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44)화 (44/174)
  • 44화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나는 곧장 침실로 돌아와 숨을 돌렸다. 안 그래도 오늘은 많은 일이 있었다. 게다가 엘리엇과의 전투로 인해 팔도 아파서 휴식을 좀 취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막 휴식을 위해 소파에 앉으려던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의아함에 문을 바라보며 출입을 허락하자, 문이 열리며 아니타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아니타도 쉴 시간인데 무슨 일인가 싶어 바라보았다.

    “작은 아가씨, 아까 말씀하셨던 쿠키를 저녁 간식 대신 가져왔어요.”

    아니타가 작은 접시 하나를 내게 보여 주었다. 그 위에는 작고 예쁜 머랭 쿠키들이 담겨 있었다.

    이게 뭔가 싶었지만, 뒤늦게 에이드리안이 부탁했던 쿠키라는 걸 떠올렸다.

    처음 계획과 달리 갑작스럽게 대련하러 연무장으로 이동한 데다가 에이드리안이 연무장에서 곧장 황성으로 돌아간 탓에 쿠키가 남은 모양이었다.

    나는 쿠키 하나를 집어 든 후 아니타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난 이거 하나면 되니까 나머지는 아니타 너 먹어.”

    “네?”

    아니타는 뜻밖의 제안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 그래도 왕방울처럼 커다랗던 눈동자가 더욱 커졌다.

    “정말요? 그래도 되나요?”

    아니타가 내게 확답을 구했다. 나는 집어 들었던 쿠키를 입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혀를 녹일 듯 달콤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절로 눈이 가늘어질 정도로 단맛이었다.

    “그럼. 난 너무 달아서 못 먹겠어. 그러니 아니타가 나를 대신해서 먹어 줘. 이대로 버리긴 아깝잖아.”

    내 말에 아니타가 눈을 빛내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불쑥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작은 아가씨! 잘 먹을게요!”

    “방에 가서 편안히 먹어. 누가 빼앗으려 하거든 내가 아니타 너 혼자만 먹으라고 했다고 말하고.”

    “네!”

    밝은 얼굴로 대답한 아니타가 내게 다시 꾸벅 인사한 후 침실에서 나갔다.

    이제 정말로 나 혼자뿐이었다.

    밀려오는 피로에 그대로 침대에 몸을 실었다. 푹 잔다고 이 피로가 풀릴지 미지수였다. 그래도 어린아이의 몸이면 회복은 금방 되겠지…….

    생각을 마치고 눈을 감았다.

    [미라벨, 일어나 보렴.]

    “응?”

    느닷없이 비브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곤하다고 했지?]

    “응. 피곤하지. 가뜩이나 엘리엇과 대련한 후로는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걸.”

    나는 일어나지 않고 비브르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럼 신력을 사용해 보는 게 어떻겠니?]

    “신력을? 아!”

    나는 뒤늦게 비브르의 말을 이해하고 손을 들어 봤다.

    조그마한 손으로 신전에서 배웠던 것처럼 신력을 이끌어 내자 금세 허공에 밝은 빛무리가 떠올랐다.

    몇 번을 봐도 경이로운 현상이었다.

    이전에는 신력이라는 게 내게 생길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었기에 바로 신력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 신력으로 몸을 회복시킨다고 생각해.]

    비브르의 말대로 신력을 움직였다. 신력은 내가 원하는 대로 천천히 나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를 치료한다는 생각을 하자 곧 빛무리가 내 몸으로 쏟아졌다.

    마치 밝은 날 햇살이 내게 쏟아지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따뜻하고 온화한 기운이 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빛이 사라졌을 때는 내 몸에 남아 있던 피로감과 고통이 사라진 후였다.

    “우와!”

    신기한 마음에 탄성을 터트렸다.

    엘리엇과의 대련 이후로 무겁고 힘들었던 몸이 어느새 가뿐해졌다. 팔목에는 대련의 훈장으로 아릿한 고통이 있었는데 그것마저도 사라졌다.

    흡사 푹 휴식을 취하고 상쾌하게 일어난 상태 같았다.

    [신기하느냐?]

    “응. 엄청. 나한테 이런 힘이 있다는 게 아직도 안 믿어져. 이 정도의 신력이면 신전에 더 부탁하지 않고도 내가 직접 엄마를 치료할 수 있지 않을까?”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에 비브르를 향해 질문했다.

    [가능할 거란다.]

    비브르가 빠르게 긍정했다.

    당장이라도 옆 방에 계실 엄마에게 가려다가 뒤이어 들리는 비브르의 말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네 어머니가 앓고 있는 병이라면 조금 더 신력을 갈고닦은 후에 하는 게 좋겠구나. 너를 회귀시키며 보았던 병의 증세가 상당히 위중하던데, 신력을 좀 더 세심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될 때까지는 참으렴.]

    “신력이 이렇게 많은데도 안 되는 거야?”

    [부상은 이 방식으로도 치료가 되겠지만, 병은 달라. 단순히 신력을 퍼붓는 것만으로는 치료가 되지 않아. 사제들이 괜히 신력을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 줬으면 하는구나.]

    비브르의 첨언에 실망감을 감출 수 없어 그대로 들었던 손을 침대에 늘어트렸다.

    “그럼 됐어. 어차피 라이넬 사제님이 엄마를 봐주시고 있으니까.”

    라이넬 사제가 치료해 주는 동안 엄마의 병세가 악화될 일은 없을 테니 나도 굳이 발을 동동 구를 필요는 없었다.

    나는 침대에 제대로 자리를 잡고 누웠다. 푹신한 느낌에 여전히 기분이 좋았다. 몸도 가뿐해졌으니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새벽 일찍 눈이 떠졌다. 피로감이 없었기 때문에 일어나면서 조금도 부담이 없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새벽 4시였다.

    새벽마다 훈련을 하고는 있지만, 지금처럼 이른 시간은 아니었다.

    너무 일찍 일어났나 싶은 마음에 침대에 누워서 시간을 보낼까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른 새벽이었지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한다면 부지런히 수련을 해야 했다.

    몸을 먼저 푸는 게 좋을 것 같아 침실을 나섰다. 밖으로 나와 보니 복도는 고요하기만 했다.

    나는 손을 들어 신력을 손 위에 띄웠다.

    [뭘 하는 거니?]

    내가 뜬금없이 복도에서 신력을 사용하자 비브르가 내게 의문을 표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어두워서. 신력을 쓰면 밝더라고.”

    […….]

    내가 꺼낸 이유에 비브르는 작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딱히 내 행동에 제동을 걸지는 않았다.

    “너무 이른 새벽이라 사람도 없는데 뭐 어때.”

    [그래, 알겠다.]

    나는 한결 밝아진 복도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내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내 옷을 보관하는 드레스룸이었다.

    익숙하게 들어가 잠옷을 벗고 한쪽에 잘 개어 둔 다음에 내가 훈련할 때 입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처음에는 승마복을 주로 입었는데, 훈련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되었을 때, 몸을 사용하기 편한 훈련복을 새로 받게 되었다.

    가벼운 훈련복 차림으로 갈아입고 드레스룸을 벗어났다.

    이후로는 혹시나 사람들을 마주칠까 걱정되어 신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계단을 조심스럽게 밟아 내려가 도착한 곳은 저택의 후문이었다. 후문에서 곧장 우측으로 돌아가니 우리가 사용하는 연무장이 나왔다.

    나는 가볍게 목을 좌우로 흔들며 연무장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기합 소리가 연무장 중앙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핫! 핫!”

    희미한 달빛만 비추고 있는 연무장 안에서 검을 종으로 휘두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나보다는 좀 더 큰 키를 가진 남자아이. 엘리엇이었다.

    엘리엇도 나와 함께 브라이언에게 훈련을 받고 있었지만, 시간은 나와 동일했다.

    지금처럼 너무 이른 새벽에는 그 역시 꿈나라에 있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엘리엇?”

    내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를 부르자, 엘리엇이 휘두르던 목검을 내려놓은 채 나를 돌아보았다. 그는 조금 놀란 듯이 나를 보며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미라벨?”

    “응. 나야. 근데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설마 벌써부터 훈련하는 거야?”

    내가 챙겨왔던 손수건을 그에게 건네자 엘리엇이 받아들고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 내었다.

    “아, 응…….”

    엘리엇이 멋쩍은 듯이 어색하게 웃으며 내 눈치를 살폈다.

    “어제 몇 시에 잠들었는데 벌써 일어난 거야?”

    “열두 시인가?”

    “그럼 네 시간밖에 안 잔 거잖아. 괜찮은 거야?”

    “괜찮아. 더 강해지려면 더 열심히 해야지.”

    나는 엘리엇의 말에서 그가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 먼저 검술을 수련하고 있었던 건지 깨달았다.

    엘리엇은 어제 나와 대련한 후, 그게 내심 마음에 걸렸던 것 같았다. 어제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마음에 타격이 갔었나 보다.

    바보같이 그런 줄도 모르고 어제 브라이언이 기사 훈련을 제안해서 기뻐했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아무리 엘리엇이라고 하더라도 자기보다 한참 어린 동생이, 게다가 검을 배우기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은 동생이 자신을 이겼다는 게 꽤 충격이었을 터였다.

    “혹시 나…… 때문이야?”

    내가 미안함을 가득 담아 묻자 엘리엇이 두 손을 들어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진짜 아니야!”

    당황해서 부정하는 그의 얼굴에 나를 향한 질투나 미움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아니지, 완전히 아니라고 하진 못하겠구나.”

    뒤늦게 엘리엇이 멋쩍게 웃음을 터트렸다.

    “응?”

    “사실은 대련에서 지고 밤중에 잠이 안 오더라고. 그래서 계속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일찍 나왔어. 그러니까…… 지금보다 더 강해지고 싶어서.”

    “…….”

    나는 역시나 싶은 마음에 입술을 꾹 닫고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미안한 마음이 나도 모르게 반영되었는지 엘리엇이 난감한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 그래도 널 질투하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그럼?”

    엘리엇은 내 되물음에 뺨을 긁적이며 내 눈치를 살폈다.

    꼭 부끄럼타는 소년 같은 모습이었다.

    “내가 오빠잖아.”

    “뭐?”

    뜻밖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엘리엇은 민망한 듯이 고개를 돌려 먼 산을 바라보았다.

    달빛이 엘리엇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의 얼굴은 조금 붉게 물들어 있는 게 보였다.

    잠시 망설이던 엘리엇이 천천히 입을 떼었다.

    “내가 오빤데 너보다 약하면, 내가 널 지켜 줄 수가 없잖아. 그래서 수련 중이었어.”

    나는 엘리엇의 말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쑥스럽게 말하는 그의 모습이 제법 진지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널 지켜 주려면 적어도 내가 너보다는 강해져야 하니까. 그래서 새벽 일찍 나와서 수련하던 중이었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