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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48)화 (48/174)

48화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니 곧 식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하인과 하녀는 트롤리를 연이어 끌고 오면서 엄마와 내 사이에 놓인 테이블에 식사를 차려 주었다.

나는 그들이 음식을 내놓는 것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내 앞에 스튜를 내려놓는 하녀의 목가에서 익숙한 것을 발견했다.

바로 두 개의 원이 겹쳐 있는 브로치였다.

일전에도 한 번 보았던 적이 있는 것 같아 천천히 기억을 되짚었다.

기억이 또렷한 것을 보면 비교적 최근의 일인 것이 분명했다.

대체 저걸 어디서 봤지?

분명 저 문양을 봤었는데…….

“아!”

“응? 왜 그러니, 벨?”

뒤늦게 기억을 떠올리고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그 탓에 엄마를 놀라게 한 모양이었다.

“별거 아니야. 그냥 갑자기 뭐가 생각나서.”

내가 웃으며 대답하자 엄마도 놀랐던 얼굴을 풀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기는 했지만, 사실 조금 놀란 상태였다.

하녀가 하고 있던 그 브로치는, 일전에 다니엘이 하고 있던 브로치와 같은 문양이었다.

혹시 그 브로치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만일 다니엘과 연관된 사람들이 이 브로치를 하고 있는 거라면?

그렇다면 생각보다 다니엘의 끄나풀을 찾는 것이 더욱 수월해질 터였다.

“있잖아.”

“네?”

내가 조심스럽게 하녀를 부르자 하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식사 준비해 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저는 할 일을 할 뿐인걸요.”

내 감사의 인사를 들은 하녀가 눈을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웃는 모습은 무척이나 선해 보여서 뒤에서 다니엘을 돕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름이 뭐야?”

“저는 헬레네 루스볼트입니다. 헬레네라고 불러 주세요.”

“응. 고마워, 헬레네.”

“영광입니다, 작은 아가씨.”

나는 빙긋 웃으며 속으로는 그녀의 이름을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그녀의 이름을 확인하는 데 성공하였으니 이따 돌아가서 서류와 비교해 보면 될 일이었다.

나는 일단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식사를 시작했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해도 계속해서 그 하녀를 향해 시선이 움직였지만, 그래도 후원을 구경하는 척 둘러본 것이기 때문에 내가 정확히 뭘 바라본 것인지는 모를 터였다.

“가끔은 야외에서 식사하는 것도 괜찮지?”

모든 신경을 하녀에게로 집중시키고 있을 때 엄마가 내게 말했다.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엄마를 주시했다.

“응. 오전에는 안에만 있으니까 답답했는데 훨씬 좋은 거 같아. 안 그래도 후원에는 꽃이 많이 폈잖아. 향도 좋고, 보기에도 좋고. 정말 좋아.”

내가 바라본 곳에는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사실 이거 엄마가 했던 거야.”

엄마는 즐거워하는 얼굴로 내게 설명했다.

“엄마가?”

“그래.”

엄마가 추억을 되짚듯이 후원을 천천히 살폈다. 나도 엄마의 시선이 닿는 꽃들을 확인했다.

“엄마랑 아빠가 여기 같이 있었을 때, 할아버지가 시켜서 정원을 바꾼 적이 있었어.”

엄마는 아빠와의 추억에 잠긴 듯했다.

예전에 우리가 살던 델피아 마을에서뿐만 아니라 이 크라이튼 대공가도 엄마와 아빠의 추억이 이곳저곳에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그때 가일이 얼마나 틱틱거렸는지…….”

나는 괜히 말을 걸어 추억에 잠긴 엄마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조용히 식사를 즐기며 엄마의 말을 들어 주었다.

마침내 식사가 끝났다.

“잘 먹었습니다!”

내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엄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써 가려고? 좀 더 쉬지 않고. 안 그래도 계속 바쁘다가 이제 시간이 난 거잖아. 차라도 마시고 휴식을 취하는 게 어떻겠니?”

엄마가 조심스럽게 내게 제안했다.

엄마의 제안대로 모처럼 난 휴가 시간에 엄마와 차를 마시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나는 얼른 침실로 돌아가서 서류 속에 나온 다니엘 관련 인물들 중에 헬레네의 이름이 있는지 꼭 확인해 보고 싶었다.

“오늘은 계획했던 일이 있어서 나중에 마실게. 미안해, 엄마.”

나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엄마에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그래, 그럼 나중에 마시면 되지. 시간은 많으니까. 얼른 가봐.”

엄마가 내 잔머리를 조심스럽게 귀 뒤로 넘겨 주며 말했다.

“응. 엄마, 이따 봐!”

나는 엄마에게 인사하고 곧장 내 침실로 뛰어 올라갔다.

메이너드 자작 부인이 보았더라면 체통 없이 실내에서 뛰면 안 된다고 한소리를 했겠지만, 오늘은 오전에 메이너드 자작 부인이 수업을 마치고 돌아갔기 때문에 그녀와 마주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작은 아가씨, 같이 가요!”

생각 없이 달리다가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뒤를 돌아보니 칼리나와 아니타가 힘겹게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나는 뒤늦게 두 사람이 나와 함께 붙어 다녀야 한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 마음이 급해서. 괜찮아?”

“네, ……괜찮, 괜찮아요.”

“칼리나는?”

“저는 괜찮습니다.”

헉헉거리며 가쁜 숨을 고르는 아니타와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보이는 칼리나를 확인했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음에는 조심할게. 칼리나, 아니타 미안해.”

“아니에요.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작은 아가씨께서 빨리 돌아가고 싶으셨는데 저희가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서 오히려 죄송하죠.”

칼리나가 오히려 나에게 사과하는 바람에 나는 혀를 지그시 깨물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그럼 가자.”

“네, 작은 아가씨.”

“네!”

아니타의 호흡이 정상적으로 돌아온 것을 확인하며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 내 침실에 도착했다. 나는 안으로 곧장 들어갔다가 나를 따라오는 두 사람을 확인하고 몸을 돌렸다.

“두 사람 식사하고 와. 난 침실에서 쉬고 있을 테니까.”

“그래도 될까요?”

서류를 확인하는 걸 다른 사람이 보는 걸 원치 않았기에 두 사람에게 제안했다. 안 그래도 두 사람 모두 식사하고 올 시간이었기 때문에 칼리나와 아니타 모두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응. 괜찮으니까 다녀와.”

“네, 작은 아가씨. 그럼 다녀올 테니 혹시 필요한 일이 있으면 설렁줄을 울려 주세요. 다른 하녀가 도움을 드릴 거예요.”

설명을 마친 칼리나가 아니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아니타는 나한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칼리나의 손을 잡고 침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난 후에야 나는 몸을 돌려 내 책상으로 향할 수 있었다.

목에 걸어 두었던 열쇠를 이용하여 서랍을 연 나는 그 속에 숨겨져 있던 서류들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나도 의자 위에 올라앉아 천천히 서류를 살피기 시작했다.

내가 찾고자 하는 건 헬레네 루스볼트라는 하녀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서류를 쭉 훑어보는데 헬레네나 루스볼트라는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없네…….”

[뭘 찾는 거니?]

내가 다시 서류를 위에서부터 훑어 내려가고 있으니 비브르가 내게 말을 걸었다.

“이게 다니엘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을 최대한 추려낸 명단이거든. 좀 아까 다니엘의 사람일 거라고 의심되는 사람이 있길래 혹시나 하고 서류를 확인해 봤는데 아무리 찾아도 헬레네 루스볼트라는 이름이 없어서.”

나는 실망감을 지우지 못하고 대답했다.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크라이튼 대공가의 높은 사람인 다니엘과 하녀가 우연히 같은 브로치를 찰 확률이 높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그 브로치가 다니엘과의 어떤 연결 고리가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오산이었나 보다. 아니면 이 리스트가 완전하지 않거나.

하지만 리스트는 엘리엇이 준 것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해 올 정도라면 엘리엇이 실수를 하거나 잘못 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저런…….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구나.]

비브르는 무척이나 미안해하며 작은 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도 수긍하고 넘어가려던 찰나에 문득 그가 나보다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참, 나 하나 궁금한 거 있는데.”

[말하렴.]

나는 빈 종이에 내가 보았던 브로치 모양을 똑같이 그리기 시작했다.

두 개의 원이 겹쳐 있는 모양이었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이 모양 본 적 있어?”

[그게 무엇이니?]

혹시 알까 싶어서 물어보았는데 되묻는 것을 보아하니 비브르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냐. 모르면 됐어.”

[아니, 본 것 같기는 하구나. 이전에 플레온과 함께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것을 옷에 달고 있었어. 그리고 다니엘 크라이튼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 역시 하고 있었던 것 같구나.]

“뭐? 그게 정말이야?”

비브르가 꺼낸 말에 고개를 숙여 펜던트를 확인했다. 아쉽게도 줄이 짧아서 펜던트 속에 있을 비브르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게 혹시…….”

내가 조금 뜸을 들이자 비브르가 곧장 되물었다.

[악룡 크립소와 관련이 되어 있는지 묻는 거냐?]

“응.”

[글쎄. 하지만 내가 기억하기로 크립소와 관련되어 있지 않은 이들도 이 문양을 옷에 달고 있었단다. 만일 이게 크립소와 관련이 있는 거라면 무슨 의미가 있지 않겠니? 하지만 내 생각에는 아닌 것 같구나.]

“음…….”

내 추측을 부정하는 비브르의 말에 조금 맥이 빠졌다.

아무것도 명확해진 게 없었다.

다니엘이 미래에도 하고 있는 브로치였지만, 다른 사람들도 하고 있었다.

무언가 중요한 표식 같은 게 아닌가 싶었지만, 비브르가 보았을 때 아무런 관련 없는 사람조차도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저 내가 헛다리를 짚은 모양이었다.

나는 분명히 중요한 연결 고리를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단순한 액세서리였나 보다.

김이 빠져서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책상에 엎어졌다.

이런 헛다리를 짚느니 엄마와 다과를 즐기는 게 더 유익했을 텐데…….

나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하지만 이미 엄마와의 다과는 거절한 이후였고, 그나마 이 브로치를 한 헬레네 루스볼트가 다니엘의 끄나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수확이 있었다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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