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마치 하룻밤의 꿈처럼 제프리가 다녀간 이후로 또 며칠이 지났다.
제프리가 인사도 없이 갑작스럽게 떠나 버린 탓에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그가 잘 지내는 모습을 확인하니 앞으로 또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게다가 일전에 약속했던 것처럼 제프리가 나를 찾아왔다. 또 오겠다는 약속을 했으니 제프리는 꼭 다시 올 터였다.
잠시 휴식과도 같은 날이 지나고 나는 다시 검술 훈련과 신력을 다루는 법을 배우는 데에 매일매일을 집중했다. 물론, 메이너드 자작 부인에게 교양 수업을 받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끔씩은 에이드리안이 놀러 와 대련하느라 정신없이 보낼 때도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대련을 시작하면 지칠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해야 하는 성격인 탓에 그런 날은 나도 완전히 지쳐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오늘은 에이드리안의 방문도 예정에 없었고, 오전에 메이너드 자작 부인에게 받는 교양 수업을 미리 마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날이었다.
다만,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라이넬 사제께서 새로운 시도를 해 보는 게 좋을 거라는 말을 전해 들은 후였기에 조금 긴장된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동안 신력을 미세하게 조종하는 방법, 신력으로 병을 치료하는 방법, 검에 신력을 두르는 방법 등에 대해서 배우곤 했다. 그때엔 별다른 얘기가 없었던 것에 반해 오늘은 이전부터 새로운 시도를 할 것이라며 운을 떼었다.
마치 나를 기대하게 만드는 듯한 어조로.
그래서 오늘 신전으로 가는 길은 뭔가 가슴이 콩닥콩닥했다.
[미라벨, 최근 너무 나를 소홀히 하는 거 같지 않느냐?]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비브르가 잔뜩 삐친 목소리로 내게 툴툴거렸다.
나는 아무 일도 없는 척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대고 대화를 시도했다가는 미친 사람 취급당하기 딱이었으니까.
물론 마차 안에는 나와 칼리나, 아니타 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제법 태연해 보이는 얼굴을 한 채로 비브르의 말에 대꾸했다.
‘요즘 바빴잖아. 게다가 다니엘도 딱히 별일이 없었고. 소홀했던 건 정말 미안해.’
[흥.]
비브르가 콧소리를 내며 대화를 거부했다.
‘다음부터는 신경 쓸게. 그러고 보니 오늘 라이넬 사제님이 새로운 거 시도해 본다고 했잖아. 그게 뭔지 알아?’
[짐작은 하지만 가 보면 더 잘 알겠지.]
비브르는 툴툴거리면서도 내가 묻는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미안해, 정말로. 다음엔 안 그럴게.’
[이번만 특별히 용서해 주마.]
비브르가 선심 쓰듯이 말했다.
나는 비브르의 말에 그만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왜 그러세요, 작은 아가씨?”
내가 창밖을 보다가 난데없이 웃으니 아니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항상 그렇지만 왕방울처럼 큰 눈을 하고 있는 아니타가 놀랄 때마다 너무 귀여워서 자꾸만 웃음이 났다.
나는 아니타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냥. 아니타가 너무 귀여워서.”
“네? 제가요?!”
아니타는 당황스러워하며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감싸 쥐었다.
칼리나와 내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자 그제야 아니타가 도끼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작은 아가씨, 저 자꾸 놀리지 마세요.”
“알겠어. 미안해. 근데 귀엽다는 건 사실이야.”
오늘따라 사과할 일이 많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차는 너무 급하지 않은 속도로 듀아나 여신의 신전을 향하고 있었다.
* * *
얼마나 달렸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금세 듀아나 신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익숙한 신전의 모습을 확인하며 마차에서 내릴 준비를 했다.
“작은 아가씨, 듀아나 신전에 도착했습니다.”
마침 마차가 멈추어 서고, 마부가 마부석에 달린 창으로 내게 도착을 통보했다.
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으니 곧 마차 문이 열렸다. 바깥에는 몇 번 본 적이 있는 성기사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어 주고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아 안전하게 마차 밑으로 내려섰다.
항상 똑같은 시간에 도착하다 보니 우리가 도착하는 시간에는 늘 라이넬 사제가 마중 나와 있었다.
“여신님의 은총이 깃들기를.”
마차에서 내려서자 라이넬 사제가 다정한 목소리로 우리를 반겼다.
“여신님의 은총이 깃들기를.”
나도 두 손을 모아 라이넬 사제에게 듀아나 신전에서 사용하는 방식의 인사를 건넸다.
라이넬 사제는 빙긋 웃는 얼굴로 내 인사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오느라 힘드시지는 않았습니까?”
“아뇨, 전혀요. 아시잖아요. 매일 오는 길인걸요. 라이넬 사제님은 저희 많이 기다리셨어요?”
“아닙니다. 방금 나왔습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죠.”
라이넬 사제가 금방 우리를 안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익숙하게 듀아나 신전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라이넬 사제가 안내해 주지 않아도 이미 두 달 가까이 신전을 방문한 까닭에 신전 내부에서 길을 잃을 일은 없었다.
혹시라도 잃게 된다면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길 안내 정도는 해 줄 터였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내 라이넬 사제를 흘끔 바라보았다. 그는 좀처럼 표정 변화가 없는 사람이었는데, 오늘은 평소보다도 더 밝아 보였다. 혹시 오늘 할 일 때문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라이넬 사제님, 근데 어제 말씀해 주셨던 새로운 시도라는 건 뭐예요? 오늘 뭔가 다른 걸 하는 거예요?”
내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라이넬 사제에게 물었다.
라이넬 사제는 빙긋 웃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직까지는 비밀입니다. 안에 들어가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왜요? 혹시….”
악룡 크립소와 대적할 만한 무언가를 배우는 걸까? 그래서 칼리나와 아니타가 있는 앞에서는 비밀이라고 하는 거 아닐까?
[글쎄, 그런 방법이 있는지 내가 모르는 것을 보아하니 그건 아닌 듯하구나.]
비브르가 궁금해하는 나에게 말했다.
조금 실망이기는 했지만, 이토록 비밀을 유지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라이넬 사제를 따라갔다.
속에서 솟아오르는 궁금증으로 인해 입이 까끌거릴 지경이었다.
안 그래도 며칠 전부터 새로운 걸 해 봐야겠다고 하더니, 오늘에서야 드디어 내 힘으로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대답을 들은 참이었다.
수호룡 비브르에게 선택받은 성녀인 까닭에 내 신력은 신전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이건만, 대체 그런 신력으로도 뒤늦게 배울 수밖에 없는 게 무언지 궁금했다.
“가 보시면 알 겁니다. 무서운 건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시금 의미심장한 말투로 말하는 라이넬 사제 때문에 입술을 꾹 다물고 신전 내부로 향했다.
마침내 신력을 수련하는 장소에 이르렀다. 평소와 같이 안으로 들어가려나 싶었는데, 라이넬 사제가 뒤를 돌아보았다.
“오늘은 두 분은 입장하실 수 없습니다. 대신 편하게 쉬고 계시면 수련이 끝난 후 다시 나올 겁니다.”
“저희가 함께 들어가지 않아도 괜찮으시겠어요, 작은 아가씨?”
매번 함께 안에 들어갔던 터라 칼리나가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조금 전 내가 생각한 것처럼 악룡 크립소에 대적할 무언가를 가르쳐 주는구나 싶은 마음에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잖아. 여기가 어딘지. 괜찮으니까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예, 알겠습니다. 작은 아가씨.”
“저도 기다리고 있을게요, 작은 아가씨!”
칼리나와 아니타의 대답을 들은 후 라이넬 사제를 바라보았다.
“이제 가요.”
“네, 좋습니다.”
라이넬 사제와 함께 수련 장소로 들어섰다.
드디어 결정적인 무언가를 배우나 싶은 기대감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와중에 불청객이 눈에 보였다.
“오셨습니까?”
사제들 중에서도 나이가 제법 되는 사제였다. 나는 그의 얼굴을 익히 알고 있었다.
“플레온 사제님.”
[플레온이구나.]
나도 플레온 사제를 반겼지만, 비브르가 특히나 플레온 사제를 반겼다.
그럴 만도 했다. 비브르는 나와 함께하기 전에 플레온 사제와 함께 다녔으니까.
비록 그때의 플레온 성자라고 하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플레온이 반가울 것이었다.
“여신님의 은총이 깃들기를.”
“플레온 사제님께도 여신님의 은총이 깃들기를.”
플레온 사제가 하는 것처럼 나 역시 그에게 인사했다.
“비브르가 반갑다고 하네요.”
“비브르 님이요?”
플레온은 놀란 눈을 했다가 이내 인자하게 미소를 지었다.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플레온 사제는 나한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곧 라이넬 사제를 돌아보았다.
“우리가 할 준비는 모두 끝났네.”
“벌써 말입니까?”
플레온 사제의 말에 라이넬 사제가 놀라며 물었다. 플레온 사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성녀님, 이제 성녀님만 계시면 완성됩니다.”
“뭔데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어요? 저는 이곳으로 오는 내내 아무것도 설명받지 못했어요. 무슨 일인지 알려 주셔야 따라가죠.”
내가 눈을 깜빡이며 묻자 플레온 사제가 라이넬 사제를 바라보았다.
“설명하지 않았습니까, 라이넬 사제?”
들어오기 전에 설명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듯 책망하는 말투였지만, 라이넬 사제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밖에는 성녀님을 수행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어찌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라이넬 사제의 말을 들은 플레온 사제가 빠르게 수긍했다.
“아. 하긴. 그렇군요.”
그러더니 나를 돌아보며 무릎을 굽혀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는 차분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성녀님께 가르쳐 드릴 것은 수호룡 비브르 님을 구체화하는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