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47)화 (47/174)
  • 47화

    식사는 평소와 같이 이뤄졌다. 다만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다니엘의 기분이 이전과 달리 많이 불쾌해 보였다는 점이었다.

    그를 골탕 먹이는 게 목적이 아니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가 불쾌해하는 모습을 보니 괜히 기분이 좋았다.

    그 기분에 나는 잠시 내가 너무 못된 것은 아닌가 고민이 되었지만, 그런 고민은 하지 않기로 했다.

    다니엘 때문에 죽기까지 했는데 이 정도가 뭐 대수라고?

    오늘따라 훈련도 열심히 받았기 때문에 식사도 평소보다 더 맛있는 듯했다.

    모처럼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치고 빠르게 방으로 돌아왔다. 식사 후에는 메이너드 자작 부인의 교양수업이 있기는 했지만, 잠깐 정도는 시간을 낼 수 있었다.

    “벨!”

    복도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엘리엇이 내 침실 앞으로 다가왔다.

    “아까 말한 리스트는?”

    “여기 있어.”

    엘리엇이 들고 있던 서류를 내게 주었다. 나는 그에게서 서류를 받아들고 대충 안을 살폈다. 많은 사람들의 인적 정보가 담긴 서류였다.

    “고마워.”

    “별거 아니래도. 혹시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그리고 뭐든 혼자 하려고 하지 마. 너한테는 나도, 그리고 아버지도, 대공 각하와 고모님도 있으니까.”

    엘리엇은 걱정은 담아 내게 말했다.

    나 역시 어느 정도 성장해서 다니엘과 직접 다툴 정도가 아니라면 함부로 그를 공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가끔씩 오늘처럼 골탕 먹이는 수준이면 모를까.

    “그리고 오늘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작은할아버님과 엮이는 일도 삼가. 괜히 눈 밖에 나서 좋은 거 없으니까.”

    내가 속으로 생각하는 바를 읽은 건지 다니엘이 나에게 충고했다.

    괜히 뜨끔하여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할게.”

    “그래. 알았어. 그럼 이따 봐.”

    다니엘은 오전 수업을 위해 다시 복도로 사라졌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내 침실로 들어왔다.

    “그게 뭐예요?”

    침실까지 따라 들어온 아니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으응. 별거 아니야.”

    나는 부러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책상 앞에 놓인 의자 위로 올라가 서류를 펼쳐 들었다.

    서류에는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인상착의와 이름, 소속, 역할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고작 이틀 사이에 준비했으리라고는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세하고 알아보기 쉽게 되어 있었다.

    나는 적잖이 놀라며 서류를 들추어 보았다.

    “와, 대단하다.”

    나직이 감탄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시간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를 해 왔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아니지. 지금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서류 안에 적힌 인물들을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다니엘과 친분이 있거나 그와 자주 접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서류에 담겨 있었다.

    대충 세어 봐도 마흔 명이 넘었다.

    나는 천천히 그 목록을 살펴보았다. 시간이 많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주요 역할과 업무를 훑어보기만 했다.

    이곳에 적혀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의심스러웠지만, 당장 다니엘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다니엘의 사람이라고 볼 수 없었다.

    애초에 다니엘은 이곳 크라이튼 대공가의 사람이었다.

    오래도록 이곳에서 자라왔고, 또한 크라이튼 대공의 동생으로서 이 저택을 왕래하였으니 그동안 그와 친분을 쌓아 왔던 자가 한두 사람은 아닐 터였다.

    그러나 아무리 서류를 뒤져 보아도 편지를 수, 발신하는 역할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엄마가 꾸준히 크라이튼 대공가에 편지를 보냈다면, 틀림없이 두 가지 방향으로 갈릴 터였다.

    하나는 편지가 담당 부서에 전해지기 전에 빼돌려졌든가, 아니면 편지를 관리하는 곳보다 더 높은 곳에서 편지를 빼돌렸든가.

    어떤 방식으로든 꾸준히 크라이튼 대공에게 편지가 도착하지 않도록 수를 쓰기 용이한 위치에 있는 사람을 찾아내야 했다.

    직접 발품을 팔아 확인하면 좋겠지만, 내가 그런 정보를 캐고 다닌다는 걸 알면 다니엘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았다.

    적어도 나보다 입지가 있는 다니엘이 모든 것을 다 정리해 놓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작은 아가씨, 이러고 계시다가는 수업에 늦으실 거예요. 바쁜 일이 아니라면 이만 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시간을 보며 초조하게 발을 구른 아니타가 내게 이동할 것을 권했다.

    나는 그제야 서류를 훑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은 아홉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알았어, 갈게.”

    서류를 잘 챙겨서 서랍에 넣어 둔 후 열쇠로 잘 잠갔다. 그리고 팬던트 목걸이에 열쇠를 걸어 놓았다.

    누가 서류를 찾고자 하더라도 보편적인 방법으로는 열리지 않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가자.”

    목걸이에 열쇠가 잘 달려 있는 것을 확인하고 곧장 움직였다.

    3층 간이 응접실에는 이미 메이너드 자작 부인이 도착해 있었다.

    “안녕하세요, 메이너드 자작 부인.”

    나는 그녀에게서 배운 대로 그녀를 향해 인사했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공녀님.”

    메이너드 자작 부인 역시 나를 보고 정중히 인사했다.

    “제가 너무 늦어서 기다리게 한 것은 아닌가요?”

    내가 미안함을 표하며 묻자 메이너드 자작 부인이 흡족한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도 방금 막 도착한 참인걸요. 그러고 보니 이제는 완전히 예절을 몸에 익히셨군요. 아주 자연스럽고 우아했어요.”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메이너드 자작 부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참, 부인.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수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메이너드 자작 부인에게 운을 떼었다.

    메이너드 자작 부인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요. 어떤 게 궁금하실까요?”

    “혹시 저택에 편지가 도착하면, 어떤 방식으로 저한테 전해지는 걸까요?”

    내가 묻자 메이너드 자작 부인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왜 궁금한 거죠?”

    “아, 그냥요. 여기서도 편지를 보내고 받을 텐데 혹시 어떻게 전달을 해야 하나 궁금해서요.”

    “그런 거면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편지를 하녀에게 전달하면 될 거예요.”

    “……네.”

    혹시나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물어본 거였는데 아무래도 메이너드 자작 부인을 통해서는 더 자세한 과정을 들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교양 교육은 평소처럼 지루하게 진행되었다.

    나는 최대한 집중력을 발휘하여 그녀가 진행하는 수업을 들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시험을 치기로 하였으므로 정신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자,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도록 할게요. 매번 말씀드리지만, 오늘 배운 내용들도 다시 따로 정리하고 복습하셔야 기억 속에 깊이 남을 겁니다.”

    “네, 부인. 명심할게요.”

    인사를 마치고 메이너드 자작 부인이 응접실에서 나갔다. 오늘 오후는 비교적 여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소파 위에 앉아 몸을 뒤로 눕혔다. 역사가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얽히는 기분이었다.

    “오늘 점심 식사는 아가씨와 함께입니다.”

    내가 눈을 감고 복잡한 머리를 진정시키는 사이에 칼리나가 나를 향해 말했다.

    오늘 점심 식사는 식당이 아닌 후원에서 하기로 했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날씨가 따뜻해서 밖에서 식사하기 딱 좋은 날이었다. 후원에는 이미 엄마가 나와 있었다.

    꽃들로 아름답게 장식된 후원에 있는 엄마의 모습은 꼭 천사를 보는 것 같았다.

    단지 내 감상만이 아니었다.

    브라이언에게 듣기로 엄마는 과거에 아주 인기가 많았다고 했으니까.

    “엄마!”

    모처럼 엄마와 단둘이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기분 좋아 빠르게 엄마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엄마의 품에 안겼다.

    엄마는 두 손을 벌려 나를 반긴 후 나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엄마한테서 꽃향기가 났다.

    “벨, 공부는 잘했니?”

    나를 힘껏 끌어안았다가 다시 품에서 놓아 준 엄마가 한 손으로 내 뺨을 쓸며 물었다.

    “그냥. 열심히는 하고 있어.”

    “다행이네. 새벽부터 연이어 훈련하고 공부하고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쁠 텐데 가엾어서 어쩌나.”

    “아냐. 나도 좋아서 하는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말을 마친 후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엄마의 온화한 미소는 보고 있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엄마한테 응석을 부리며 다시 품에 안겼다.

    엄마에게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가 내 마음 역시 따뜻하게 녹여 주는 것 같았다.

    나는 문득 엄마에게서 벗어나 엄마를 똑바로 주시했다.

    “엄마. 엄마는 편지에 대해서 안 궁금해? 그렇게 많은 편지가 대체 어디로 갔을지. 모두 분실된 건 아닐 거 아니야. 그런데도 편지가 전해지지 않았다면,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게 틀림없을 건데.”

    누구보다도 가장 궁금할 사람이 엄마라고 생각했건만, 엄마는 딱히 그 일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 듯이 보였다. 오히려 다니엘과 관련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만 혈안이 된 것 같아서 조금 민망한 기분이었다.

    “궁금하지.”

    짧게 대답한 엄마가 고개를 들어 저택을 바라보았다.

    “근데 확인하고 싶진 않아.”

    “…….”

    “우리 벨의 도움으로 엄마가 다시 할아버지를 만났잖아. 엄마는 그걸로 만족해. 괜히 찾아내고 싶지는 않아.”

    엄마는 조금 슬퍼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엄마의 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확인했다가 누군가가 엄마와 크라이튼 대공의 만남을 일부러 방해한 거라면 적잖이 충격을 받을 테니까.

    게다가 이곳의 사람들이 낯선 나와 달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엄마와 아는 사이였다.

    그러니 누군가가 의도했다면, 이는 필시 엄마가 아는 사람일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찾고 싶지 않은 듯했다.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고 보니 크라이튼 대공의 마음도 조금 이해가 갔다.

    아마도 엄마와 크게 다르지 않은 마음일 터였다.

    나는 잠시 숨을 크게 들이쉰 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었다.

    “벨, 어서 앉아. 식사해야지.”

    내가 군소리 없이 수긍하는 듯하자 엄마가 앉을 것을 권했다. 나는 내 자리에 앉아 편안한 얼굴로 웃는 엄마를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