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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45)화 (45/174)

45화

엘리엇이 나에게 진 게 분해서 남모르게 훈련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아닌 모양이었다.

엘리엇을 오해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이 일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가 정말 나를 동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

[어린데도 대단한 아이구나. 크게 될 재목이야.]

비브르가 감탄했다. 나 역시도 비브르의 말에 공감했다.

어린 나이에 하기 쉽지 않은 생각이었다. 아니, 보통은 성인도 이런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겠지.

“한심하지?”

위축되어서 하는 말에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저어 그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 전혀 한심하게 생각 안 해. 오히려 멋지고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정말?”

엘리엇이 반색했다. 긍정의 의미로 미소를 지어 보이자 엘리엇이 나를 마주 보며 웃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빈말이라도 기분 좋은데?”

“빈말 아니야. 진짜인걸.”

“그래, 알았어.”

아무래도 엘리엇은 내가 자기 듣기 좋은 말을 해 준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내 진심을 어떻게 전하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고 있으니 엘리엇이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그럼 미라벨 너는 왜 이 시간에 나온 거야?”

“나? 나는……. 잠이 안 와서. 그런 김에 검을 좀 더 훈련하고 싶기도 했고.”

“그럼 내가 자세 봐줄까?”

엘리엇이 흔쾌히 웃으며 내게 제안했다.

“그래도 돼? 엘리엇 너도 훈련하던 중이었잖아.”

“네가 자세 잡는 거 봐줄 정도는 돼. 이래 봬도 아버지한테 오래 배워서 자세는 잘 잡아.”

확실히 브라이언에게 검술을 배울 때도 자세를 보조해 주는 것은 엘리엇이었다.

브라이언의 가르침이 중요하기는 했지만, 엘리엇에게 도움을 받는 것만으로도 정석적인 기초가 없는 내게는 충분히 도움이 될 터였다.

“그럼 부탁할게. 참, 이리로 와 볼래?”

“응?”

내가 부르자 엘리엇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 와 봐.”

“으응.”

엘리엇이 얼떨떨한 얼굴로 다가왔다.

“이렇게?”

마침내 엘리엇이 내 바로 앞에 서게 되었다.

“그대로 잠깐만 있어 봐.”

“응.”

말을 마친 나는 엘리엇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어제 내가 그랬던 것처럼 신력을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어둠을 뚫고 환한 빛이 주변을 밝혔다.

엘리엇은 내 손에서 나오는 하얀빛에 놀라서 뒤로 물러나려다가 이내 자리에 멈추어 섰다. 나를 믿고 있기에 피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엘리엇을 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내 손에서 피어올랐던 환한 빛은 천천히 엘리엇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엘리엇의 몸을 감싸듯 환하게 빛나다가 이내 사그라들었다.

“이게 뭐야?”

모든 빛이 사라지고 난 후에야 엘리엇이 놀란 기색으로 내게 물었다.

물어야 할 때가 조금 늦은 것 같기는 했지만, 나는 엘리엇을 향해 들었던 손을 회수하며 대답해 주었다.

“신력이야.”

“신력?”

“응. 듀아나 여신님의 능력이지.”

엘리엇이 듀아나 여신님이라는 말에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고 보니 한번 들었던 거 같아. 일전에 고모님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들렀던 사제가 네게 신력의 기운이 잠들어 있다고 했다며. 그 이후로도 몇 번인가 신전에 방문했고.”

거기까지 떠올린 엘리엇이 화들짝 놀라며 나를 확인했다.

“맙소사! 그럼 너 정말 듀아나 신전의 사제로……!”

“아니야.”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내가 듀아나 신전의 사제가 될 것처럼 운을 띄우는 엘리엇을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신력이 있어서 신전에서 신력을 배우기 시작했어. 아직은 이렇다 할 능력은 아니지만, 그래도 피로 회복이나 간단한 치료 정도는 해 줄 수 있거든.”

“아, 그래서.”

뒤늦게 엘리엇이 이해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한결 가뿐해졌을 몸을 이리저리 휘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진짜 몸이 가뿐해졌어.”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 참, 그런데 엘리엇.”

이리저리 스트레칭을 하던 엘리엇이 다시금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말하기 전까지는 내가 신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거 다른 사람들한테 비밀이야.”

“왜? 신력을 쓸 수 있는 건 좋은 거잖아. 사제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전을 방문하는데.”

엘리엇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그냥. 아직은 미숙하기도 하고. 또 괜히 다른 사람들한테 들켜서 주목받는 것도 싫고…….”

엘리엇은 잠시 나를 지켜보았다. 내가 말한 바를 완전히 이해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으나, 이 이상으로 더 캐물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 미라벨 네가 싫다면 나도 굳이 얘기하고 다니고 싶진 않아. 걱정하지 마. 다른 사람한테 얘기 안 할게.”

“숙부님이나 할아버지한테도 비밀로 해 줘.”

“그러지 뭐.”

엘리엇은 순순히 수긍했다.

“근데 미라벨.”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몸을 풀려 하자 엘리엇이 나를 불렀다.

“왜?”

“그…….”

용무가 있으니 불렀을 거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엘리엇은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며 콧잔등을 긁적이고 있었다.

딴청을 부리는 듯한 그의 태도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왜 그래? 불러 놓고 말도 없고.”

혹시 신력과 관련해서 뭐 물을 거라도 있는 건가? ……싶은 찰나에 엘리엇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한테 왜 엘리엇이라고 해?”

“어?”

예상치 못한 그의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네 이름이 엘리엇이니까?”

내가 얼떨떨한 기분으로 대답하자 엘리엇이 입술을 비죽거렸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럼? 뭐 다르게 불러야 할까?”

내가 궁금해서 묻자 엘리엇이 눈을 굴리며 대답을 망설였다. 나는 조용히 그가 대답하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침묵의 시간이 끝나고 엘리엇이 내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난 네 오빠……인 거잖아.”

엘리엇이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건지 뒤늦게 이해하고 괜히 긴장했던 마음을 풀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그랬다. 숙부인 브라이언의 아들이며, 나보다 세 살이나 많은 그였으니, 내게는 오빠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를 볼 때면 오빠라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게 스물세 살의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에 아직 열두 살인 엘리엇을 오빠라고 인지하기가 어려운 듯했다.

“그럼 오빠라고 부를까?”

“으응?”

내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엘리엇이 움찔거렸다.

“아니 뭐, 그렇게 해 주면 좋겠지만…… 네가 싫으면 됐어. 강요하지는 않을게.”

시무룩한 목소리였다.

나는 어린 엘리엇이 얼마나 그 일을 생각하고 있었을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아냐. 뭐가 어렵다고. 그러는 오빠도 날 벨이라고 불러 줘. 우리 엄마랑 아빠만 부르는 호칭인데 허락해 줄게.”

어려운 호칭도 아니었고, 실제로 엘리엇과는 가족이었으니 나도 못 부를 것은 없었다.

흔쾌히 승낙하며 나 역시 엘리엇에게 내 애칭을 허락했다.

엘리엇은 내가 애칭까지 허락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크게 당황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벨.”

“그럼 일단 난 스트레칭부터 할 테니까 조금 이따가 내가 검 잡는 것 좀 봐줘.”

“알겠어.”

대답을 듣고 천천히 몸을 풀기 시작했다.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스트레칭한 후에 내가 훈련 때마다 들었던 목검을 찾아왔다.

그사이에 스스로 훈련하던 엘리엇이 내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내가 검을 들고 기본자세 잡는 법을 도와주었다.

엘리엇이 검을 휘두르는 동작을 몇 번이나 내게 보여 준 후 내가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엘리엇은 옆에서 지켜보며 조금씩 어긋나는 자세들을 바로잡아 주었다.

“작은 아가씨!”

그렇게 한참을 훈련하고 있으니 어느새 아니타가 훈련장으로 나타났다.

나는 잠시 검을 휘두르던 것을 멈추고 울상을 하고 있는 아니타를 돌아보았다.

“방에 안 계셔서 깜짝 놀랐어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아니타가 내게 말했다.

“미안. 쪽지라도 남길 걸 그랬네.”

빈 침실을 발견하고 놀랐을 아니타를 생각하니 미안해졌다.

“많이 울었어?”

아직까지 놀란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훌쩍거리고 있는 위로하기 위해 아니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니타는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안 울었어요.”

“그래? 대견하네. 그리고 미안해. 앞으로는 혹시 이런 일이 있더라도 쪽지 남길게.”

“정말이죠?”

“응. 그럼. 약속할까?”

내가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이자 아니타가 커다란 눈으로 나와 내 손가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내밀어진 손에 손가락을 걸었다.

“약속이에요, 작은 아가씨.”

“응. 꼭 그럴게.”

손수건이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이미 챙겨왔던 손수건을 엘리엇에게 빌려준 터라 여분의 손수건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아니타를 끌어안고 그녀의 등을 가볍게 토닥거려 주었다.

“자, 이제 저쪽에 가서 좀 쉬고 있어.”

“네, 알겠어요.”

아니타가 항상 대기하던 벤치에 가서 앉았다.

“뭐야, 벨. 말 안 하고 나왔어?”

엘리엇이 아니타를 확인하고는 나한테 물었다.

“너무 일찍 일어나져서 깨우기 미안했거든. 근데 쪽지라도 남길 걸 그랬나 봐.”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그리고 곧 아버지가 나오실 거야. 그러니 이제 아버지한테 훈련받는 게 낫겠어.”

엘리엇이 목검을 어깨에 걸친 채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제 네가 말한 거 말이야. 일단 정리해 놨는데 언제 줄까?”

문득 엘리엇이 나를 향해 물었다.

처음에는 엘리엇이 말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했다가 뒤늦게 그제 아침 식사 이후 내가 엘리엇에게 부탁했던 일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편지를 빼돌릴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을 추려 달라고 부탁했던 적이 있었다.

“그걸 벌써 했어? 이틀밖에 안 됐는데?”

새벽부터 나와서 훈련하랴, 교육받으랴. 온종일 바빴을 엘리엇이 내 부탁에 시간을 쪼개어 조사까지 했을 것을 생각하니 죄책감이 마음을 찔렀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닌걸. 만일 네 말이 사실이라면 자세히 알아봐야 하는 일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네 부탁이잖아. 너도 빠르게 살피는 게 좋을 테니 아침 식사 끝나면 바로 보내 줄게.”

“고마워.”

내 감사 인사에 엘리엇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다정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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