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52)화 (52/174)
  • 52화

    “방금 그게 무슨 말인지 설명해 줘. 누가, 뭘 처분했다고?”

    내가 들은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내가 다그치자 두 집사가 내 앞에 황급히 무릎을 꿇어앉았다.

    “그, 그것이 말입니다……. 그, 그게. 저는…….”

    중년의 나이로 보이는 집사가 먼저 입을 열었으나 끝까지 말을 하지는 못했다. 그는 시선을 아래에 고정한 채로 계속 말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꼭 도둑질하다 걸린 듯한 모습이었다.

    아니, 틀릴 것도 없지. 그의 말대로라면 그는 편지를 도둑질한 게 되니까.

    반면, 나이 많은 집사는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벌벌 떠는 모습이 흡사 죽음을 목전에 두기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다.

    “엄마의 편지를 빼돌렸다는 말이 사실이야?”

    대답하지 못하는 그들을 대신해서 내가 물었다. 두 사람은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조아리기만 했다.

    그쯤 되니 급하게 달궈졌던 머리가 천천히 식기 시작했다.

    안에서 들려오는 대화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이것저것 잴 거 없이 안으로 들이닥치기는 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뭔가 찜찜했다.

    이렇게 쉽게 범인을 잡는다고?

    그것도 마치 들킬 상황을 미리 짜 놓은 것처럼?

    이렇게 허술하게 들킬 일이었다면 애초에 10년 가까이 편지를 숨길 재주가 있었을까?

    나처럼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허술한 자들이 편지를 빼돌렸는데 몰랐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

    머릿속으로 의문이 계속 떠올랐다.

    나로 인해 소란이 일자 곧 몇몇 하인과 하녀들, 그리고 집사들이 이곳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두 사람을 확인하고 서로 작은 목소리로 쑥덕거렸다.

    대부분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쉰 채로 고개를 돌려 칼리나를 바라보았다.

    “칼리나, 할아버지를 모셔와 줄래? 아니면 숙부님이라도.”

    “예, 작은 아가씨.”

    칼리나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금세 자리를 비웠다. 나는 팔짱을 낀 채로 아직까지 대답이 없는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허술하게 행동하다 나에게 들킨 건지, 아니면 또 다른 속셈이 있는 건지 확인해 보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다니엘이라는 이름이 나오기는 할까?

    내가 우려하는 건 그들의 입에서 다니엘이 언급되지 않는 일이었다.

    엄마나 크라이튼 대공의 말처럼 편지가 그간 누락 되었던 것 자체를 문제 삼고 싶은 건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문제 삼을 만한 일이기는 했지만, 정확히는 다니엘이 뒤에서 꿍꿍이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크라이튼 대공에게 알리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다니엘만 아니라면 이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 이렇게 허무하게 결과가 나오는 건 이상했다.

    차라리 이 안에 바든이 있었더라면 바든과 다니엘의 관계를 들먹일 수 있었을 테지만, 아무리 안을 살펴보아도 바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복잡한 마음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으니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들어오는 사람을 확인해보니 크라이튼 대공이었다.

    크라이튼 대공은 이곳의 상황을 확인하고 잠시 멈칫거렸다. 그러더니 안으로 천천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크라이튼 대공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한동안 상황을 둘러보며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에 입을 열었다.

    “엄마의 편지를 빼돌렸다고 하는 두 사람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됐어요. 그래서 자세히 얘기해 달라고 했더니 두 사람 모두 말을 꺼내지 않아서 할아버지를 부른 거예요.”

    “……편지를?”

    크라이튼 대공은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듯이 탄식을 터트렸다.

    “미라벨의 말이 사실이냐, 세드릭? 윌터?”

    크라이튼 대공은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두 집사를 향해 물었다.

    두 집사는 서로 불안한 듯 눈빛을 교환했다.

    “고개를 들고 얘기해 보거라. 나도 자세한 경위를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차분한 목소리로 재촉하는 말에 세드릭이 고개를 들었다.

    “죄송합니다.”

    세드릭이 기어가듯 작은 목소리로 크라이튼 대공을 향해 사과했다. 크라이튼 대공은 오히려 변명도 없이 사과하는 세드릭의 모습에 더욱 복잡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과를 받는 것은 경위를 안 다음에 할 일이야. 그대도 잘 알지 않은가?”

    “……그것이.”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세드릭이 말을 꺼내기를 주저하는 사이에 윌터라고 불렸던 집사가 크게 외쳤다.

    “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제가 큰아가씨의 편지를 받고…… 전부 처분해 버렸습니다.”

    윌터는 고백하며 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덜덜 떨었다.

    크라이튼 대공은 윌터의 고백을 들은 후 나직이 탄식하더니 큰 손으로 내 어깨를 감싸 주었다.

    “미라벨, 아무래도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으니 나가 있는 게 좋지 않겠니?”

    크라이튼 대공이 나를 염려하며 제안했다. 나는 내 어깨에 얹어진 크라이튼 대공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도 듣고 싶어요. 편지 때문에 제가 혼자 여기까지 왔던 거 아시잖아요.”

    이대로 자리를 떠나면 상황 파악을 전혀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크라이튼 대공을 향해 부탁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크라이튼 대공은 고개를 저으며 내 부탁을 거절했다.

    “그래도 나가 있으렴. 어린 네가 듣기에는 그리 좋지 않은 얘기가 될 것 같구나. 나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크라이튼 대공은 가볍게 내 어깨를 두드려 준 후 주변을 확인했다.

    “그래, 자네. 미라벨을 바깥으로 안내하게.”

    크라이튼 대공은 자신을 이곳으로 불러왔던 칼리나를 확인하고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이리로 오십시오. 작은 아가씨.”

    칼리나가 크라이튼 대공을 향해 머리를 조아린 후 나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살을 구긴 채 세드릭과 윌터를 노려보다가 팩 몸을 돌렸다.

    복도 바깥으로 나오고 보니 브라이언과 엘리엇도 앞에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이냐, 벨?”

    “숙부님께서는 안으로 들어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안에 할아버지도 계세요.”

    “그래. 알았다.”

    브라이언은 금세 수긍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엇은 브라이언이 들어가는 모습을 쭉 바라보다가 브라이언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나를 확인했다.

    “어떻게 된 일이야? 대공 각하에 이어 아버지까지 들어가서 확인해야 할 일인 거야?”

    “일단 자리를 옮기자.”

    의아해하는 엘리엇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엘리엇은 순순히 내가 이끄는 방향대로 따라와 주었다.

    지나가는 길에 복도 끝에서 바든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혹시 내가 의심한다는 걸 알고 바든이 이번 일을 계획한 걸까?

    괜히 소란을 일으켜서 일을 이렇게 일단락시켜 버리려고?

    눈을 가늘게 좁히며 그를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바든이 다니엘의 사람인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그에게 따지는 것은 무의미했기에 일단 엘리엇을 대동한 채 후원으로 나왔다.

    “우리 둘이 얘기할 테니까 좀 멀리 떨어져 있을래?”

    우리를 따라온 칼리나와 아니타, 그리고 엘리엇의 수행원들에게 지시했다. 그들은 순순히 우리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나는 그들이 멈추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엘리엇을 돌아보았다.

    “대체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엘리엇이 저택을 한번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우편 부서가 있을 방향이었다.

    “편지 때문이야?”

    “응.”

    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엘리엇이 되레 깜짝 놀라더니 입을 열었다.

    “고모님의 편지? 어떻게 됐어? 내가 보내 준 자료는 도움이 됐어? 아니, 작은할아버님께서 하셨다는 증거는 찾았어?”

    엘리엇이 궁금해하며 내게 물었지만, 그에게 긍정적인 대답을 줄 수는 없었다.

    “아니…….”

    “그럼 어떻게 된 건데?”

    “아무래도 다니엘이 수를 쓴 거 같아. 그리고 나는 보기 좋게 넘어가 버렸고. 아직 할아버지가 얘기 중이긴 하지만, 아마도 다니엘이 뒤에서 지시했다는 말은 듣기 어려울 거 같아. 아마 뚜렷한 결과가 나오진 않을 거야. 편지를 윌터라는 집사가 빼돌렸던 걸로 상황이 돌아가는 거 같거든.”

    목소리에 절로 힘이 빠졌다. 엘리엇은 나를 위로하듯 내 등을 가볍게 두들겨 주었다.

    그러다가 엘리엇이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근데 작은할아버님께서 그랬다는 증거도 없고, 지금 범인이 나온 상황이라면, 미라벨 네가 잘못 알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엘리엇은 최대한 내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목소리 톤에 신경 쓰며 물었다.

    나는 한번 엘리엇을 힐끔 바라보았다가 이내 시선을 회수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엘리엇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의 상황을 도무지 신뢰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나는 14년 후의 다니엘에게 직접 들었다. 그동안 엄마의 편지를 빼돌리고 처분한 것이 다니엘의 짓이라는 것을.

    심지어 미래의 다니엘은 나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엄마의 딸이며, 크라이튼 대공의 손녀라는 사실까지도.

    그걸 생각해 본다면, 그는 편지의 내용을 모두 숙지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아냐. 분명히 다니엘의 짓이야. 근데 내가 너무 허술했나 봐.”

    “……그래. 일단 대공 각하께서 조사하고 결과를 말씀해 주시겠지.”

    나를 위로한답시고 꺼낸 말에 나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결과적으로 엘리엇은 편지를 몰래 빼돌려 처분한 것이 다니엘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듯했다.

    처음에는 내가 워낙 강력하게 주장하여 믿는 듯했지만, 그 결과가 이런 식으로 나 버렸으니 내가 엘리엇이었어도 헛다리를 짚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조금 숨죽이고 살면서 증거들을 수집하든가, 아니면 다니엘이 나를 보며 의심하지 않을 정도의 관계를 맺는 편이 더욱 이로울 것 같았다.

    “그래도 범인을 찾았잖아. 너무 상심하지 마.”

    애써 나를 달래 주는 엘리엇을 향해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