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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58)화 (58/174)

58화

“기다리고 있었어?”

식당으로 들어서며 제프리를 향해 물었다. 제프리는 엘리엇의 옷을 입었는지 평소의 허름한 차림과 다른 옷차림이었다. 이런 옷차림도 그와 제법 잘 어울렸다.

“어, 응.”

제프리가 낯설어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에이드리안과 있을 때는 자신감 넘치고 뻔뻔하더니 지금은 그런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영락없이 열한 살 남자아이 같은 수줍음을 갖고 있었다.

“벨 왔니?”

“응.”

나는 내 자리에 앉으며 배시시 웃었다. 제프리를 배려한 까닭인지 제프리는 내 옆자리였다.

나는 의자에 앉은 후 이쪽에 집중하는 가족들을 보며 제프리를 소개했다.

“제프리 콜먼이에요. 제 친구. 제프리, 이쪽은 우리 할아버지, 엄마.”

“아, 안녕하세요.”

제프리는 마치 고장이 난 인형처럼 어색하게 크라이튼 대공과 엄마를 향해 인사했다.

크라이튼 대공은 그런 제프리를 보며 허허 소리를 내어 웃었고, 엄마는 푸근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 본 아이로구나. 수배되었던.”

크라이튼 대공이 금세 제프리를 기억해냈다.

“맞아요. 그때 제가 부탁드렸던 그 친구예요. 그때 부탁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내가 크라이튼 대공의 기억이 맞는다는 것을 증명해 주자 크라이튼 대공이 제프리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용케 잘 살아 있구나. 그때 널 데려왔어야 했다고 후회했는데 이렇게 잘 지낸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는구나. 그래, 아직도 저택에서 지내겠다는 말은 유효한데 어떠냐?”

“싫어요.”

제프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유가 따로 있는 게냐?”

“네,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

제프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어머, 열한 살인데 벌써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혹시 그게 뭔지 들어 볼 수 있겠니?”

엄마가 제프리에게 흥미를 느끼는 듯 질문했다.

제프리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용병단을 만들고 싶어요.”

“용병단? 그 어린 나이에?”

제프리의 말에 크라이튼 대공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직 어린 나이지 않니? 용병은 조금 더 큰 후에나 가입할 수 있을 텐데.”

크라이튼 대공의 말이 맞았다. 용병패를 받으려면 적어도 열네 살 정도는 되어야 했다.

제프리의 나이로는 아직 하급 용병패도 주어지지 않을 거라는 말이었다. 3년 후라면 모를까.

그런데 그런 제프리가 스스로 용병대를 꾸리기 위해서 열한 살의 나이에 도움을 거절하고 있으니 크라이튼 대공이나 다른 어른들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미리 기반을 쌓아 두지 않으면 용병단 차려도 힘들……어요.”

당당하게 말하던 제프리는 이내 주변에서 몰려드는 시선에 말끝을 흐렸다. 뒤늦게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것 같았다.

“그래도 아직 열한 살인데 너무 힘들지 않니? 필요하다면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단다.”

크라이튼 대공이 걱정을 담아 물었다.

나는 크라이튼 대공의 친절이 감사해서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제프리가 내 친구이니 도움을 주겠다고 한 것일 수도 있었지만, 어쩌면 크라이튼 대공은 원래부터 남을 잘 돕는 성격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면 크라이튼 대공은 뜬금없이 실종된 딸의 이름을 부르며 도움을 요청하는 나를 차마 내치지 못하고 모든 일정까지 취소하며 도움을 주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엄마가 진짜로 코넬리아 크라이튼이 맞았지만, 그때 델피아 마을로 돌아가는 마차에서 했던 말처럼 크라이튼 대공은 우리 엄마가 코넬리아 크라이튼이 아니었어도 도와줄 것이라고 했었다.

아마 지금도 그때와 같은 맥락일 것이었다.

그나마 그때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불확실한 정보를 듣고도 나를 도왔다는 점이고, 지금은 그의 손녀인 나와 친구인 제프리를 도와준다는 점이었다.

“괜찮아요. 혼자의 힘으로 하는 게 목표니까요. 그러고 나면 해야 할 일도 있고.”

“고집이 세구나. 그래도 이런 정도의 고집이라면 뭐든 해낼 것이 틀림없지.”

크라이튼 대공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식당을 울렸다.

제프리는 크라이튼 대공의 칭찬에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래도 만약의 경우에 도움이 필요하거든 언제든 말하거라. 그리고 이걸 주마.”

웃음을 그친 크라이튼 대공이 주머니에서 작은 커프스단추 하나를 꺼내 들었다. 옆에서 살펴보니 커프스단추에는 크라이튼 대공가를 상징하는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게 뭐예요?”

커프스단추를 받아 든 제프리가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단추 외의 기능은 딱히 없는 듯이 보였다.

“도움이 급하게 필요하거든 그걸 경비대에 보이거라. 그럼 누구든,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너에게 도움을 줄 테니.”

제프리는 감사 인사도 잊고 멍한 얼굴로 크라이튼 대공을 바라보았다. 크라이튼 대공은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고마, 감사합니다.”

어색하게나마 인사를 한 제프리가 커프스단추를 잘 챙겨 넣었다. 그러는 사이, 제프리 쪽에서 꼬르륵, 하고 배를 곯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 그래도 칭찬으로 인해 붉어졌던 제프리의 얼굴이 당근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픽 웃음을 지었다.

“할아버지, 저희 빨리 식사해요. 저도 배고파요.”

“그래. 내가 너무 배려가 없었구나. 식사를 가져오게.”

크라이튼 대공이 지시하자 식사라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귀족의 예법을 모르는 제프리는 테이블에 놓인 많은 포크와 스푼, 나이프를 확인하고는 조금 당황한 듯이 주변을 살폈다.

“제프리. 바깥에서부터 사용하는 거야. 근데 굳이 안 지켜도 돼. 편하게 먹어.”

“으응.”

내가 먼저 솔선수범해서 아무 포크를 사용하여 식사하자 제프리도 조금 용기를 내서 식사하기 시작했다.

이번만큼은 아무도 우리를 지적하지 않았다.

“맛있다.”

제프리가 작은 목소리로 감탄했다.

다들 제프리가 불편할까 봐 걱정되어 그에게 말을 더 걸지 않았다.

하녀는 제프리가 특히 좋아하는 음식이 있는 것 같으면 바로바로 더 챙겨 주었다.

식사를 모두 마치자 우리 앞에 놓인 식기가 모두 치워지고, 디저트와 차가 나왔다.

나와 엘리엇, 제프리의 앞에는 에그타르트와 우유가 내어졌다.

“그런데 제프리,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오늘 출발하기는 힘들지 않겠니?”

엄마가 조심스럽게 제프리를 향해 물었다.

식당에 걸린 시계를 확인해 보니 벌써 8시가 넘은 후였다.

이미 바깥에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을 테고, 성벽도 닫힐 시간이니 외부로 나가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일 것이었다.

설령 나간다고 해도 숲에 있는 마물과 들짐승들이 호시탐탐 지나가는 사람들을 노리고 있었다.

“오늘은 방을 내줄 테니 자고 가렴.”

“아니에요!”

방을 내준다는 말에 제프리가 두 손으로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그러나 엄마는 의견을 꺾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녀에게 말해 손님방을 내어줄 테니 자고 가. 괜찮아. 그리고 오늘뿐만이 아니라 언제든 환영이니 편할 때 놀러 와도 돼.”

“진짜 괜찮은데요……. 감사합니다.”

제프리가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

디저트까지 마무리한 후 나는 제프리가 사용할 방을 구경하러 따라나섰다.

손님방은 내가 사용하는 방보다는 작았지만, 고급 호텔에 준할 정도로 좋은 방이었다.

“우와.”

제프리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감탄을 터트리며 방으로 들어섰다.

“이 방에서 지내시고 혹시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여기 있는 줄을 당겨 주세요. 그럼 제가 바로 와서 도와드릴 테니까요.”

자신을 케이트라고 밝힌 하녀가 제프리에게 설렁줄의 존재를 알려 주었다.

“……감사해요.”

식당에서와 마찬가지로 제프리가 어색하게 인사했다.

케이트는 그런 제프리가 귀엽다는 듯 미소를 짓고는 방을 나갔다.

“많이 피곤하지?”

“조금. 근데 괜찮아.”

침대에 앉아 보는 제프리를 보며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뭐, 뭐야?”

“오늘 대련하느라 힘들었잖아. 내가 그 정도는 풀어 줄게. 가만히 있어 봐.”

“알았어.”

제프리가 내 명령에 침대에 앉아 멀뚱히 나를 바라보았다.

다니엘도 없겠다, 수정도 마침 챙겨 왔으니 아주 소량의 신력이라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터였다.

나는 제프리를 향해 신력을 사용했다.

내 손에서 피어난 옅은 하얀색의 빛무리가 제프리를 감쌌다. 그러고는 흡수되듯이 사라져 버렸다.

제프리는 무도회 날에도 신력으로 치유하는 것을 겪었음에도 놀라운지 감탄을 터트리며 자신의 몸을 이곳저곳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때 그거구나?”

제프리가 무도회 때 내가 뺨을 치료해 준 것을 떠올리며 물었다.

“응. 어때? 괜찮지?”

내가 뿌듯하게 바라보며 말하자 제프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도 안 피곤해. 아프지도 않고.”

“당연하지. 내 능력인데.”

내가 자부심을 갖고 말하자 제프리가 픽 웃었다.

“고마워. 오늘 전부 다.”

쑥스러운 듯이 고개를 들지 못하는 제프리의 모습에 내가 다 어색할 지경이었다.

“이런 분위기가 너희 가족의 분위기구나.”

작은 목소리로 제프리가 중얼거렸다.

“응?”

“아니. 너무 좋아서. 따뜻하고, 편안하고, 행복해 보여서. 미라벨, 너는 이런 곳에서 사는구나.”

제프리는 내가 들리지 않도록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신력 덕분인지 그가 무엇이라 중얼거리는지는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가만히 제프리를 바라보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럼 오늘 편히 쉬어.”

“응. 너도 오늘 피곤했을 텐데 편히 쉬어.”

제프리가 손을 흔들어 주는 것을 확인하고 곧장 손님방에서 나왔다. 그러고는 내 방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 * *

“제프리? 자?”

다음 날 새벽이 되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제프리가 머무는 손님방으로 찾아갔다. 새벽에 찾아가는 게 예의는 아니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확인하기 힘들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방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기만 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제프리가 보이지 않았다.

잠깐 화장실을 간 거라고 생각하기에는 방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아마도 그사이에 저택을 나간 모양이었다.

나는 천천히 침대 앞으로 다가갔다. 침대 위에는 쪽지가 하나 놓여 있었다. 아무래도 제프리가 나가기 전에 남겨 둔 쪽지인 것 같았다.

쪽지를 집어 들었다. 쪽지에는 엉성한 글씨체로 글이 적혀 있었다. 맞춤법이 하나도 맞지 않는 쪽지였다.

[캄사함미다. 또 오겠슴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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