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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53)화 (53/174)

53화

엄마의 편지 사건은 편지를 관리하는 집사 윌터와 세드릭의 소행으로 일단락되었다.

집사 윌터에게는 아들이 두 명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엄마를 사랑하여 상사병을 앓다가 죽었다고 했다.

그 일에 대해 복수심을 품고 있었던 윌터가 엄마가 보낸 편지를 빼돌렸고, 세드릭이 이를 목격하여 그를 저지하였으나, 끝끝내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윌터를 막지 못했다는 내막이라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 모든 일의 배후는 다니엘이었다.

다니엘이 어떻게 윌터와 세드릭을 포섭했는지, 어쩌면 사연만 그럴듯하고 두 사람이 원래 다니엘의 사람인 것이었는지 내가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두 사람이 거짓말로 크라이튼 대공가를 속이고 있음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를 밝혀낼 방법이 없었다.

윌터와 세드릭에 대한 처분이 이미 결정되었고, 엄마 역시 처벌에 동의한 일이었기 때문에 내가 끼어들 수가 없었다.

게다가 다니엘이 배후라고 할 만한 어떤 증거도 없었다. 모든 것은 내 기억뿐이었다.

혹시 듀아나 신전에 말을 하면 도와주지 않을까 싶었지만, 예전에 회의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오히려 결과가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차라리 두 사람이 이 일에 대한 벌이라도 제대로 받았다면 또 모를 텐데, 하필이면 엄마와 크라이튼 대공이 두 사람을 용서하여 주었다.

나에게 집사 세드릭과 윌터는 초면이었지만, 두 분에게는 그렇지 않았고, 그간 쌓인 정이 있었기에 내린 처사였다.

어처구니가 없고 기가 막히는 결말이었지만, 이미 끝난 처분에 내가 왈가왈부할 수 있을 정도의 권한이 없었으므로 속으로 삭이는 수밖에 없었다.

나 같으면 그 두 사람을 통해서 어떻게든 배후를 캐냈을 텐데.

편지가 크라이튼 대공에게 전해지지 않음으로써 엄마가 죽었고, 나 또한 14년 동안 크라이튼 대공을 저주하고 증오하며 살아왔다.

비록 죽기 전에 다니엘과의 대화를 통해 모든 의혹을 해소할 수 있었지만, 그동안에 겪은 일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비브르가 시간을 돌려 많은 것을 바로 잡을 수 있었지만, 그런데도 내 안에 남은 감정과 기억은 또렷했다.

아마도 평생 지울 수 없겠지.

그렇다고 두 사람을 해고하는 것으로 일을 종결시킨 크라이튼 대공과 엄마를 향해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내게 남은 원망은 다시 다니엘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게 다니엘이 의도한 대로 된 거겠지…….

지금 시점에서 가장 큰 의혹을 이렇게 어물쩍 넘어갔으니 얼마나 기쁠까?

그 생각 하나만으로도 속에서 뜨거운 감정들이 솟구쳤다.

지금 내 상황에서 다니엘을 물 먹이는 건 역시 무리인 걸까?

[미라벨, 그런 생각에 너무 매몰되지 말거라.]

비브르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알겠어.’

[앞으로 기회가 있을 테니 그때를 도모하자꾸나.]

다독이며 하는 말에 나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비브르가 내 미소를 알아차렸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미라벨, 우리 또 대련하자!”

이전의 일을 곱씹는데 불현듯 에이드리안이 나를 향해 외쳤다.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에이드리안을 확인했다.

그는 나와 친구가 된 이후, 굉장히 자주 크라이튼 대공가에 방문하고 있었다.

짧게는 하루 만에 다시 방문하기도 했고, 길게는 일주일에 한 번일까.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황태자의 자리에 있으면 나보다도, 그리고 엘리엇보다도 더 바빠야 맞을 텐데 아직 에이드리안이 어리기 때문인지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나는 듯했다.

게다가 시간만 났다 하면 바로 우리 저택을 찾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안 지겨운가?

혹시 친구가 나뿐인 건 아니겠지?

나는 마시고 있던 주스 잔을 컵 받침 위에 천천히 내려놓은 후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왜?”

내가 단호한 태도로 나오자 에이드리안이 두 눈을 번쩍 뜨며 바로 반문했다. 흡사 고백을 거절당하기라도 한 듯 절망한 표정이었다.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나오는 에이드리안의 태도가 황당해서 팔짱을 낀 채로 눈을 가늘게 좁혀 에이드리안을 노려보았다.

나도 가급적이면 많은 사람과 대련하는 것이 내게 아주 중요한 경험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에이드리안과 대련을 피하는 것은 이유가 있었다.

“정말 이유를 모르시는 건 아니죠?”

“모르니까 묻지. 알려 줘. 대체 왜 나랑 대련을 안 하려는 거야? 오늘뿐만이 아니야. 평소에도 내가 대련하자고 하면 자꾸 싫다고 하잖아.”

“황태자 전하께서는 이길 때까지 계속 대련하자고 하실 거잖아요. 게다가 저랑 대련해서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으니 결국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 겨뤄야 하고요.”

나는 그동안 겪었던 에이드리안과의 대련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당연히 실전 경험도 풍부하고, 체급도 높은 내가 유리한 대련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브라이언이 가르쳐 주는 정식 검술에 내가 그동안 바닥을 구르며 익힌 노하우들이 합쳐져 나의 실력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러니 내가 에이드리안을 이길 수밖에.

이런 상황이었으니 에이드리안과 대련하는 건 사실상 의미 없는 행위에 불과했다.

그런데 에이드리안은 고집이 세서 한번 대련을 시작하면 이길 때까지 다시 덤벼들었다.

체력도 끝이 없어서 반복되는 대련은 도저히 끝나지 않았다.

내가 질색하는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정작 내가 얻는 것은 없고 무의미한 대련만 반복하는 것.

차라리 내가 스승이면 모를까. 그 지루한 대련을 또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냐! 이번에는 내가 이길 수 있어! 나도 많이 연습했다고! 크라이튼 공작도 내가 많이 늘었다고 했는걸?”

내가 질색하는 것을 확인한 에이드리안이 발끈해서 외쳤다. 브라이언이 그의 검술 성과에 대해 제법 긍정적으로 표현한 듯했다. 하지만 그래 봤자였다. 나는 작게 콧방귀를 뀌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연습하시는 동안 저는 놀았을까 봐요? 저도 새벽부터 검술 수련해요. 그것도 황태자 전하의 스승님인 숙부님께요.”

“그건…… 그렇지만…….”

에이드리안이 내 말에 정곡을 찔렸는지 시무룩한 얼굴이 되어서는 말끝을 흐렸다.

“그래도…… 대련해 주면 안 될까……? 난 미라벨이랑 대련하는 게 정말 좋은데…….”

에이드리안이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이러고 떼를 쓰면 나로서도 거부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는 장차 이 제국의 주인이자 황실의 귀한 손인 황태자였다.

“그럼 대신 횟수를 정해요. 안 그럼 계속할 거잖아요.”

“좋아! 몇 번 대련할까? 열 번?”

“……다섯 번이요.”

“다섯 번은 너무 적은데.”

에이드리안이 불만이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싫으면 말고요. 그냥 오늘 하루 휴식이라고 생각하고 쉬죠, 뭐.”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회심의 말을 건넸다.

그러자 에이드리안이 망설이듯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알았어, 다섯 번. 그럼 지금 바로 하는 거야?”

“잠깐 쉬고요. 주스도 다 못 마셨잖아요. 그리고 모처럼 황태자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머랭 쿠키도 준비했는데 좀 드세요.”

“응! 그럼 이거 다 먹고 대련하는 거야!”

“네, 네.”

건성으로 대답하며 잔을 들었다. 안에 담긴 노란 빛의 음료가 내 손길에 따라 부드럽게 흔들거렸다.

하루하루를 정말 바쁘게 보내고 있었다.

새벽부터 기사들이 받는 검술 훈련을 받았고, 아침을 먹고 나면 이런저런 교양을 공부했으며, 저녁에는 신전에 방문해서 신력을 수련하는 일의 반복이었다.

신전에 방문하는 것도 원래는 주 3회였는데, 다행히 내가 신력을 다루는 방법을 점점 빠르게 익혀 나가자 라이넬 사제가 일부러 시간을 내어 맞춰 준 것이었다.

아무래도 머지않은 미래에 다가올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부지런히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다시는 내가 가진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조금 부정적으로 언급하긴 했지만, 그런 면에서 에이드리안이 방문하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실은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남들이 느낄 만한 그런 피로는 없었다.

신전에서 돌아오는 길에 신력을 사용하여 내 몸을 치료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른 의미의 피로가 나를 엄습했다.

미래에 대한 걱정과 현실의 불안함.

온갖 생각이 떠오르며 주는 피로감은 신력을 사용하더라도 좀처럼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다니엘을 처리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나를 괴롭힐 속셈인 듯했다.

똑똑.

뜬금없이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에이드리안과 내가 만나고 있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들 모두 우리를 방해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고 있을 터였다.

나는 에이드리안을 확인했다.

혹시나 그와 관련된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야?”

문 너머에 있을 사람을 향해 물었다.

“저, 작은 아가씨. 문 앞 경비를 맡은 데이릭 루펠입니다.”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문 너머의 사람이 자신을 소개했다.

“들어와.”

내가 허락을 내리자 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경비병이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다른 하녀나 하인이 아니라 경비병이 나를 찾아온 것이 의아해서 나는 바로 본론을 물었다.

자신을 데이릭 루펠이라 소개한 경비병은 망설이듯 혀로 입술을 축인 후에야 이곳에 온 이유를 꺼냈다.

“지금 밖에서 작은 아가씨를 만나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를?”

아무리 생각해도 나를 찾아올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눈을 크게 뜨고 데이릭을 바라보았다.

데이릭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었다.

“저도 처음에는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해서 내쫓으려고 했는데 그 아이가 작은 아가씨께 자신이 찾아왔다는 것을 알리면 환영해 줄 거라고 하기에……. 말도 안 된다는 것은 알지만 염치를 무릅쓰고 작은 아가씨를 찾았습니다.”

데이릭이 하는 말 속에서 힌트를 찾았다.

나를 찾아올 만한, 당돌한 성격의 아이.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그 아이 이름이 뭐지?”

“제프리 콜먼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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