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비브르를요?”
나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플레온 사제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맞습니다.”
라이넬 사제가 웃으며 긍정했다.
[일전에 내가 방법이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예상대로 오늘 그 일을 하려나 보구나.]
비브르가 조금 신이 난 듯한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그 소리를 들으니 그제야 뒤늦게 비브르가 종종 얘기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내가 신력을 좀 더 갈고닦으면 펜던트 속에 봉인된 수호룡 비브르의 사념체를 구체화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비브르가 구체화되어 펜던트에서 나오는 일을 굉장히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오늘 할 일이 무엇인지알고 나니 왜 라이넬 사제가 이 안으로 칼리나와 아니타의 출입을 제한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직 칼리나와 아니타는 내가 성녀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단순히 신력이 있어서 교육을 위해 왕래한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신전의 대사제들을 제외하고는 내가 성녀라든가, 미래에서 회귀했다든가 하는 것은 비밀이었다.
혹시나 이 비밀이 새어 나갔다가 다니엘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으니까.
만일 그렇게 된다면 다니엘이 어떻게 해서든 나를 제거하려 하겠지.
“그럼 오늘 할 수 있는 거예요?”
안 그래도 언제까지 이 펜던트를 할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 되던 참이었다.
날개 달린 하트 모양의 펜던트 자체는 정말 귀엽고 예뻤지만, 솔직히 성인이 하기에는 지나치게 아기자기한 것도 사실이었다.
과거 성자였던 플레온이 이런 액세서리를 하고 다녔을 것을 생각하니 내가 다 민망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예. 대신 성녀님 혼자만의 힘으로 구체화하기에는 무리일 겁니다.”
“그럼요? 어떻게 해요?”
나 혼자만의 힘으로 구체화할 수 없다면 결국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내가 평소에 그를 구체화할 일이 없다는 말이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니 플레온 사제가 첨언했다.
“오늘은 저희가 도움을 드릴 겁니다. 한번 구체화하면 웬만해서는 다시 봉인 상태로 돌아가는 일이 없긴 합니다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구체화하는 방법을 또 다른 날에 알려 드릴 거고요.”
“그 말은…… 다른 사제님의 신력을 사용한다는 말인가요?”
“맞습니다.”
플레온 사제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른 사람의 신력까지 동원하여 구체화를 한다는 게 놀라워서 입술을 꾹 다물었다.
사실 아직 내가 어리니 이대로 펜던트를 하고 있어도 큰 문제는 없을 듯했다.
조금 더 신력을 키우고 제어,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갈고닦은 다음에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솔직히 우려가 되는 게 사실이었다.
일전에 비브르와 대화했던 것처럼, 우리가 갑자기 신력을 모아 비브르를 구체화하는 그 사이에 다니엘이 악룡 크립소의 힘을 사용하고 있다면 어떡하려고?
“너무 이른 거 아닐까요?”
내가 많은 염려를 담아 라이넬 사제와 플레온 사제에게 말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의아해하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르다고 생각하십니까?”
진심으로 이유를 궁금해하는 듯한 플레온 사제를 보며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일전에 저택에 있었을 때, 다니엘이 악룡 크립소의 힘을 사용했어요. 그때 비브르가 설명하길, 다니엘이 악룡의 힘을 빌리는 동안에는 신력을 감지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날 거라고 하더라고요.”
내 설명을 듣더니 플레온 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는 말입니다.”
“그래요. 그래서 저도 다니엘이 저택에 있는 동안에는 신력을 가급적이면 사용하지 않고 있어요. 그가 혹시라도 악룡의 힘을 빌렸을 때 걸리면 안 되니까요. 그런데 비브르를 구체화하는데 다른 사람들의 신력을 빌려야 할 정도의 힘이라면, 다니엘이 감지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위험할 것 같은데요.”
내가 우려하는 내용을 모두 설명했다.
라이넬 사제는 내 말이 일리 있다고 생각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런 나를 향해 반박한 것 역시 라이넬 사제였다.
“우려하시는 바는 모두 이해합니다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구체화시키는 곳은 여기가 아니니까요.”
“네?”
라이넬 사제의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라이넬 사제가 빙긋 웃었다.
“잊고 계십니까? 이 신전에는 신력을 봉인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아……!”
나는 뒤늦게 수정으로 이루어진 방을 떠올렸다. 그렇지만, 그 방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말 그대로 신력을 봉인한다는 것이었다.
“수정은 신력을 봉인하잖아요. 그럼 그 방에서는 신력을 사용할 수 없는 거 아닌가요?”
“맞는 말씀입니다. 그걸 위해서 저희가 함께하는 거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다면야 뭐. 네, 알겠어요.”
더 따져 확인할 것이 없었다.
나는 일단 직면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플레온 사제와 라이넬 사제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가시죠.”
라이넬 사제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수련 장소에서 수정이 있는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조금 걸어간 후에야 수정 방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수정 방의 문은 여전히 아름다운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재차 마주하는 듀아나 여신과 수호룡의 자태에 나지막이 감탄을 터트렸다.
[눈에 잘 새겨 두거라. 이 몸이 원래는 저렇게 아름다운 자태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자아도취에 빠진 비브르의 목소리에 설레던 가슴이 차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 네 모습이 저래?’
[그래. 아름답지 않느냐? 저것이 내 본래의 모습이지.]
아련한 듯한 목소리였다. 나는 다시금 이 목소리의 주인이 저 웅장하고 아름다운 용이라는 것을 상기했다.
‘진짜 맞아? 아닌 거 같은데?’
내게 비브르란 펜던트 속의 작은 뱀이었다. 모습이 무척이나 귀여웠기 때문에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용과는 차이가 있었다.
[어허!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비브르가 서운해하며 내게 물었다.
나는 미술품을 보듯 문에 새겨진 비브르의 모습을 감상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내려 펜던트에 새겨진 귀여운 뱀 모양을 확인했다.
비브르는 빨간 눈을 깜빡이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전혀 다른 거 같은데?’
[직접 보면 다를 것이다.]
내 말에 비브르가 단호하게 말했다.
뭐, 나도 직접 본 것은 아니었으니 일단 보고 나서 판단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비브르의 말에 수긍했다.
“자, 성녀님. 들어가시죠.”
마침내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전에 보았던 것처럼 수정으로 가득한 방이었다.
안에는 수정뿐만이 아니라 일전에 회의실에서 보았던 대사제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자 사제들이 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성녀님.”
“안녕하세요. 여신님의 은총이 깃들기를…….”
“여신님의 은총이 깃들기를.”
모두가 인사를 마치고 나는 나를 뒤따라 들어온 플레온 사제와 라이넬 사제를 돌아보았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 거예요?”
“펜던트를 풀고 손에 들고 계십시오.”
플레온 사제가 내게 지시했다.
나는 펜던트 목걸이를 푼 후 내 손에 올려놓았다.
플레온 사제는 펜던트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시선을 돌리며 연이어 내가 해야 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펜던트에 신력을 불어넣는 겁니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문 앞에서 보았던 수호룡 비브르 님의 모습을 떠올리십시오.”
“알겠어요.”
나는 펜던트를 소중히 받든 채 신력을 천천히 불어넣기 시작했다.
수정으로 막혀 있기 때문에 아무리 쥐어짜도 신력이 나오지 않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플레온 사제가 시킨 대로 계속 신력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몸이 허공에 떠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눈 뜨지 마십시오!”
갑작스러운 느낌에 나도 모르게 눈을 뜨려다가 뒤에서 들려오는 라이넬 사제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눈을 뜨려 한다는 것을 어찌 알았는지 타이밍을 정확히 맞춘 말이었다.
확실히 허공에 떠오르는 느낌이 들더니 막힌 것처럼 나오지 않던 신력은 강이 범람하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그 크기를 증폭시켜 갔다.
내가 평상시 품고 있는 신력보다도 더 많은 양의 신력이 뿜어져 나오는 기분이었다.
내 몸 안에 가득했던 신력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너무도 명확하게 느껴지는 신력의 고갈에 목이 바짝 타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간절하게 물을 마시고 싶었다. 깊고 깊은 갈증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게 비브르를 구체화하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신력이 많이 소모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라고?
나를 말려 죽일 만큼 신력이 소모될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한 일이었다.
혹시 사제들이 날 속인 게 아닐까?
실금처럼 의심이 피어났다.
내가 성녀로서의 가치가 없으니 차라리 다른 사람으로 바꾸고자 이런 행위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연신 머릿속을 울렸다.
충분히 신빙성이 있었다.
지금 내가 있는 이 수정 방은 성자를 봉인했던 방이다.
차기 성녀, 혹은 성자에게 수호룡 비브르가 봉인된 펜던트를 넘기기 위해서.
그러니 이곳에서 내 신력을 빼앗아 봉인하고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성자의 역할을 부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였다.
갈증이 짙어지는 만큼 의심도 천천히 나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마침내 내 몸에 있던 신력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고갈되었다고 느껴 내가 아예 소멸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싶은 그 찰나에, 나는 지금까지 느낄 수 없었던 아주 충만하고 황홀한 신력이 내 안에 가득 찬 느낌을 받았다.
갈증이 깊었던 만큼 황홀함은 아득했다.
마치 신력이 나에게 보답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쯤 되니 조금 전 신전을 의심했던 게 미안해졌다.
[고생했구나, 미라벨.]
비브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평상시와 달리 머릿속에 울리는 게 아니었다.
귓가에 또렷이 들리는 소리였다.
다만 일반 사람의 소리와는 조금 궤가 달랐다. 마치 사방에서 동시에 들려오는 듯한 소리였다.
[이제 눈을 떠도 된단다.]
나는 비브르의 허락에 조심스럽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마치 사흘 밤낮을 뜬눈으로 보낸 것처럼 눈꺼풀이 무거웠다.
완전히 눈을 떴을 때는 사방을 가득 채운 하얀 광채에 어리둥절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나를 감싼 하얀 광채를 발휘하는 존재를 확인했다.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에 보았던 피막 날개를 단 아름다운 용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아니, 문에 새겨져 있던 그 아름다운 문양도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이 경이로움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듯했다.
내 감상이 모두 들리는 듯 비브르는 낮은 소리로 웃었다. 그러더니 흡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때, 이제 믿겠느냐? 내가 바로 수호룡 비브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