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빨리!”
에이드리안이 나를 재촉했다. 그는 엄격한 표정을 낸답시고 도끼눈을 떴지만 오히려 귀여워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아무리 황태자인 그가 내리는 명령이라고 해도 그에게 말을 놓는 것이 쉽지 않았다.
“죄송해요, 황태자 전하. 만일 제가 말을 놓았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이 오해한다면 저는 저희 가문에 고개를 들지 못할 거예요.”
내가 그에게 말을 놓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
나는 크라이튼 대공가에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가뜩이나 나는 여기서 나고 자란 게 아니라 외부에서 태어나고 자란 후에 대공가로 들어온 것이었다.
크라이튼 공작이나 브라이언, 엘리엇이 내게 해 준 것이 얼마나 많은데 내 언행으로 그들이 욕을 먹는 것은 싫었다.
내가 거절 의사를 비치자 에이드리안의 눈동자가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냥…… 친구처럼 지내고 싶은 건데 안 되는 거야?”
이제 일곱 살인 에이드리안이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마음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그를 울렸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보았다가는 오해를 하고 말 터였다.
“미라벨.”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으니 제프리가 나를 불렀다.
눈동자만 돌려 시선을 그에게 주자 제프리가 사과 주스를 단숨에 들이켜고는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뭐 어때. 우리끼리만 있을 때는 해도 되지 않아?”
제프리의 목소리는 태평했다.
나도 그처럼 태평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래. 우리끼리 있을 때만 말을 놔. 그러면 되잖아.”
해결책을 찾았다는 듯이 울먹거리던 것을 뚝 멈춘 에이드리안이 내게 제안했다.
내가 여기서 더 안 된다고 해 버리면 그는 또다시 울음을 터트릴 기세였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수긍했다.
“알겠……어.”
그동안 계속 에이드리안에게 존대만 사용하다가 말을 놓으려고 하니 높임말이 입에 붙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내 마음은 안중에도 없이 에이드리안은 내가 그에게 말을 편히 했다는 게 기분이 좋은지 싱글벙글거리며 웃었다.
“그렇게 좋아?”
포기하고 그에게 묻자 에이드리안이 고개를 크게 위아래로 끄덕였다.
“당연하지! 이제 진짜 친구가 되는 거 같아.”
“이전에는 아니었다는 뜻이야?”
제프리는 말을 놓기 어려워했던 나를 우습게 만들기라도 하는 듯이 에이드리안에게 자연스럽게 반말했다.
“조금?”
에이드리안은 제프리가 말을 편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건지 알고도 허용해 주는 건지 모를 정도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말이 뭐가 중요하다고. 그런 거 없이도 친구면 친구인 거지.”
“그렇지?”
“당연하지.”
제프리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하자 에이드리안이 뿌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제프리의 친화력에 놀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근데 미라벨, 아까 그 얘기는 뭐야?”
“무슨 얘기?”
갑작스러운 제프리의 질문에 눈을 깜빡였다.
“방금 대련 열 번 한다고 그랬잖아. 여기 있는 황태자 전하가.”
제프리가 에이드리안을 눈짓하며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곧장 고개를 돌려 제프리를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안이라고 불러. 그리고 너도 내 친구 하자.”
“그러지 뭐.”
“좋아!”
에이드리안과 제프리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친구를 맺었다. 너무 대수롭지 않은 대화를 나 혼자만 못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황태자…….”
무심코 에이드리안을 황태자 전하라고 지칭하려 했다. 아마도 에이드리안이 도끼눈을 하고 나를 쳐다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반사적으로 익숙한 호칭을 사용할 뻔했다.
“에이드리안이 나랑 대련하고 싶어 하거든. 그 횟수를 말한 거야. 이따 숨 좀 돌리면 대련하려고.”
궁금해하는 제프리를 향해 설명했다.
“그래? 황태자라는 꼬맹이랑 겨루는 거, 나도 해도 돼?”
제프리가 뺨을 긁적이며 물었다.
“제프리 너도?”
비록 그가 훗날에 용병왕이 될 사람이라고는 해도 그는 제대로 검을 배운 적이 없었다.
아무리 미래에 뛰어난 검사가 된다고는 해도 기초조차 없는 그와 대련하는 게 썩 달갑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좋아!”
그러나 나와 달리 에이드리안은 잔뜩 신이 난 얼굴로 찬성을 표했다.
“괜찮겠어? 에이드리안은 이래 봬도 제국의 제1기사인 우리 숙부님한테 배우고 있다고. 네가 덩치가 아무리 커도 좀 버거울걸?”
내가 우려를 담아 말하자, 제프리는 자존심이 상한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이 꼬맹이 하나 못 이길까 봐?”
“그런 말이 아니라……. 검은 다뤄 봤어?”
“다뤄 봤지. 너도 알잖아.”
제프리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제프리가 나와 만났을 때 왜 수배가 되었던 건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괜찮아. 나 원래 그런 거 잘해.”
나는 그를 어떻게 설득하는 게 좋을까 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어차피 직접 대련해 보면 누가 위인지 알게 될 터였다.
혹시 모르지. 에이드리안이 아무리 브라이언에게 배웠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용병왕의 자리에 오를 만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제프리를 이기지 못할지도.
게다가 제프리는 나보다 좀 더 체격이 컸다. 그보다 한 살 많은 엘리엇보다는 작았지만 나에 비하면 큰.
따지자면 에이드리안보다도 훨씬 큰 체격을 갖고 있었으니 어렵지 않게 에이드리안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제프리 너도 나랑 대련하는 거야?”
에이드리안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래. 해 보지 뭐.”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피어 있었다.
“그럼 지금 하자.”
에이드리안이 나와 제프리를 번갈아 바라보며 제안했다.
남아 있던 사과 주스를 방금 막 다 마신 터라 더 쉬자고 이야기하기도 애매한 타이밍이었다.
에이드리안도 적극적이고, 제프리 역시 긍정적이었으니 굳이 시간을 더 끌 필요는 없었다.
“좋아요, 그럼.”
나는 주스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후에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이드리안과 제프리 역시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를 따라 일어났다.
“이쪽으로 와.”
몇 번 방문해서 연무장의 방향을 아는 에이드리안과 달리 제프리는 대공가의 저택 내부가 처음이었다.
나는 차분한 걸음으로 두 사람을 이끌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참, 제프리, 아무리 황태자 전하께서 말 편히 하라고 하셨어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그러면 안 돼. 알았지?”
“알았어.”
제프리는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그래도 순순히 대답하는 걸 보면 잘 지켜 줄 것 같았다.
연무장에서는 브라이언이 기사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우리가 사용하는 내부 연무장과 기사와 병사들이 훈련하는 외부 연무장은 나뉘어 있었지만, 나무로 만들어진 가벽을 사이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모습이 똑바로 보였다.
엘리엇은 그곳에 있었다. 기사들과 동등한 수련을 받으면서.
기사들을 훈련시키던 브라이언은 이내 우리가 내부 연무장에 도착한 것을 확인하고는 느긋한 걸음으로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황태자 전하, 또 오셨군요.”
“점심 때 보고 또 보는군, 크라이튼 공작.”
자기 덩치보다 훨씬 큰 브라이언을 보고도 에이드리안은 편안하게 인사했다.
“그런데 못 보던 사람이 있는데……?”
브라이언은 내게 설명을 요구하듯이 한쪽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제 친구예요. 일전에 식사 시간에 한 번 언급한 적이 있는데.”
“아, 그 수배 걸려 있었다는?”
“네.”
브라이언은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금세 제프리의 존재를 떠올렸다. 그러고는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제프리를 훑어보았다.
그 시선이 꼭 먹잇감을 노린 포식자의 것과 같았다. 아마 브라이언은 제프리에게 재능이 있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제프리에게 재능이야 차고 넘치지.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았다.
“대련 좀 해도 될까요?”
“그래. 내가 심판을 봐 주마.”
“감사합니다, 숙부님.”
안 그래도 부탁을 드릴까 생각했는데, 브라이언이 자발적으로 심판을 봐 주기로 했다.
아무래도 브라이언처럼 숙련된 검사가 있어야 위험한 일이 발생하더라도 바로 대처가 가능할 테니 다행이었다.
“여기서 목검을 고르면 돼.”
에이드리안은 선배라도 되는 양 제프리를 끌고 가더니 목검이 놓인 곳을 소개했다.
제프리는 안에서 목검 하나를 꺼내어 휘두르고는 이내 마음에 드는지 목검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에이드리안도 자신의 손에 맞는 목검을 선택했다.
나도 뒤늦게 그들에게 다가가 목검을 하나 골라잡았다.
익숙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게 마음이 편안했다.
“우선 나랑…… 황태자 전하가 겨뤄 볼 테니까 제프리 넌 지켜보고 있어.”
여기서도 에이드리안이라고 칭할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내고 이름 대신 황태자 전하로 칭했다.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서까지 반말을 하는 건 영 찜찜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우리끼리 있을 때만 말을 놓기로 한 거니 에이드리안도 괜찮겠지.
“알았어, 미라벨. 조심해야 해.”
제프리가 나를 독려하기 위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는 그런 제프리를 향해 미소로 화답한 후에 연무장 중앙으로 향했다.
목검을 똑바로 쥔 채 자리를 잡고 에이드리안을 주시했다.
확실히 에이드리안은 브라이언에게 훈련받는 의미가 있었다.
처음에는 일 합도 견디지 못하던 에이드리안이 어느새 다섯 합까지는 막아 낼 정도가 되었다.
그래 봤자 그가 공격할 수 있는 틈은 거의 나지 않았지만.
나는 경계하며 에이드리안의 자세에서 생겨나는 빈틈을 확인했다.
천천히 뒤로 물러나며 내게서 간격을 벌리는 에이드리안의 오른쪽 허리 아래 균형이 무너졌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단번에 앞으로 나아가며 검을 휘둘렀다.
에이드리안은 한 박자 늦게 내가 휘두른 검을 막아내고는 크게 흔들렸다.
검을 재차 횡으로 휘두르자 에이드리안이 그때를 놓치지 않고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내가 곧장 한 손으로 에이드리안의 옷을 잡아끌어 멀리 패대기치지 않았더라면, 그의 몸통 박치기에 넘어져 그만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여주고 말았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