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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54)화 (54/174)

54화

“어떻게 할까요? 쫓아낼까요? 아니면 안으로…….”

데이릭이 난감해하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그간 정신이 없어서 제프리가 방문하거든 안으로 정중히 데려오라고 하는 것을 깜빡했다. 나는 제프리를 잊어버린 스스로를 책하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내가 직접 갈게.”

에이드리안 역시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바라보았다.

“그게 누군데?”

“제 친구예요.”

에이드리안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그러다가 문득 드는 생각에 에이드리안을 똑바로 주시했다.

“친구가 저희 쉬는 자리에 껴도 상관없으시죠?”

“나? 응. 난 괜찮아. 대신 아까 말한 대련 열 번으로 늘려 줘.”

두 손을 활짝 편 채로 내미는 에이드리안을 보며 나는 끝끝내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요. 열 번.”

“좋아! 그럼 얼른 가자!”

에이드리안이 기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가시려고요? 저 혼자 다녀올게요. 금방 돌아올 거니까 앉아 계셔도 돼요.”

“그렇지만 나 혼자 여기 있는 건 싫은데…….”

금세 풀이 죽은 에이드리안을 보고 있으니 또 마음이 짠했다.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같이 가요.”

내 말에 에이드리안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나는 곧장 복도를 지나 현관을 나왔다. 정원을 또 한참 달리고 나니 대문이 보였다.

굳게 닫혀 있는 대문은 내가 다가오자 활짝 열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문이 열리자 대기하고 있던 남은 한 명의 경비병 앞으로 익숙한 은발이 보였다.

“미라벨!”

제프리는 나를 확인하고 환한 웃음을 지었다.

“제프리!”

나 역시 제프리를 웃음으로 반겼다.

“안으로 들여보내 줘. 내 손님이야.”

“예, 알겠습니다.”

내 지시에 경비병이 제프리를 막던 몸을 옆으로 돌리며 대답했다. 나는 잊을세라 문을 지킨 경비병과 나를 찾아왔던 데이릭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제프리가 찾아오면 제지하지 말고 바로 안으로 들여보내 줘. 다른 경비를 서는 사람들한테도 전해 주고. 알겠지?”

“예, 작은 아가씨.”

“고마워.”

정중히 고개를 숙여 대답하는 것을 확인하고 곧장 그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미라벨! 너 진짜 달리기 빠르구나!”

한참 늦게 나를 따라온 에이드리안이 내 옆에 서서 거칠어진 호흡을 골랐다.

“괜찮으세요? 그러게 그냥 거기 계시지 그러셨어요. 어차피 다시 거기로 돌아갈 거였는데.”

“그래도 혼자 있는 건 싫단 말이야.”

뒤늦게 호흡을 가다듬은 에이드리안이 툴툴거리듯이 말했다. 나는 황당함에 잠시 헛웃음을 터트리다 이내 제프리를 돌아보았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나야 뭐. 잘 지냈으니까 이렇게 멀쩡히 널 찾아왔지.”

제프리가 두 팔을 벌려 자신의 상태를 내게 확인시켜 주었다. 조금 긁히고 쓸린 흔적들이 여기저기 나 있었지만,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대신 한 달이 좀 넘었을 뿐인데 그동안 키가 좀 자란 듯했다. 머리카락도 이전보다는 더 길어졌다.

아이들은 성장이 빠르다더니 정말 금방금방 자라는 모양이었다.

“일단 들어가자.”

모처럼 온 손님인데 밖에서만 대화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제프리는 잠시 내가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피식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알겠어.”

웃으며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황태자 전하, 응접실로 돌아가요.”

“나도 손!”

에이드리안에게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하는데 그가 불쑥 내게 말했다.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자 에이드리안이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나도 손…… 잡아 주면 안 될까?”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였다. 손잡는 게 뭐 대수라고 그렇게 힘을 빼고 말하는 건지.

“그래요. 잡아요.”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에이드리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에이드리안은 시무룩했던 모습이라곤 온데간데없이 밝게 웃는 얼굴로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양쪽에 에이드리안과 제프리를 대동한 채 다시 저택 내부로 들어왔다.

복도를 지나 응접실까지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응접실에 도착해서 손을 놓는데 제프리와 에이드리안 모두 내 손을 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뭐해, 제프리? 황태자 전하는 또 뭐 하시고요?”

내가 손을 놓지 않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하자 이내 두 사람이 머뭇거리다 천천히 손을 놓았다.

나는 그제야 자유로워진 손을 확인하며 소파를 가리켰다.

“황태자 전하는 앉던 곳에 앉으세요. 제프리 너도 거기 편하게 앉아.”

에이드리안과 제프리는 서로를 바라보더니 내가 지정한 자리에 앉았다.

“제프리, 음료는 사과 주스 괜찮아? 싫으면 다른 것도 있는데.”

“난 다 괜찮아.”

“알았어. 잠깐 기다려.”

말을 마치고 곧장 설렁줄을 울렸다. 그러자 응접실 문이 열리고 칼리나가 들어왔다.

“부르셨어요, 작은 아가씨?”

“응. 사과 주스를 하나 더 내줄래?”

“네,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칼리나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한 후 조용한 제프리와 에이드리안을 바라보았다.

제프리는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에이드리안은 연신 제프리를 훔쳐보고 있었다.

참 아이러니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제국의 제일 높은 분인 에이드리안은 소심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평민인 제프리는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원래라면 서로 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게 당연했을 테지만, 나는 어쩐지 이 모습이 익숙하게만 느껴졌다.

“참, 소개 안 했죠? 황태자 전하, 이쪽은 제 친구 제프리 콜먼이에요. 그리고 제프리, 이쪽은 제국의 작은 태양인 황태자 전하셔.”

내가 뒤늦게 에이드리안에게 제프리를 소개했다. 제프리는 내 말에 구색만 맞추듯 에이드리안을 향해 고개만 까딱거렸다.

나는 조금 긴장한 얼굴로 에이드리안을 살폈다.

아무리 에이드리안이 어려서 뭘 모른다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대하게 되면 필시 일이 날 것이 분명했기에 그에게 눈빛으로 주의를 주었다.

제프리는 뭐가 잘못되었냐는 듯이 나를 향해 입을 몇 번 모아 물었다.

내가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젓자 제프리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에이드리안을 향해 정중히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황태자 전하?”

그래 봤자 귀족들이 그에게 건네는 인사와는 많이 다를 테지만 그래도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지시한 것이었다.

“아, 응.”

에이드리안은 어색한 얼굴로 제프리의 인사를 받았다.

“나는 에이드리안 카스트로야.”

“예, 전하.”

인사는 했으나 제프리는 영 심드렁한 태도였다.

그래도 다행히 에이드리안이 불쾌해하지 않는 듯해 보여 다행이었다.

사실, 제프리는 예전부터 그랬다.

아니, 미래에서도 그랬다고 해야 할까?

그는 용병왕으로 이름을 날리던 때에도 귀족들에게 굽히는 법이 없었다.

그때는 그가 용병왕이라 불릴 만큼의 명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 원래부터 이런 사람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똑똑. 오래 걸리지 않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들어온 칼리나가 제프리의 앞에 음료를 내어주었다.

“고마워, 칼리나.”

“아닙니다, 작은 아가씨.”

칼리나가 빙긋 웃는 얼굴로 다시 응접실에서 물러났다.

제프리는 제 앞에 놓인 주스 잔을 집어 들었다.

“마셔. 내가 말하긴 좀 그렇지만, 우리 저택의 주스는 제법 맛있어.”

“고마워, 잘 마실게.”

웃으며 대답한 제프리가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스를 바라보았다.

“맛있어.”

“그치?”

“응.”

제프리가 다시금 주스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그냥 이곳저곳 떠돌아다녔지. 짐마차 타고 돌아다니기도 하고, 항구 도시에도 갔었어. 거기서는 일손이 필요하다고 하길래 한동안 생선 나르는 일도 했었고.”

“힘들었겠다. 먹는 건 좀 괜찮았고?”

“너도 알잖아. 굶기도 하고, 훔쳐 먹기도 하고.”

어깨를 으쓱 추어올리며 대답하는 제프리가 조금 안쓰러워 보였다.

아직 먹고 싶은 게 많을 나이인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머리가 좀 길어졌네.”

“응……. 이상해?”

제프리가 조금 망설이며 내게 물었다. 묘하게 내 눈치를 보는 듯한 그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니, 잘 어울려. 이대로 길러도 예쁘겠다.”

“……그래? 그럼 기를까?”

“응. 네가 싫지 않으면.”

제프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오늘 저택에서 하루 자고 가.”

“그래도 돼?”

“당연하지.”

허락의 의미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프리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어 내 제안을 거절했다.

“아니야. 자고 가는 건 아닌 거 같아. 게다가 난 가야 할 곳이 많아.”

“뭐가 그렇게 바빠?”

내가 투정을 부리듯 묻자 제프리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너한테 갚을 게 많잖아. 부지런히 움직여야지.”

아직 어려서 용병 일도 못하는 제프리가 밖에서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건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있잖아.”

한참 제프리와 대화하고 있는데 에이드리안이 끼어들었다.

나와 제프리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에이드리안을 향했다.

에이드리안은 토끼같이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나와 제프리를 살폈다.

“두 사람 무슨 사이야?”

“말씀드렸잖아요. 친구라고.”

나는 또 무슨 질문을 하나 싶어 진지하게 들었다가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럼에도 에이드리안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지만 미라벨 너는 나랑도 친구인데 얘한테 했던 것처럼 안 하잖아.”

투정을 부리듯 꺼낸 말에 나는 에이드리안과 제프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야 황태자 전하는 저보다 높은 분이시잖아요. 제가 어떻게 제프리한테 하는 것처럼 전하를 대할 수가 있겠어요? 아무래도 편하게 대하긴 힘들죠.”

아무리 그래도 에이드리안은 황태자였다. 제국에서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다음으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친구가 되기는 했지만, 친구라기보다는 어쩌다 알게 된 높은 사람을 대하는 기분이었다.

똑같은 평민으로 인식했던 제프리와는 내 마음의 거리가 다르다는 의미였다.

그러자 에이드리안이 억울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나도 똑같이 대해 줘. 나도 친구잖아. 나도 친구고 쟤도 친구면 다 똑같이 대해 줘야 맞는 거 아니야?”

“네? 그렇긴 하지만…….”

“나한테도 이 애한테 하는 것처럼 반말해. 명령이야.”

에이드리안이 떼를 쓰듯이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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