님께서 실체화하며 목걸이가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받아 들고 확인해 보니 아까까지 비브르가 갇혀 있던 펜던트 목걸이였다.

그러나 아까와 다른 것이 있었다. 이전에는 뱀 모양의 비브르가 펜던트에 새겨져 있었지만 지금은 텅 비어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펜던트를 앞뒤로 확인했다.

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은 펜던트는 앞뒤를 구분할 수가 없었다.

“챙겨 주셔서 감사해요.”

일단 대주교 바론에게 인사한 후 펜던트를 주머니에 넣었다.

비브르가 봉인된 것도 아닌데 굳이 목걸이를 하고 있을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정말 가 볼게요!”

“그럼 편안히 돌아가십시오, 성녀님.”

내가 재차 꾸벅 인사하자 사제들이 흐뭇한 얼굴로 나를 배웅했다.

라이넬 사제를 따라 수정방을 나왔다. 왔던 것처럼 복도를 거슬러 올라간 이후 수련장으로 들어선 나는 익숙하게 수련장과 바깥을 연결하는 문을 열었다.

“작은 아가씨!”

“나오셨어요? 오늘은 좀 빨리 끝나셨네요?”

벤치에 앉아서 우리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칼리나와 아니타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반겼다.

“응. 좀 피곤해서 일찍 돌아가려고.”

나는 조금 긴장한 채로 칼리나를 바라보았다.

내 어깨에 버젓이 비브르가 올라와 있는 상황이었다. 비브르는 자신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을 것이라 했지만, 솔직히 내 눈에 멀쩡히 보이는 뱀을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어?”

그때, 아니타가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비브르를 알아본 걸까?

마른침을 삼키며 아니타를 확인했다.

“왜 그래, 아니타?”

“아가씨, 목걸이가 없어졌어요.”

아니타는 자신의 목을 가리키며 내게 말했다. 나를 보고 의아해하는 게 목걸이의 유무뿐이라니, 정말 비브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비어 있는 목을 매만졌다.

“훈련하는 데 방해가 되길래 주머니에 넣었어.”

아니타는 빠르게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돌아가자. 빨리 가서 쉬고 싶어.”

“예, 작은 아가씨.”

칼리나와 아니타를 대동한 채 신전을 나왔다.

수련장부터 신전 입구까지는 이미 몇 번이나 왕복했기에 안내가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라이넬 사제는 친절하게 나를 신전 입구까지 안내해 주었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미라벨 님.”

라이넬 사제는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배웅했다.

나는 예를 차려 그에게 인사했다.

“오늘도 감사했어요. 그럼 또 올게요.”

인사를 마친 후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는 칼리나와 아니타가 올라타고 난 이후에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칼리나와 아니타에게 비브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음에도 두 사람의 시선이 의식되는 것은 피할 수가 없었다.

[내 말을 믿지 못하는구나. 저들에게는 내가 보이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렴.]

‘응, 알겠어.’

비브르가 내 뺨에 머리를 대며 말했다. 나는 아니타와 칼리나를 의식하지 않으려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근데 지금 상태에서도 이런 식으로 대화가 돼? 내 말 들리는 거야?’

펜던트에 들어가 있을 때는 이런 식으로 대화가 가능했기에 반사적으로 비브르를 향해 대답한 것이었다.

그런데 구체화된 지금도 비브르와 대화가 되는지 궁금해졌다.

[다 들린단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현재 구체화된 건 모두 네 신력 덕분이란다. 그러니 미라벨 네가 나와 대화하고자 마음 먹는다면 언제든 이런 식으로 대화가 가능하지.]

‘그건 다행이네.’

이번에도 굳이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대화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다행이었다.

구체화했다가 대화가 불편해지면 오히려 펜던트에 봉인되어 있을 때가 더 나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괜히 비브르와 대화하는 걸 다른 사람이 보기라도 한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게 분명했으니까.

한참을 달리고 난 후에야 마차가 대공 저 앞에 도착했다.

“작은 아가씨.”

막 기사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려서는데 집사 한 명이 나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평소 크라이튼 대공을 보필하는 집사로, 이름은 벤자민 디어렛이었다.

“왜?”

그가 날 찾을 일이 무엇인가 싶어 바라보니 벤자민이 푸근히 미소를 지었다.

“대공 각하께서 작은 아가씨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할아버지께서? 안내해 줄래?”

“예. 이리로 오십시오.”

벤자민을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벤자민은 크라이튼 대공의 집무실로 나를 안내했다.

똑똑, 집무실 문 앞으로 다가간 벤자민이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대공 각하, 작은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거라.”

안에서 크라이튼 대공의 목소리가 들렸다. 벤자민은 문을 열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들어가 보십시오.”

고개를 한번 끄덕인 후, 곧 집무실로 들어섰다.

“오, 왔구나. 아가.”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것은 크라이튼 대공이었다. 처음에는 크라이튼 대공만 있는 줄 알았는데 집무실에 마련된 소파에 엄마와 브라이언이 앉아 있는 모습이 뒤늦게 시야에 포착되었다.

“저를 기다리셨다고 들었어요. 무슨 일이에요?”

의아한 마음에 세 분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일단 앉거라, 벨. 서서 얘기하면 힘들지 않니?”

브라이언이 내게 앉을 것을 권했다.

“그래. 일단 앉는 게 좋겠구나.”

우선 세 분의 제안대로 엄마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사이에 하녀가 눈치 좋게 다가왔다.

“우유로 부탁해.”

“네, 작은 아가씨.”

하녀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곧 집무실을 나갔다.

그러나 크라이튼 대공과 브라이언, 그리고 엄마까지도 선뜻 내게 말을 건네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내가 저택을 비운 사이에 다니엘이 무슨 문제라도 일으킨 걸까?

“그런 거 아니야. 그래도 우유부터 마시고 얘기해도 되는 일이야.”

“으응.”

엄마가 웃으며 얘기하는 걸 보니 그렇게 심각한 이야기는 아닌 듯했다.

“우유를 내왔습니다.”

마침 하녀가 우유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내 앞에 우유와 쿠키를 준비해 준 하녀가 조용히 인사하고 나간 후, 나는 손을 뻗어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이제 말씀해 주세요. 무슨 일이에요?”

“실은 황성에서 미라벨 네 앞으로 편지가 왔단다.”

“편지가요?”

“그래.”

말을 마친 브라이언이 내게 편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나는 손을 뻗어 브라이언이 건네준 편지를 받아 들었다.

황성에서 보냈다는 말 그대로 편지는 황실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에이드리안이 내게 편지를 보낸 건가 싶어 살펴보자, 마침내 발신인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제임스 바젯 카스트로.’

편지의 발신인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거네요?”

황제가 내게 왜 편지를 보냈을까?

이전에 엄마와 함께 황성에 방문했을 때 뵈었던 것 외에는 황제를 따로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뜬금없이 나를 향해 편지를 보냈다.

무슨 이유로?

편지를 봉한 인장을 뜯어냈다. 그러고는 봉투 안에 들어 있는 편지를 꺼내었다.

‘미라벨 크라이튼에게. 내일 오후 2시에 황성으로 올 것.’

아주 짧은 두 문장만이 커다란 종이 안에 적혀 있을 뿐이었다.

혹여나 공백에 다른 걸 적었나 해서 살폈지만, 별다른 문장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내일 두 시에 찾아오라고 하시네요.”

“뭐? 황제 폐하께서?”

브라이언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네. 어떻게 할까요?”

“폐하께서 그렇게 보내셨다면 가기는 해야겠지.”

엄마가 내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을 주어 나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엄마의 품에 안긴 채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엄마가 같이 가 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엄마의 눈치를 살피는 걸 무서워서라고 생각한 건지, 엄마가 내게 말했다.

“그래, 나도 같이 가 주마.”

“브라이언, 너보다는 아무래도 내가 같이 가는 게 더 좋지 않겠느냐? 네 녀석은 황제 폐하의 페이스에 말려들기 십상이니.”

“아버지, 그게 무슨 섭섭한 말씀입니까? 저처럼 든든하게 지켜 줄 사람이 있어야 ‘우리 벨’이 안심을 하지 않겠습니까?”

크라이튼 대공과 브라이언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가서 폐하와 칼싸움이라도 할 거냐?”

“무슨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아버지. 그래도 제가 황태자 전하의 스승으로 어느 정도 입지가 있지 않습니까. 황제 폐하께서도 코넬리아가 오기 전에 저와는 친밀히 교류하였으니 제가 간다면 우리 벨에게도 부담이 적겠죠.”

아무래도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크라이튼 대공과 브라이언이 서로 대판 싸울 기세였다.

“저는 괜찮아요!”

크라이튼 대공과 브라이언의 기싸움에 끼어들었다.

두 분은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두 사람 중 어느 한 명이라도 먼저 말을 꺼내기 전에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도, 숙부님도, 엄마도 같이 가지 않아도 돼요.”

“그게 무슨 말이니? 혼자 가겠다는 말이니?”

엄마가 의아해하며 나를 향해 물었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 혼자 다녀올게요.”

“그건 안 된단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너 혼자 황성으로 보낼 수가 있겠느냐?”

“그건 아버지 말씀대로야. 벨, 황제 폐하께서 코넬리아와 화해했다고 해도 우리는 너 혼자 황제 폐하께 보낼 수 없단다. 하다못해 코넬리아와 함께 가는 게…….”

브라이언이 재차 우려를 표했다.

“그래, 벨, 혹시 모르니 엄마가 황성까지 따라가 줄게. 대신 그 앞까지만 가 줄 테니 황제 폐하는 직접 알현해 보는 거야.”

엄마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어때, 벨? 괜찮겠지?”

마침내 크라이튼 대공과 브라이언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엄마가 내게 물었다.

“응. 그렇게 할게.”

빠르게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