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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46)화 (46/174)

46화

엘리엇의 예상대로 오래 기다리지 않아 브라이언이 연무장으로 나왔다. 그는 대충 상황을 살펴보더니 우리가 미리 훈련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제법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엘리엇, 미라벨 너희 오늘은 일찍 나왔구나? 보아하니 벌써 어느 정도 훈련도 한 것 같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아버지.”

엘리엇이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일찍 나와서 훈련하던 중이었다고 해도 되었을 텐데, 생각보다 엘리엇은 쑥스러움이 많은 듯했다.

“그래도 훈련은 예정대로 처음부터 할 거야. 괜찮겠지?”

“네, 아버지.”

“그럼요.”

엘리엇과 내 대답을 들은 브라이언이 흐뭇해하며 웃었다.

“자, 그럼 일단 연무장 열 바퀴 도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엘리엇은 그나마 이전부터 해 왔으니 익숙하겠지만…….”

브라이언이 슬쩍 나를 돌아보며 말끝을 흐렸다.

“저도 괜찮아요!”

내가 씩씩하게 대답하자 브라이언이 무릎을 굽혀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걱정을 가득 담은 그의 눈이 보였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회귀하기 전의 기억이 너무 또렷해서 날카롭고 매섭게만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브라이언의 눈을 바라보니 느낌이 전혀 달랐다.

그의 눈에는 다정함과 상냥함이 가득했다.

내가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있으니 브라이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라벨, 만일 훈련하다가 너무 힘들거든 무리하지 말고 쉬어도 된다. 알겠니? 중요한 건 네가 다치지 않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는 거니까.”

“네, 숙부님.”

브라이언이 만족스러워하며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든든한 기분에 나까지 미소가 번졌다.

“그럼 엘리엇, 네가 미라벨의 페이스를 잘 챙겨 주어라.”

“예, 아버지. 벨, 가자.”

엘리엇이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연무장 끝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손목과 발목을 가볍게 풀어 준 다음에는 엘리엇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운동장을 열 바퀴나 달리는 건 역시 힘에 부쳤다.

지금의 몸으로는 이 모든 훈련을 처음 하는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 마침내 완주할 수 있었다.

달리기 다음으로 하는 것은 더욱 강도 높아진 체력 훈련과 이전에 사용하던 가벼운 목검보다 더욱 묵직해진 목검을 다루는 방법이었다.

브라이언은 어디까지나 내 몸 상태를 최선으로 확인하며 훈련을 지시했다. 혹시라도 내가 지쳐서 힘들어하거든 잠시간의 휴식을 제안하며 독려해 주기도 했다.

엘리엇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나보다도 훨씬 오랫동안 이런 훈련을 해왔다. 그렇기에 내가 받는 훈련 강도가 그에게는 그렇게 버겁지 않은 페이스임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엘리엇은 내 속도를 맞춰서 내가 충분히 훈련을 따라갈 수 있도록 옆에서 페이스메이커를 해 주었다.

“여기까지 하마.”

검을 느리게 휘두르는 방법을 배우던 찰나에 브라이언이 선언했다.

나는 그제야 턱 끝까지 차올랐던 숨을 내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쥐고 있던 목검도 바닥에 내려놓은 상태였다.

엘리엇은 브라이언의 선언을 듣고 목검을 한 손으로 들며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가 일어날 수 있도록 손을 내밀었다.

“훈련 끝나도 가급적이면 서 있는 게 좋아.”

야속한 말이었지만, 확실히 이대로 주저앉아서 헐떡이고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엘리엇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내가 일어난 것을 확인한 엘리엇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내 목검을 주웠다.

“나한테 줘, 오빠. 내가 갖다 놓을게.”

내가 무심코 그를 향해 손을 뻗자, 엘리엇이 고개를 저었다.

“벨 너는 첫날이라 힘들잖아. 가져다 놓는 것 정도는 오빠도 할 수 있어.”

말을 마친 엘리엇이 목검을 보관하는 곳에 우리의 목검을 잘 정리해 넣어 두었다.

의젓해 보이는 그를 보며 작게 웃었다.

“그런데 너희 둘, 뭔가…… 전이랑 좀 다른 거 같은데?”

브라이언이 의아해하며 우리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뭐가요?”

엘리엇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역시도 브라이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전에도 엘리엇이 나를 많이 도와주었다. 오늘 내가 그를 오빠라고 부르는 일 때문에 더욱 나를 챙겨 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엘리엇의 나이를 생각하면 오빠가 된 김에 의젓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으니까.

“언제부터 엘리엇 네가 미라벨을 벨이라고 불렀니? 그리고 미라벨도 엘리엇을 오빠라고…….”

무언가 했더니 호칭의 문제였던 모양이었다. 브라이언은 크게 충격받은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엘리엇은 새삼스러운 브라이언의 질문에 낮게 콧방귀를 뀌었다.

“당연한 일이잖아요, 아버지. 제가 미라벨의 오빠인데. 동생의 애칭 정도는 부를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뿌듯해 보이는 엘리엇을 확인한 브라이언이 크게 서운한 듯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 큰 덩치와 날카롭고 예민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나와 관련해서는 조금 소심한 모습을 보이는 게 아무래도 괴리감이 있었다. 하지만 썩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숙부님도 벨이라고 부르셔도 돼요.”

“그래? 나도 그렇게 불러도 되니, 조카야?”

금세 밝아지는 얼굴을 확인하며 나는 작게 웃었다.

“네, 그렇게 불러 주세요.”

“고맙다, 조카. 아니지. 벨.”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모습이 철의 공작이라 부르는 크라이튼 공작과 매치가 잘 안 됐다.

새벽부터 아침까지 이어진 훈련에 완전히 지쳐 버린 몸을 이끌고 먼저 씻으러 향했다.

따뜻한 물에 몸을 씻어내니 피곤함이 싹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신력을 사용해 피로를 풀 때엔 느낄 수 없는 노곤함과 행복함이 밀려왔다.

빠르게 씻고 난 후 식당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막 계단을 내려서는데 하필이면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과 마주치고 말았다.

“미라벨, 인사 안 하느냐?”

내가 멀뚱히 서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자 다니엘이 미간을 잔뜩 구겼다.

안 그래도 며칠 전에 식사 자리에서 내가 그의 언행을 고발했던 일이 있기 때문인지 그는 나를 보며 대놓고 불쾌한 티를 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작은할아버지.”

“조그마한 게 벌써부터 싹이 노랗군. 어른이 먼저 얘길 꺼내지 않으면 인사도 할 줄 모르고 말이야. 이봐, 바든. 형님께 말해 미라벨의 예절 교육을 다시 시키라고 해라.”

짜증이 가득 묻어나는 말투에 집사 바든은 난처한 얼굴로 웃을 뿐이었다.

“일단 식당으로 가시죠, 다니엘 님.”

“흥.”

작게 콧방귀를 뀐 다니엘이 나를 무시하고는 먼저 앞장서서 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다니엘과 거리를 좀 두고 갈까 하다가 이내 빠르게 달려가 다니엘과 걸음을 맞췄다.

기분 나쁜 다니엘의 시선이 나를 향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다니엘을 올려다보았다.

“작은할아버지께서는 여기 사시는 건가요?”

보아하니 따로 집이 있는 것 같은데 계속 찾아오는 다니엘의 의중이 궁금했다. 그래도 내가 추궁해 봐야 알 수 있는 게 없었으니 일단은 대화의 물꼬를 텄다.

다니엘은 불쾌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좁혀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대답하지는 않았다.

슬쩍 주변을 살펴보았다. 멀리서 크라이튼 대공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일부러 다니엘을 안타깝다는 듯이 바라보며 작게 입을 열었다.

“집이 없으신 거예요? 세상에……. 너무 안타까워요. 저희도 이곳에 오기 전에 살던 집이 있었는데……. 괜찮아요. 그러실 수도 있죠.”

“뭐라?”

일부러 심기를 긁는 말에 결국 다니엘이 자리에서 우뚝 멈추어 섰다. 나도 그를 따라 자리에 멈추어 서서는 겁을 먹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화나셨어요? 죄송해요. 저는 그냥 집이 없으신 건지 궁금해서요.”

“건방진 것이……!”

“다니엘?”

그러나 다니엘은 나를 향해 짜증을 낼 수도 없었다. 때맞추어 크라이튼 대공이 근처까지 다가왔다.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

크라이튼 대공은 미심쩍은 눈초리로 다니엘을 주시했다.

다니엘은 억울한 듯이 크라이튼 대공을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 글쎄 미라벨 요것이 나를 놀리잖아? 나보고 집이 없다나 뭐라나.”

“거, 어린애가 몰라서 한 말 가지고 예민하게 구는구나.”

“형님!”

크라이튼 대공이 나를 두둔하자 다니엘은 골이 난 얼굴로 크라이튼 대공을 불렀다.

“하지만 미라벨 입장에서는 궁금할 일이지 않니? 네가 저택에 머무는 게 이리 길었던 적은 처음인 듯한데.”

크라이튼 대공은 다니엘의 속도 모르고 말했다. 다니엘은 얼굴을 와락 구겼다가 뒤늦게 표정을 풀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10년 만에 조카가 돌아와 기쁜 마음에 며칠 묵었을 뿐인데 너무 섭섭한 말만 하고.”

크라이튼 대공은 그제야 다니엘을 보며 쓰게 웃었다.

“미안하구나. 내가 네 마음을 헤아려 주지 못했어.”

“아냐. 내가 어린애와 괜한 말다툼이나 하고 있으니 그러실 수도 있지.”

자책하듯 말한 다니엘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다정한 척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그래, 미라벨 네가 너무 어리다는 걸 내가 잊고 있었구나. 게다가 그동안 넌 평민으로 지냈으니 예절에 어두울 법도 하지. 그래도 다음부터는 어른의 기분을 맞출 줄 아는 능력을 기르도록 해라.”

다니엘은 말을 마치고는 됐냐는 듯이 고개를 뻣뻣하게 들었다.

크라이튼 대공은 아직 찜찜한 기분인 듯했지만, 괜히 다니엘과 싸우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들어가자꾸나.”

크라이튼 대공이 다니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다니엘이 그 손길에 수긍하고 곧 식당으로 들어갔다.

크라이튼 대공은 다니엘이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 모습을 보며 뒤이어 나를 돌아보았다.

“미라벨, 너도 들어가야지?”

“네, 할아버지.”

푸근히 웃는 크라이튼 대공의 미소를 보며 나도 웃음으로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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