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아무래도 저택에서는 신력 사용을 자제하는 게 좋겠다.]
목욕을 마치고 저녁 식사까지 마치고 돌아온 후, 다시 혼자가 된 침실에서 비브르가 내게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왜? 아까처럼 다니엘이 악룡의 힘을 사용하지 않으면 괜찮은 거 아니야?”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비브르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어서 물었다.
[아까 악룡 크립소의 기운을 느꼈지?]
비브르가 다정한 목소리로 내게 물어왔다. 나는 다니엘의 방에서 느껴지던 그 불쾌하고 답답하던 기운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지. 오늘 일인데 벌써 잊어버렸을까 봐?”
내가 태연한 목소리로 말하자 비브르가 작게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우리가 악룡 크립소의 기운을 느낀 것처럼, 악룡 크립소도 우리의 기운을 느낄 수 있을 거란다.]
“정말? 그럼 위험한 거 아니야?”
다니엘이 이미 내가 비브르와 함께한다는 것을 알면, 나를 가만둘 리가 없었다.
어쩌면 미래를 도모하기도 전에 살해당할 수도 있겠지. 괜히 목이 서늘해지는 기분이라 나는 손을 들어 목을 매만졌다.
게다가 나는 신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듀아나 신전을 방문하여 신력을 활용할 방법을 배우고 있었다.
[일단 지금 너에 대해 알려져 있는 정도는 괜찮을 듯하구나. 하지만 그 이상은 안 돼.]
비브르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보아하니 아직 다니엘 크라이튼, 그자가 악룡 크립소의 모든 힘을 깨우지는 못한 모양이더구나.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겠지.]
이어지는 비브르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하지 않아? 내가 알기로 다니엘이 악룡을 깨우는 건 십 년도 더 후의 일이잖아. 내가 크라이튼 대공의 의뢰를 받고 이곳에서 죽은 이후의 일이라며.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십사 년 전의 일인걸.”
[그렇긴 하지. 하지만 언제나 경우의 수를 따져보아야 한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한다.]
“……경우의 수.”
[그래. 가령 우리가 시간을 한 번 되돌렸던 것처럼, 그들도 무언가 수를 냈을 수도 있으니.]
비브르의 우려는 충분히 이해가 갔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는 건 언제나 옳은 일이었다.
나 역시도 그래서 검술을 배우고 신력을 갈고 닦으려는 거였으니까.
내가 비브르의 말에 수긍하여 고개를 끄덕이자 비브르가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
[지금까지는 그가 악룡의 기운을 깨우지 못해 미라벨 네가 신력을 사용해도 느끼지 못한 것 같지만, 만일 조금 전처럼 다니엘 크라이튼이 악룡의 힘을 사용할 때는 다르지. 그때는 감각이 예민하게 깨어나 있으니 분명 네가 신력을 사용하는 걸 느낄 수가 있을 게다.]
말을 마친 비브르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머릿속으로 말만 전달되는 게 아니라 한숨 쉬는 것까지도 전달이 되는 모양이었다.
[아까 그 수정을 잡고 있어서 천만다행이구나.]
나는 비브르의 말에 고개를 돌려 수정이 들어 있는 주머니를 확인했다.
신력을 붙잡는 수정의 능력 덕분에 신력을 많이 사용하지 않았고, 그 덕에 악룡 크립소의 기운을 잠시나마 개방했던 다니엘에게 들키지 않은 모양이었다.
“진짜 다행이네.”
나 역시도 비브르처럼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아무것도 해결이 되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든 신력을 사용하는 법을 빠르게 익히고 싶었다. 그래서 좀 더 자재로이 신력을 사용하는 게 목표였다.
그런데 정작 집에서 신력을 쓰면 안 된다니.
그럼 수련할 때마다 신전으로 향해야 할 텐데 매일 가기에는 내 일정이 그리 여유롭지 않아 문제였다.
“차라리 다니엘을 저택에서 쫓아 버리면 좋을 텐데.”
[그렇게 한다면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테지만, 보아하니 무리인 것 같구나.]
쯧쯧, 비브르가 짧게 혀를 찼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비브르.”
[왜 그러느냐?]
“자꾸 그렇게 혀 차면 펜던트 안 하는 수가 있어.”
가끔씩 중요한 말들을 해 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평상시에 썩 도움이 되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가끔가다 한 번씩만 해 줘도 딱히 문제는 없을 터였다.
그 의미로 말을 꺼내자 비브르가 당황한 듯 어버버거렸다.
“흥. 신력을 운용하는 건 아무래도 신전에 가서 해야겠네. 최대한 시간을 내서 일주일에 두 번 이상 갈 수 있도록 일정을 짜 봐야지, 뭐.”
[그, 그러려무나. 그리고 기왕이면 나를 계속 하고 있으렴. 오늘과 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 내가 아니면 알아채기 어렵지 않았겠니? 그럼 다니엘 크라이튼 그 악마 같은 자에게 들키고 말았을 거란다.]
“그건 알아. 그래도 말이지, 어느 정도 예의는 지켜 달라고.”
손가락으로 펜던트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그렇게 하마.]
비브르는 다행히도 내 말에 빠르게 수긍했다.
“근데 몸을 회복시키는 정도도 들킬까?”
신력을 더는 쓰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다가 문득 드는 아쉬움에 비브르에게 물었다.
검술 훈련이 끝나고 지금처럼 혼자 있을 때 신력으로 몸을 회복시키면 금세 말짱한 체력이 되었기 때문에 그 달콤한 회복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만일 그 정도로도 위험하다고 하면 포기하는 수밖에 없겠지.
[신력을 더 섬세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거든 그때는 적은 양으로도 빠르게 회복시키는 방법을 익힐 거란다. 그때까지는 참으렴.]
아쉬운 말에 입맛을 다신 나는 그대로 침대에 널브러졌다.
* * *
다음날이 되고, 언제나와 같이 새벽에 일어나 브라이언에게 새벽 훈련을 받았다.
처음에는 날 보조해 주던 엘리엇도 이제는 슬슬 자신의 훈련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브라이언에게 집중적인 훈련을 받았다.
일찍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 한 일은 칼리나에게 부탁해서 일정을 조율하는 일이었다.
비브르와 했던 대화처럼 더 이상 대공가에서 신력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내 일정만 조율하는 게 아니라 신전 측에도 내가 더 자주 방문하여 신력을 배우려 한다는 의사를 전달해야 했기 때문에, 칼리나는 오전부터 신전으로 향해야 했다.
결과는 아침 식사가 끝난 후에 받았다. 내 일정을 조율하는 것도, 그리고 신전에서 라이넬 사제의 일정도 조율이 완료되었다.
앞으로 주에 세 번은 신전을 방문해서 신력을 교육받을 수 있게 되었다.
크라이튼 대공가에는 내가 아주 미약하지만 신력이 있어 교육을 받아 보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났다.
일정을 조율하기 전, 참가했던 아침 식사 자리에서는 뜻밖에도 다니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오늘도 모임 때문에 온종일 자리를 비운다는 것이 크라이튼 대공의 설명이었다.
안 그래도 전날 저녁에 그에게서 악룡 크립소의 기운이 느껴졌었기에 나는 찜찜함을 느끼며 아침 식사를 마쳤다.
혹시 그 모임이라는 게 악룡 크립소를 숭배하는 단체의 모임인 게 아닐까?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다니엘은 악룡 크립소의 봉인을 깨고자 했다고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지금부터 준비해야 깨울 수 있겠지.
내 의심은 제법 합리적이었다.
‘차라리 모임이 있는 날, 다니엘을 미행하는 게 어떨까?’
[미라벨, 부디 네가 스스로 다니엘 크라이튼과 대적할 수 있을 때까지는 몸을 사려 주렴. 너는 우리에게 마지막 희망이란다.]
혹시나 싶어서 물었는데 비브르는 간절한 목소리로 나를 만류했다.
빠르게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막 식당을 나와 메이너드 자작 부인의 수업을 들으러 가려는데 익숙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니엘이 크라이튼 대공 저에 있을 때마다 항상 그의 수발을 드는 집사 바든이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 바든이 다른 집사들에게 일을 지시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모든 용무를 마친 바든이 몸을 돌리다가 나를 보고 그대로 자리에 멈추어 섰다.
“작은 아가씨?”
의아해하는 바든의 목소리에 나는 빙긋 웃었다.
“안녕?”
“예, 예에. 안녕하십니까, 작은 아가씨. 바든입니다. 바든 케드윅.”
그의 이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엘리엇이 주었던 다니엘과 관련된 인명록에 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든, 혹시 나랑 대화 좀 할 수 있을까?”
“저와…… 말씀이십니까?”
“응.”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바든이 얼떨떨해하던 표정을 지우고 금세 다정하게 웃었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나는 바든을 대동한 채 비어 있는 응접실로 들어갔다.
최대한 그와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럴 수는 없었다.
메이너드 자작 부인이 나와의 오전 교육을 위해 기다리는 중이었기 때문에 바든과 빠르게 대화를 마무리해야 할 것 같았다.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습니까?”
바든이 정중하게 내게 물었다.
나는 소파에 앉은 후에 바든을 올려다보았다.
“앉아서 대화하고 싶은데, 앉으면 안 될까?”
내가 그에게 묻자 바든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주인님의 앞에 어떻게 앉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괜찮으니 말씀하시면 됩니다.”
거절하는데 더 권하는 건 아닌 것 같기도 했고, 나도 시간이 얼마 없었기에 굳이 이런 사소한 일로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바든은 작은할아버지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거지?”
“네, 그렇습니다. 크라이튼 대공 각하께서 대공 작위에 오르셔서 다니엘 님이 떠나실 때까지 제가 줄곧 다니엘 님을 모셨습니다. 당연히 가끔씩 찾아오실 때마다 제가 모시는 게 맞겠지요.”
차분히 대답하는 그의 모습에서 자신의 일에 강한 자부심을 느끼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럼 혹시 작은할아버님께서 없을 때는 무슨 일을 해?”
“보통은…… 다른 집사들이 할 일을 지시하고 관리합니다. 아무래도 연차가 있으니까요.”
“그럼 편지를 관리하는 사람도 알고 있겠네?”
“예, 제가 관리하는 자들 중에…….”
말을 이어가던 바든이 문득 말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나와 눈을 마주쳤다.
“무슨 일로 제게 그런 것을 묻는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