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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57)화 (57/174)
  • 57화

    “오오! 저 소년도 잘하는데?”

    “우리 도련님과 견주어도 질 것 같지 않아. 자세가 제대로야.”

    “그거 기대되는데? 한번 대련하시면 재밌을 것 같군.”

    “아까 메치는 거 봤어? 기가 막힐 정도로 완벽한 자세였어. 기사의 싹이 보인다. 싹이.”

    옆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소리를 확인해 보니 이전과 마찬가지로 기사들이 벽에 다닥다닥 붙은 채로 대련을 구경 중이었다.

    기사들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훈련하고 있던 엘리엇 역시 마찬가지였다.

    엘리엇은 뒤늦게 내가 바라보는 것을 확인하고 나를 향해 빠르게 달려왔다.

    반면 바깥 연무장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기사들은 브라이언의 한심하다는 듯한 눈초리를 받으며 서 있었다.

    “지금 거기 있는 녀석들 모두 농땡이를 부리고 있는 거지?”

    브라이언은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실제로는 이 상황이 우스운지 눈을 휘어 웃고 있었다.

    “내가 분명히 각자 훈련 횟수 채우라고 했을 텐데? 설마하니 너희들 모두 그걸 이 짧은 시간 안에 끝마쳤다고? 아무래도 훈련량이 좀 부족한 모양이지? 평소 우는소리 했던 건 다 엄살이었나 보군.”

    브라이언의 따가운 시선에 기사들이 쭈뼛거리며 벽에서 떨어졌다. 그러나 다시 훈련하러 돌아가는 이들은 몇 되지 않았다.

    “공작님, 저희도 이런 풋풋한 대련을 좀 봐야 초심으로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이런 여흥도 좀 있어야죠!”

    “항상 훈련만 해서 어떻게 삽니까?”

    기사들이 브라이언의 말에 반발하고 나섰다.

    나는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기사들과 브라이언의 모습에서 깊은 신뢰를 느꼈다.

    하긴, 브라이언이 내내 훈련시킨 기사들이었으니 그 유대가 깊겠지.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천천히 기사들을 훑어보았다.

    한참이나 그들을 살펴본 후에야 나는 여기 있는 기사들과 병사들의 얼굴 중에는 내가 죽을 때 맞섰던 기사와 병사들이 없는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럼 그때 저택을 급습한 그자들은 다니엘의 사병인 걸까?

    다니엘이 사병을 거느릴 수가 있나? 사병을 거느릴 수 있는 권한은 백작 이상의 작위를 받은 대귀족에게만 주어질 텐데…….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나중에는 그 부분도 살펴봐야 할 것 같았다.

    편지처럼 은밀하게 처리할 수 있는 일과 달리 사병은 숨긴다고 해서 숨길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애초에 다수의 사람과 훈련할 공간을 필요로 하고 있었으니 불온한 움직임이 있었다면 틀림없이 문제가 되겠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에 엘리엇이 달려왔다.

    “벨, 이쪽은 누구야?”

    엘리엇은 제프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이쪽은 제프리 콜먼이야. 내 친구.”

    먼저 엘리엇에게 제프리를 소개했다. 어째서인지 제프리는 경계 가득한 눈으로 엘리엇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쪽은 엘리엇 크라이튼. 내 사촌 오빠야.”

    “반가워. 제프리 콜먼이라고 했지? 잘 부탁해.”

    내 말이 끝나자 곧 엘리엇이 제프리를 향해 악수하자는 의미로 손을 내밀었다.

    제프리는 엘리엇의 손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그의 손을 맞잡고 악수했다.

    “몇 살이야?”

    “열한 살.”

    “그럼 내가 한 살 위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우리 벨한테는 좋은 친구로 있어 줬으면 좋겠어.”

    엘리엇은 악수한 손을 놓지 않으며 말했다. 뭔가 두 사람 사이에 기묘한 기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공작님~!”

    “시끄럽다! 당장 연무장 백 바퀴 뛰지 못해?”

    “너무하십니다, 정말.”

    “이렇게 야속할 데가 없다.”

    “그러다가 탈모 옵니다.”

    기사들은 브라이언의 명령에 연무장을 돌기 위해 몸을 돌리면서도 한마디씩 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기사들이 브라이언을 향해 퍼붓는 야유가 연무장을 가득 메웠다.

    “시끄럽다고 하지 않았나! 속도 유지해!”

    브라이언은 야유하는 기사들을 향해 다그쳤다. 하지만 그 역시도 기사들이 투정을 부리는 게 썩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 * *

    기사들이 열을 맞추어 연무장을 도는 사이에, 우리는 우리대로 각자 이 연무장에 온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해 목검을 들었다.

    대련이 끝나고 난 후에는 또다시 대련이 이어졌다. 에이드리안이 열 번의 대련을 원했기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나와 열 번, 제프리와 열 번의 대련을 벌였음에도 에이드리안은 단 한 번도 우리를 이길 수 없었다.

    나한테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에이드리안에게는 억울한 일이었나 보다.

    그는 스무 번의 대련을 지고, 브라이언에게 어떻게 하면 자신도 강해질 수 있냐고 귀찮게 따라다니는 중이었다.

    브라이언은 에이드리안에게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말해 주었지만, 딱히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에이드리안과의 대련은 둘째치고, 다음으로 이어진 대련에서 가장 볼만했던 건 엘리엇과 제프리의 대련이었다.

    그사이에 새벽마다 일찍 나와서 훈련한 보람이 있는지 엘리엇은 제프리를 상대로도 쉽게 당하지 않았다.

    마치 라이벌 상대이기라도 한 듯이 비등한 실력으로 검을 나누고 있었다.

    제프리는 에이드리안과 함께 대련할 때는 검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엘리엇과의 대련에서는 예외였던 것 같다.

    나는 모처럼 기사들이 아닌 사람들이 비슷한 실력으로 겨루는 것을 똑똑히 눈에 새겨 두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배울 것이 많았다.

    정석적인 검술을 펼치는 엘리엇과 본능적인 검술을 펼치는 제프리.

    내가 직접 검을 휘두를 때는 볼 수 없었던 묘수라든가 미처 몰랐던 공격 타이밍, 그리고 허점 등이 보였다.

    엘리엇은 규격에서 벗어난 검술 상대와 검을 나눔으로써 자신의 한계를 느낄 수 있었고, 제프리는 정식으로 검을 배운 엘리엇과 대적하며 정식으로 훈련받은 기사에 대비하는 방법을 익힐 수 있었다.

    브라이언은 제프리와 엘리엇의 대련을 지켜보며 연신 제프리를 자신의 밑으로 데려오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황태자 전하,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벌써?”

    노을이 서서히 지고 있는 것을 확인하며 에이드리안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는 저녁 식사 후에도 별도의 일정이 있었기 때문에 이 이상 늦으면 곤란했다.

    결국 목검을 원래 자리에 돌려놓은 에이드리안이 여전히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터벅터벅 시종을 향해 걸어갔다.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에 에이드리안은 몸을 돌려 우리를 바라보았다.

    “다음에도 다 같이 대련하면 좋겠다.”

    “그럴 기회가 있을 거예요.”

    아쉬워하는 에이드리안에게 희망적인 말을 남겨 주었다.

    “그치? 또 이렇게 할 수 있겠지? 그때는 나도 지지 않을 거야.”

    의지를 다진 에이드리안이 시종과 함께 연무장을 벗어났다.

    우리는 에이드리안이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몸을 돌려 이곳에 있는 또 다른 손님인 제프리를 바라보았다.

    “제프리, 넌 어떻게 할래?”

    내가 제프리를 향해 물었다. 제프리는 하늘을 보더니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나도 이만 가 봐야지.”

    제프리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제프리의 팔을 잡았다.

    제프리가 반사적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저녁이라도 먹고 가.”

    “그래, 제프리. 식사라도 하고 가렴.”

    내가 먼저 말을 꺼내자 브라이언이 재차 제프리를 향해 권했다.

    제프리는 난감한 얼굴로 우리를 확인했다.

    그가 음식을 빚지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보내는 건 영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았다.

    어차피 그가 저택 밖으로 나가면, 그곳에는 불친절함이 가득할 터였다.

    끼니 한 번 제대로 챙기는 것도 힘들 거고, 제대로 된 곳에서 잠을 이루는 것도 꿈 같은 일이 되어 버릴 것이었다.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혼자 돌아다니며 겪을 고통은.

    “그래, 제프리. 식사 정도는 해.”

    엘리엇마저 우리의 말을 거들었다.

    제프리는 망설이는 눈치였다.

    이대로는 그냥 돌아가겠다고 말할 것 같아서 나는 제프리의 손을 잡고 저택 안으로 이끌었다.

    “으앗! 이거 놔, 미라벨!”

    “가자. 저녁 맛있을 거야.”

    당황한 제프리를 대동한 채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일단 땀을 흘렸기 때문에 바로 식당으로 향할 수는 없었다.

    “일단 씻고 와. 나도 씻고 올 테니까.”

    하인들이 다가오는 것을 확인하며 제프리의 손을 놓았다. 제프리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따 봐.”

    “아, 응.”

    제프리에게 인사를 남기고 나는 나대로 씻기 위해 계단을 올랐다.

    내 욕조는 3층 내 침실 옆에 있었다.

    따뜻하게 데워진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온몸의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시원하다…….”

    “작은 아가씨는 왜 맨날 따뜻한 물에 들어가서 시원하다고 하세요?”

    내가 노곤한 느낌을 이기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아니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시원하니까?”

    “왜 시원해요? 따뜻한 물을 더 넣을까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아니타의 모습이 귀여워 칼리나와 나는 서로를 마주 보고 웃어 버렸다.

    “왜 그러세요? 제가 이상한 말 했나요?”

    “아냐. 나중에 크면 알게 될 거야.”

    “나중에 크면요? 그럼 작은 아가씨는 지금 어떻게 알고 계신 거예요?”

    “그러게요. 보통 작은 아가씨 나이 정도면 이런 느낌 알기 어려운데.”

    “난 검을 훈련하느라 몸을 쓰잖아. 그래서 피곤하니 알 수 있어.”

    내 말에 칼리나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타만 여전히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목욕을 마치고 난 후에는 옷을 갈아입고 곧바로 식당으로 향했다.

    이미 식당에는 제프리가 나와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늘 모임이 있어 온종일 자리를 비운 다니엘을 제외한 모든 가족들이 이미 식당에 나와 있었다.

    제프리는 뻘쭘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며 앉아 있다가 내가 식당으로 들어서는 것을 확인하고는 금세 얼굴을 활짝 폈다.

    “미라벨!”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환하게 웃는 제프리의 모습이 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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