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에이드리안은 재빠르게 몸을 굴리고는 다시 경계하는 듯이 자세를 취했다.
예전 같았으면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졌을 텐데, 이제는 낙법을 사용해 몸을 굴려 적은 대미지만 입고 다시 일어날 줄도 알았다.
내가 보기에도 확실히 에이드리안은 조금씩 발전해 나가고 있었다.
이러니 다른 사람들과 얼른 대련하고 싶어 못 견딜 정도겠지.
성장이 눈에 보이는 만큼 남들과의 실력을 비교해 보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수준이 어디까지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검사들 중에서도 종종 있는 유형이었다.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는 사람들.
에이드리안이 바로 그 유형인 듯했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이 현재 상황에서 가장 목표로 하는 사람이 바로 나인 것 같았다.
비슷한 나이의 또래면서 검을 제일 늦게 배우기 시작한 나.
내가 에이드리안이라고 해도 나를 라이벌로 생각했겠지.
제일 조건이 비슷한 사람이니까.
그러나 애석하게도 에이드리안이 나를 이기기엔 한참 일렀다.
성장은 에이드리안만 하는 게 아니었다.
나도 그동안 브라이언에게 검술 훈련을 받으며 조금 더 성장해 있었다.
내 스스로도 검술이 안정적으로 바뀌고 있는 게 느껴질 정도이니 나와 검을 나누고 있는 에이드리안은 더욱 선명하게 느끼겠지.
나는 나를 향해 찔러 들어오는 목검을 피하고 곧장 목검의 폼멜 부분으로 에이드리안의 손목을 쳐올렸다.
“악!”
에이드리안은 손목에서 느껴지는 통증으로 인해 그만 목검을 손에서 놓쳐 버렸다.
에이드리안의 손을 벗어난 목검이 허공을 날아 포물선을 그리더니 흙바닥으로 볼품없이 떨어졌다. 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바로 들고 있던 목검을 움직여 에이드리안의 목가에 가져다 대었다.
깔끔한 승리였다.
“제가 이겼죠?”
내가 우스갯소리로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입술을 비죽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라벨 승!”
브라이언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내 승리를 선언했다.
“손목은 좀 괜찮으세요?”
목검을 회수한 채 에이드리안의 손목을 확인했다.
“아얏! 아파!”
내가 잡는 것만으로도 아팠는지 에이드리안이 고통을 호소했다.
무심코 손을 놓았다가 다시 잡았다. 치료를 위해서는 확인이 필요했다.
소매를 걷자 에이드리안의 손목이 보였다. 그의 손목은 이미 발갛게 부어 있었다.
많이 아팠을 것 같았다.
“미라벨, 잠깐 기다려 주겠니?”
내가 걱정스럽게 살피고 있자, 브라이언이 에이드리언을 향해 다가왔다. 자리를 피해 주자 브라이언이 품에서 치료제를 꺼내 에이드리안의 손목에 몇 방울 떨어트렸다. 하얀빛이 그의 손에서 빛나더니 이내 사라졌다.
“괜찮아. 이젠 안 아파.”
고통으로 인해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에이드리안은 치료제 덕에 괜찮아졌는지 브라이언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행입니다. 훈련도 좋지만 몸도 좀 생각해 주십시오.”
브라이언이 말하자 에이드리안이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쓰게 웃었다.
“이렇게 다치는데도 계속 대련하고 싶으세요?”
내가 에이드리안에게 퉁명스럽게 물었다. 에이드리안은 미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미라벨이랑 대련하는 게 얼마나 좋은데. 미라벨 넌 나보다 강하잖아. 게다가 항상 내가 생각하지 못한 공격을 하는걸. 매번 너와 하는 대련은 모두 새롭고 재미있어.”
속없이 웃는 에이드리안의 모습에 나도 나직이 작은 소리로 웃었다.
치료를 마친 후 에이드리안은 곧장 바닥에 떨어진 목검을 쥐어 들었다. 그러고는 목검에 묻은 흙먼지를 가볍게 털어낸 뒤 고개를 들어 제프리를 찾았다.
“제프리! 미라벨이랑 내가 한 번 겨뤘으니까 이제 너랑 나랑 대련해.”
“알겠어요.”
에이드리안의 제안에 제프리가 순순히 에이드리안을 향해 다가갔다.
나는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그들에게서 몇 걸음 뒤로 물러나 브라이언의 옆에 섰다.
브라이언은 웃으며 내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었다.
“벨. 황태자 전하도 그렇지만, 너도 나날이 실력이 느는구나. 칭찬할 만한 일이야.”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숙부님.”
내가 화답하며 빙긋 웃자 브라이언 역시 소리 없이 웃었다.
그 뒤로는 에이드리안과 제프리의 대련이 있었기 때문에 고개를 들어 두 사람에게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정석적인 자세로 검을 들고 있는 에이드리안과는 달리 제프리는 마치 어떻게 검을 쥐어야 하는지 모르는 듯 가볍게 들고 있었다. 자세도 그다지 진지해 보이지 않았다.
마치 검을 별로 들고 싶어 하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 대체 왜 이러나 싶은 마음에 두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러나 제프리는 목검을 축 늘어트린 상태였다.
검을 배운 적이 없어도 검을 들게 되면 적어도 무기로써 상대를 경계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제프리는 그렇지 않았다. 검을 배운 적이 없다는 말로도 해석이 되지 않는 상황이라는 의미였다.
에이드리안은 그런 제프리를 상대로 하면서도 정신을 집중하고 제프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눈에 새기는 듯이 보였다.
제프리는 에이드리안을 한번 보더니 곧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목검을 한번 내려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도약했다. 거리는 단숨에 좁혀지고 에이드리안이 든 목검이 제프리의 목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브라이언마저 제프리가 너무 어처구니없이 졌다고 생각하여 부상을 막기 위해 움직이려던 순간이었다.
몸을 비트는 것으로 아슬아슬하게 에이드리안의 검을 피한 제프리가 검을 잡지 않은 손을 들어 에이드리안의 멱살을 잡아 그대로 바닥에 메쳤다.
“아악!”
한순간에 바닥에 처박힌 에이드리안이 비명을 내질렀다.
어찌나 세게 뒹굴었는지 에이드리안은 쉬이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제프리는 바닥에서 신음하는 에이드리안을 내려다보다가 난감해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뺨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미라벨, 어떡하지? 얘 많이 아픈 거 같은데.”
나는 그 말에 황급히 에이드리안을 향해 달려갔다. 브라이언도 함께였다.
“아으, 아파…….”
에이드리안은 낙법도 사용하지 못하고 넘어진 탓에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제가 할게요. 저도 치료제 갖고 있는 거 많아요.”
브라이언이 치료제를 쓰려는 것 같아 그를 저지했다.
신전을 다니고 있으니 신전에서 구할 수 있는 치료제를 갖고 있는 게 이상하지는 않을 터였다.
신력을 사용하면 더 편하게 치료할 수 있을 테지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그래도 조심을 기하는 게 좋았다.
나는 곧 치료제의 뚜껑을 열어 에이드리안에게 뿌렸다. 치료제는 금세 에이드리안의 몸에 흡수되었다.
“괜찮습니까?”
브라이언이 걱정을 담아 에이드리안을 향해 물었다.
에이드리안은 허리를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프지만 견딜 만해. 우와! 아까는 진짜 죽는 줄 알았어! 눈앞에 별이 반짝이지 뭐야.”
에이드리안이 씩씩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는 바닥을 뒹구는 탓에 몸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 내었다. 나도 그를 도와 그의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 주었다.
“괜찮아, 요?”
제프리가 뒤늦게 쭈뼛쭈뼛 다가와 에이드리안에게 물었다.
에이드리안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제프리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엄청나게 강하구나.”
“아니, 뭐……. 이번 건 미라벨을 좀 따라 해 봤는데요.
“날 따라 했다고?”
제프리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까 에이드리안과 대련하며 그를 패대기치던 것과 제프리가 에이드리안을 내동댕이치던 동작 자체는 큰 틀을 놓고 보자면 비슷한 동작이기는 했다.
하지만 내가 했던 것은 에이드리안과 거리를 벌리기 위함이었지, 제프리처럼 한 방에 에이드리안을 쓰러트리기 위해 했던 동작이 아니었다.
“그럼 그사이에 벨의 동작을 보고 익혔다는 소리냐?”
브라이언이 제프리를 향해 물었다. 제프리는 조금 미안해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대련하는 거 보니까 굳이 검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요. 게다가 검은 가급적이면 사용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목검이어도. 검은 사람을 죽이는 거잖아요?”
제프리는 브라이언에게 태연하게 대답했다. 브라이언은 눈을 크게 뜨며 제프리를 향해 질문을 퍼부었다.
“진짜 검을 다뤄 본 적이 있나 보구나. 수배가 되었다고 하더니 그 일 때문이냐?”
“네.”
“그럼 누군가에게 배운 적은?”
“없어요.”
브라이언은 이채 어린 눈으로 제프리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손을 내밀어 제프리의 어깨에 얹었다.
“너 혹시 여기서 검을 배워 볼 생각이 있느냐?”
브라이언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제프리가 당황해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브라이언은 제프리의 재능이 탐나는 모양이었다.
독학으로 검술을 익혀도 10년 후에는 용병왕의 자리에 오를 뛰어난 인재를 브라이언이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제프리 너 마음 편한 대로 해.”
나는 제프리가 혹시나 나 때문에 원하는 결정을 하지 못할까 염려되어 그를 안심시키듯 말했다.
제프리는 콧잔등을 긁더니 결심한 듯 다시 브라이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니요. 안 할래요.”
“뭐? 아니, 왜? 내가 누군지 몰라서 하는 소리냐?”
덤덤하게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제프리를 브라이언은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이 보였다.
“모르긴 하지만, 아마 아저씨는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강할 거예요. 아저씨한테 배우면 확실히 실력을 빠르게 키울 수 있겠죠. 저기 있는 기사들처럼. 근데 전 하고 싶은 게 따로 있어서요. 그래서 안 할 거예요.”
두서없는 제프리의 말에 브라이언은 조금 황당해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러더니 뒤늦게 피식 웃으며 제프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강요하지 않으마.”
그러더니 제프리를 향해 몇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검은 사람을 죽이기 위한 도구가 맞지만,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단다. 검을 너무 무섭게만 생각하지 말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