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49)화 (49/174)

49화

“작은 아가씨, 칼리나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아니타도 왔습니다!”

똑똑, 책상에 엎드려 있으니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칼리나와 아니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서류를 대충 정리해 놓은 다음에 입을 열었다.

“들어와.”

내 허락이 떨어지자 곧 문이 열렸다. 칼리나와 아니타는 최대한 발걸음 소리를 죽여 안으로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혹시 필요하신 일은 없으셨나요?”

“다녀왔습니다!”

칼리나가 묻고, 아니타는 밝게 웃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없어.”

다행이라는 듯이 안도하는 칼리나를 보다가 문득 드는 생각에 의자에서 내려섰다.

“참, 두 사람이 나한테 저택 안내 좀 해 줄래? 이곳에 온 후로 그간 너무 바빠서 제대로 저택을 둘러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그럼요. 바로 모실게요.”

“가요, 작은 아가씨.”

칼리나와 아니타는 흔쾌히 내 부탁에 응해 주었다. 나는 그녀들을 따라 침실에서 나왔다.

일단은 직접 사람들을 만나고 부딪혀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디부터 갈까요?”

“1층부터 가자.”

“네, 안내해 드릴게요.”

칼리나의 안내를 받아 계단을 내려왔다. 그러고는 1층을 천천히 안내받기 시작했다.

현관을 열고 들어오면 보이는 로비부터 오른쪽으로는 응접실과 서재가 위치해 있었고, 왼쪽으로는 하인들과 하녀들이 집무를 보는 곳과 주방, 식당이 있었다. 그 외에도 외부에는 와인 창고와 식료품 창고, 간이 숙소 등이 있었다.

나는 이곳저곳을 안내받으며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인사를 받았다.

개중에는 서류에서 보았던 인상착의와 이름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들을 특히나 눈여겨보았다.

특이하게도 그들 중에는 브로치를 한 사람도 있었고, 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1층을 모두 둘러보고 2층으로 올라가는 길에 칼리나를 바라보았다.

“칼리나, 궁금한 게 있어.”

“예, 말씀하세요, 작은 아가씨.”

내 질문에 칼리나가 곧바로 대답하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몇몇 사람들은 똑같은 브로치를 하고 있던데 그건 뭐야?”

“아, 그거요. 저도 한번 물어본 적이 있는데 부적 같은 거래요.”

“부적?”

“네. 건강을 지켜 준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하나 살까 생각 중이에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칼리나를 보며 나는 눈을 깜빡였다.

칼리나가 살까 말까 고민할 정도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라는 소리였다.

다니엘이나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었던 것 모두 건강을 지켜 준다는 미신 때문인 듯했다.

비브르에게 한번 다른 사람들조차 하고 있었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실망한 참이었지만, 칼리나에게 확답을 듣고 나니 더욱 맥이 빠졌다.

“그렇구나…….”

내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칼리나가 작은 소리로 웃었다.

“작은 아가씨 것도 제가 직접 선물해 드릴까요?”

“응? 아니야. 난 괜찮아.”

“하나 갖고 계시면 좋을 텐데요. 미신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아냐. 난 어차피 스무 살이 넘어도 건강한 체질이야. 그런 건 없어도 돼.”

용병 생활을 하면서도 특별히 잔병치레가 없었던 나였다. 그렇기 때문에 내 건강에는 자신이 있었다. 굳이 그런 미신에 기대지 않아도 될 정도로.

칼리나는 조금 아쉬워하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예, 알겠습니다.”

이후로도 칼리나, 아니타와 함께 저택의 곳곳을 소개받았다. 꼭대기 층에서 지내는 하인과 하녀들의 방까지 모두 돌아본 후에야 나는 내 침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럼 좀 쉬세요. 오늘도 새벽부터 훈련하셨다면서요.”

“그래야지. 내일도 일찍 일어날 거니까. 두 사람도 일단 쉬고 있어. 필요하면 다시 부를게.”

“네, 작은 아가씨.”

“꼭 불러 주세요!”

칼리나와 아니타가 내 침실에서 나가는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나는 침대에 몸을 실었다.

그래도 하나는 알게 되었다. 생각보다 다니엘이 미신에 관심이 있다는 거.

건강을 지켜 준다는 브로치 같은 걸 믿고 차고 다니다니.

확실하게 마법적 능력이 있는 아티팩트거나 신전에서 만드는 성물이 아닌 이상에야 실제로 그런 능력이 있을 리 없다는 걸 알 텐데, 그는 그런 미신을 믿는 모양이었다.

* * *

잠깐의 휴식을 취한 후 나는 다시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는 서류 속의 인물들을 꼼꼼히 외우기 시작했다.

인상착의와 이름, 역할과 직급을 모두 확인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고 또 읽어도 머릿속에 쉬이 남지는 않았다.

집사 바든 같은 경우는 몇 번 다니엘을 보조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얼굴이 떠올라 금방 외울 수 있었지만, 얼굴조차 모르는 사람들은 외우는 것이 힘들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책상 앞에 앉아서 읽은 탓에 어느 정도는 숙지할 수 있었다.

그 후에는 라이넬 사제가 주었던 수정을 꺼내 들어 전에 배웠던 것처럼 신력을 사용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신력이 너무 작게 나와서 아지랑이 같았는데, 계속 시도를 하다 보니 그래도 실지렁이처럼 육안으로 구분할 정도는 되었다.

천천히 신력이 허공에서 실타래가 되어 뭉치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비브르가 다급히 나를 불렀다.

[미라벨! 내 말이 들리니?]

“응? 갑자기 왜?”

[크립소의 기운이 느껴진다.]

“뭐? 어디서?”

갑작스러운 비브르의 말에 수정을 다시 벨벳 주머니 안에 넣었다.

[일단 바깥으로 가 봐. 나도 정확히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나오는지는 확인이 되지 않는구나.]

“알겠어.”

황급히 침실에서 나왔다. 칼리나와 아니타는 침실 옆 휴게 공간에서 쉬는 모양이었다.

굳이 그들을 부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옆에 있으면 괜히 신경 쓰이기만 하니 나는 두 사람을 부르지 않고 곧장 비브르가 말하는 방향으로 향했다.

[여기서 아래로 내려가렴.]

비브르의 말대로 계단을 내려갔다. 막 2층에 멈추어 서니 비브르가 헛숨을 들이쉬었다.

[여기서 우측 끝으로.]

‘알겠어.’

비브르의 말대로 2층 우측 끝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비브르가 말한 곳과 가까워질수록 공기가 무겁고 답답해지고 있었다.

‘숨쉬기 힘들어.’

[크립소의 기운 때문일 거야. 다른 사람들은 불쾌한 정도지만, 미라벨 넌 신력을 담고 있는 성녀이기 때문에 더욱 힘들게 느껴지는 거야. 그래도 신력을 쓰지는 마라.]

‘왜?’

[그들에게 널 들키고 말 테니까. 적어도 지금은 안 돼.]

나는 뒤늦게 비브르의 말에 동의했다.

내가 아무리 날고뛰어 봤자 아홉 살짜리 어린애일 뿐이었다.

열두 살인 엘리엇과의 대련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그래 봤자 성인과 겨루는 것은 무리일 터였다.

아마도 내가 다니엘 그를 방해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다니엘은 필사적으로 나를 없애려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럼 날 왜 여기로 이끈 거야?’

[너에게 이 감각을 익혀 주고 싶었어. 이 자는 아무래도 자신에게는 대적할 자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아무렇지도 않게 악룡의 기운을 뿜어내는 것이.]

비브르는 화가 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곳까지 왔음에도 다니엘을 처리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낮게 탄식했다.

그때, 무겁던 기운이 눈 녹듯 사라졌다.

갑자기 숨을 쉬는 게 편해졌다. 헛숨을 들이쉬었던 나는 금세 달칵, 하고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내 정면에 위치해 있던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악룡의 기운이 풍기던 그 자리였다.

천천히 열린 문틈 사이로 익숙한 향수 냄새가 났다. 다니엘의 것이었다.

마침내 완전히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역시나 다니엘이었다.

“미라벨?”

다니엘은 내가 자신의 방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네가 여기까진 무슨 일이냐?”

다니엘이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나는 눈을 굴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저는…….”

악룡 크립소의 기운을 감지해서 이곳까지 왔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날 죽이라고 광고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그 외의 목적으로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이유를 말하는 것도 곤란했다.

내가 다니엘의 방을 찾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모면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지그시 짓씹었다. 그러다가 문득 변명거리가 떠올라 입을 열었다.

“저, ……사과드리러 왔어요.”

“뭐?”

내가 어렵게 꺼낸 말에 다니엘이 와락 인상을 구겼다. 안 그래도 보기 싫던 그의 인상이 사정없이 구겨져 보기 흉했다.

“사과? 네가? 나한테?”

그는 언짢은 얼굴로 한 마디, 한 마디 끊으며 물었다.

고작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나한테 굉장히 유감이 많은 듯했다.

“네, 작은할아버지께요. 아침에 제가 너무 무례한 말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사과드리러 왔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굳이 사과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 여기서 대화의 주제로 삼을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죄송하다는 듯 어깨를 축 내려트리고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꼴 보기 싫은 것을 본다는 듯이 인상을 구기다가 이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이 내게 사과하고 오라고 시키더냐?”

“네? 아니, 저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는 다니엘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맹랑한 꼬맹이 같으니.”

짧게 중얼거린 그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나는 쾅, 닫히는 소리에 놀라 어깨를 한번 움찔거렸다.

“작은할아버지?”

혹시나 싶은 마음에 문밖에 서서 다니엘을 불렀다. 겁먹은 척 연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다니엘은 답이 없었다.

그 이후로 다니엘은 다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온 의도를 크라이튼 대공의 훈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니엘이 내가 찾아온 목적을 알아차리지 않은 듯해 다행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