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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61)화 (61/174)
  • 61화

    비브르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생기가 넘쳤다. 나는 얼떨떨한 시선으로 나를 받쳐 준 비브르를 바라보다가 이내 주변을 둘러보았다.

    신력을 사용하면서 허공으로 떠오르는 기분이 들었는데, 그게 단순히 내 기분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실제로 지면보다 높은 곳에 떠올라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떨어지지 않은 것은 나를 감싼 환한 빛 덕분이었다. 아마도 이건 다른 사제들이 나에게 사용한 신력인 것 같았다.

    비브르는 뱀처럼 생긴 커다란 얼굴을 들이밀며 부드럽게 웃었다.

    루비를 연상시키는 선명한 눈동자가 나를 비추고 있었다.

    [이제 내려가는 게 좋겠구나.]

    비브르의 말이 끝나자 내 몸이 서서히 바닥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가 다칠세라 조심스러워하는 움직임이었다.

    마침내 바닥에 발이 닿았다.

    확인차 고개를 숙여 바닥에 닿은 내 다리를 확인했다. 신력으로 사람을 높이 띄울 수도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나도 신력을 더 수련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나중에 라이넬 사제에게 확인해 보기로 마음을 먹고 고개를 들어 다른 사제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경이로운 시선으로 비브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장 가운데에 있던 라이넬 사제만큼은 바닥에 내려선 나를 위아래로 살피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라이넬 사제가 느린 걸음으로 나를 향해 다가와 물었다.

    “죽을 뻔했어요.”

    조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솜털이 오소소 돋아나는 기분이었다.

    지금에서야 모든 것이 내 오해고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조금 전 신력이 모두 빠져나갔을 때는 듀아나 신전의 사제들을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죽을 뻔했다.

    만일 다음에도 비브르를 구체화하기 위해서 이런 식의 의식을 치러야 한다면 나는 절대로 동참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니, 애초에 신전의 수정방이 아니면 이런 방식으로 소환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이건 뭐, 다니엘 보고 여기 악룡의 부활을 막을 수호룡이 나타났으니 죽여 달라고 목을 내미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짓이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라이넬 사제는 미안해하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저도 감히 이런 규모의 신력이 소모될 것이라고는 전달받지 못한 터라…….”

    “라이넬 사제님이 죄송할 게 뭐가 있겠어요. 근데 플레온 사제님은 알고 계신 거 아니었어요? 플레온 사제님은 미래를 기억하시잖아요.”

    말을 마치며 플레온 사제를 바라보았다.

    플레온 사제는 슬픈 시선으로 비브르를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플레온 사제의 모습을 노려보다가 라이넬 사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보아하니 일부러 말씀해 주지 않은 것 같네요.”

    “아닐 겁니다. 플레온 사제님도 오늘 비브르 님을 뵙게 되는 게 기대가 되어서 말씀드리는 걸 깜빡하셨을 겁니다. 플레온 사제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라이넬 사제는 플레온 사제를 변호하며 나름대로 나를 위로했다.

    나는 입술을 비죽거리다가 이내 수긍했다.

    “알겠어요. 뭐, 어차피 한 번은 해야 할 일이었고, 이미 끝났으니까요.”

    내가 수긍하자 라이넬 사제가 감사의 의미로 내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나는 곧 라이넬 사제에게서 몸을 돌려 성스럽고 위대한 신위를 뿜어내고 있는 비브르를 올려다보았다.

    바깥에 그려진 것과 같이 그는 커다란 흰색의 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뱀과 다른 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의 등에 커다랗게 돋아난 하얀 피막 날개의 존재뿐이었다.

    “그래서 비브르, 이게 진짜 네 모습이야?”

    이미 한번 이것이 자신의 본모습이라고 소개하기는 했지만, 재차 그에게 질문했다.

    [그래. 믿지 못하겠느냐?]

    비브르가 눈을 부드럽게 휘어 웃었다.

    “아니, 믿어. 네 목소리가 그대로인걸.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라……. 설마 구체화하면 그때마다 전부 이런 모습으로 나오는 거야?”

    [싫으냐?]

    비브르는 한껏 풀이 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싫은 건 아닌데. 앞으로 구체화할 때마다 이런 모습이면 좀 곤란할 것 같아서.”

    나는 고개를 들어 비브르의 키를 확인했다.

    사실 뱀이 똬리 틀고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키를 잰다는 게 큰 의미는 없었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바는 명백했다.

    이 크고 넓은 수정방을 채울 정도로 커다란 비브르를 과연 어떻게 데리고 다닌다는 말인가.

    비브르는 앞으로도 자신을 구체화해 주길 바랐다. 나 역시도 펜던트 상태로 있는 것보다는 구체화하는 게 더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이가 더 들면 그런 펜던트는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으니까.

    하지만 정작 구체화한 비브르의 모습이 이렇다면 곤란했다.

    “이렇게 크면 널 어떻게 데리고 다니겠어? 다니엘에게 네 존재를 광고할 것도 아니고.”

    [그 문제구나.]

    비브르는 내 말을 모두 들은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별로 안도할 문제는 아닌 것 같았는데…….

    내가 걱정스럽게 바라보자 비브르가 얼굴을 내게 가까이 붙였다.

    [잠시만 기다려 보거라.]

    말을 마친 비브르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내 몸처럼 커다랗던 붉은색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하얀 눈꺼풀에 의해 가려졌다.

    그러더니 비브르에게서 옅은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에게서 나오는 것은 신력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사이에 비브르의 몸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수정방을 꽉 채울 정도로 커다랗던 비브르의 몸이 서서히 그 크기를 줄여 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와.”

    도저히 믿기지 않을 광경이었다.

    비브르는 작고 작아져 마침내 내 두 손에 올라올 정도의 크기로 작아졌다.

    마침내 비브르가 눈을 떴다. 이제는 정말 내가 아는 루비 정도의 작고 붉은 눈이 나를 향해 반짝이고 있었다.

    [어때? 이 정도면 되겠느냐?]

    육중하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비브르의 목소리가 작고 가늘어졌다.

    꼭 어린아이의 목소리 같았다.

    나는 비브르에게 다가가 두 손을 뻗었다. 위로 올라오라는 의미였다.

    비브르는 내가 손을 뻗은 이유를 알아차리고 금세 내 손 위로 올라왔다.

    비브르의 비늘은 신기할 정도로 따뜻했다.

    나는 비브르가 내 손 위에 안전하게 올라온 것을 확인하고 손을 들어 눈높이를 맞추었다.

    비브르가 혀를 날름거리며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귀여워.”

    커다란 비브르를 보았을 때와 현저히 다른 감상이었다.

    새끼 뱀과 같은 비브르가 정말로 귀여웠다.

    [이 모습이 마음에 든 모양이구나. 정말 다행이다. 혹시 이것도 싫으면 어쩌나 걱정했단다.]

    작은 비브르는 웃는 것조차도 귀여웠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걱정이 전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눈을 깜빡거리는 비브르를 확인하며 내가 걱정하는 바를 입에 올렸다.

    “확실히 이 정도 크기면 같이 다니는 데는 큰 문제가 없을 거 같아. 하지만 그거 말고도 다른 문제가 있잖아.”

    [어떤 문제를 말하느냐?]

    “다른 사람들이 널 보면 당연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어? 게다가 넌 신력으로 구체화된 거잖아. 그럼 당연히 다니엘이 너를 보며 신력을 느끼겠지. 그럼 들키는 건 순식간 아니야?”

    듀아나 여신을 믿는 신도들이라면 수호룡 비브르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뻔히 알 것이었다. 물론, 지금 내가 들고 있는 비브르처럼 작은 생물을 보고 수호룡을 떠올리기란 쉬운 것은 아닐 터였다.

    그러나 기묘한 생물체를 데리고 다니는 듀아나 여신님의 신력을 가지고 있는 나, 라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보일 터였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비브르에게 건넨 질문에 끼어들어 대답한 것은 플레온 사제였다.

    나는 소리가 들려온 왼쪽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플레온 사제는 그리운 눈으로 비브르를 바라보다가 이내 나를 마주 보았다.

    그리움으로 가득 찬 그의 눈가에 주름이 퍽 깊게 드리워지는 듯했다.

    “왜요?”

    “비브르 님은 신력이 없는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요. 성녀님께서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다른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요?”

    플레온 사제의 말을 믿지 못하고 헛숨을 들이쉬었다.

    “저를 못 믿으십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너무 신기해서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꺼내는 플레온 사제의 말에 나는 도리질을 치며 부정했다.

    그제야 플레온 사제가 작게 숨을 내쉬며 설명을 보충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이렇게 작아진 비브르 님은 모습을 숨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력으로 인해 모습을 감춘 것이기에 신력이 있는 자에게는 그 모습이 보이는 것이죠. 저희에게 지금의 비브르 님이 보이는 것처럼요.”

    나는 그제야 수긍하고 비브르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야?”

    [그렇단다. 원한다면 모습을 드러낼 수는 있지만, 숨기는 것도 가능하지.]

    “그럼 다니엘에게 안 들킬까? 어쨌든 신력을 사용하는 거라면 다니엘에게 들킬 가능성이 있는 거잖아.”

    [그렇지 않단다. 신력을 사용하여 존재를 숨긴다는 건 주변에 분포되어 있는 신력과 동화되는 것을 말한단다. 내가 숨고자 한다면, 악룡 크립소라고 해도 보지 못할 것이다.]

    확신을 담은 비브르의 말에 더 반발할 수는 없었다.

    “그럼 계속 이렇게 다니는 것도 괜찮겠다.”

    내가 수긍하자 비브르가 웃으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비브르가 기뻐하는 게 나에게도 여실히 전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

    [그럼 좋지, 안 좋을까? 저 좁고 작은 펜던트 안은 많이 답답하거든. 그래서 이렇게 밖에 나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단다. 마침내 이리 나왔으니 얼마나 기쁜지.]

    “그럼 다행이네.”

    나는 즐거워하는 비브르의 모습을 보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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