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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43)화 (43/174)
  • 43화

    땀을 냈으니 먼저 씻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깨끗하게 씻고 옷까지 갈아입은 후에야 식당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작은할아버지는요?”

    나와 엄마가 돌아온 이후로 식사 자리에 빠지는 일이 없었던 다니엘이 오늘은 웬일로 보이지 않았다.

    다니엘을 작은할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정말 끔찍할 정도로 싫은 일이었지만, 가족들 앞에서 다니엘을 이름으로 부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작은할아버지’라는 호칭을 붙일 수밖에 없었다.

    “어서 오거라, 미라벨. 다니엘이라면 오늘 모임이 있어서 늦게 돌아온다고 하더구나. 녀석, 다니엘에게 정을 못 붙이더니 아니었던 모양이구나?”

    크라이튼 대공은 내가 그를 걱정하여 물어본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나를 귀여워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차마 아니라고 부정할 수가 없어 어색하게 웃었다.

    다니엘에게도 어느 정도 인맥이 있을 테니 모임이 있는 건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그래도 괜히 신경이 쓰였다.

    설마 그 모임이 악룡 크립소와 관련된 걸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건 좀 알아보는 게 좋겠구나. 혹시라도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

    내 의문을 캐치한 비브르가 내게 제안했다.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크라이튼 대공을 바라보았다.

    “무슨 모임이에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크라이튼 대공을 향해 묻자 크라이튼 대공이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구나. 한 달 중 보름만 되면 항상 모임이 있다고 나가 버리니. 오래전부터 그래왔어서 딱히 물어본 적이 없단다.”

    “오래전부터요?”

    “그래. 한 30년쯤 되었나? 그러고 보니 그 녀석 친구들과 만나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뭐, 다니엘도 일이 있지 않겠느냐?”

    크라이튼 대공은 웃으며 대답했다. 결국 크라이튼 대공도 모르는 것 같았다.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결국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었구나.]

    ‘어쩔 수 없지, 뭐. 할아버지도 모른다고 하시는데 더 캐물을 수도 없고.’

    나는 비브르의 근심에 대답했다.

    그사이에도 크라이튼 대공은 말을 계속 이어가고 있었다.

    “그래. 다니엘을 너무 나쁘게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 녀석이 입이 좀 험해서 그렇지, 속이 깊은 녀석이란다. 가끔 헛소리를 해도 이해해 주렴. 그리고 혹시 또 불쾌한 말을 하거든 내게 알려 주고.”

    다정하게 속삭이는 소리에는 다니엘을 향한 깊은 신뢰가 담겨 있었다.

    나는 가만히 크라이튼 대공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다니엘에게 배신당해 죽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당장 최근에 있었던 일을 떠올려도 그랬다.

    엄마가 보낸 편지를 계속 빼돌려 끝끝내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없애 버린 장본인이 다니엘이었는데.

    “그래, 이제 다 모인 것 같으니 식사하자꾸나.”

    크라이튼 대공의 말이 끝나고 곧 식사가 준비되기 시작했다.

    다니엘도 없겠다, 괜히 신경 곤두세울 필요 없이 식사를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미라벨은 검술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즐겁게 이어지던 저녁 식사 자리에서 뜬금없이 브라이언이 말했다.

    갑작스러운 얘기에 식사 자리에 모인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나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브라이언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냐, 브라이언?”

    궁금해하는 모든 사람들을 대표해서 크라이튼 대공이 브라이언을 향해 물었다.

    브라이언은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꺼내었다.

    “오늘 황태자 전하께서 오신 것을 아십니까?”

    “알지. 황후 폐하께서 오시는 길에 동행하셨다고 하더구나.”

    크라이튼 대공은 확인을 위해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미라벨을 보러 왔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미라벨이 오늘 듀아나 신전에 가느라…….”

    “미라벨이 안 그래도 오후에 돌아와서 황태자 전하를 뵈었단다. 그러고는 연무장으로 찾아오더구나.”

    브라이언의 입에서 웃음이 사라질 새가 없었다. 나는 괜히 나한테 모여드는 시선이 민망해서 조용히 물만 마셨다.

    “왜 왔냐고 물으니 황태자 전하와 미라벨이 대련을 하러 왔다고 하지 뭐니?”

    “황태자 전하랑 미라벨이?”

    “예, 대공 각하.”

    “미라벨은 검을 배운 지 얼마 안 되지 않았느냐?”

    “맞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황태자 전하를 단 일 합에 이기고는 우리 엘리엇하고 대련해서 이기기까지 했지 뭡니까?”

    “맞아요! 저도 진짜 놀랐어요. 아까 저한테서 목검을 빼앗더니 그대로 검을 확!”

    브라이언에 이어 엘리엇마저 연무장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느라 흥분해 있었다.

    나는 그래도 엘리엇이 나와 벌였던 대련에서 졌으니 조금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조금도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그때 상황을 설명하는 게 꽤 즐거워 보이는 듯했다.

    “정신을 차려보니까 어느 순간 목검이 제 목에 닿아 있더라고요. 정말 대단했어요.”

    엘리엇의 신난 목소리에 크라이튼 대공이 허허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엘리엇. 분하지는 않더냐?”

    내가 묻고 싶었던 바를 크라이튼 대공이 콕 집어 물어 주었다.

    조심스럽게 엘리엇의 눈치를 살피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전혀요. 오히려 즐거운걸요. 왜냐하면 다들 무식하게 강하던 이 대공가에서 제 경쟁자라고 할만한 상대가 생긴 거잖아요. 그동안 봐주는 사람들 때문에 얼마나 분했는지 몰라요.”

    엘리엇은 자신이 왜 즐겁다고 표현했는지를 설명했다. 나는 그제야 엘리엇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비슷한 실력을 가진 선의의 경쟁자가 생겨 기쁜 것이었다. 물론 오늘의 경기는 내가 돌발 행동을 해서 정석적인 검술만 배워왔던 엘리엇이 대처하지 못한 것이었다. 아마도 엘리엇이 조금만 더 경험을 쌓는다면 이런 꼼수는 통하지 않을 터였다.

    크라이튼 대공은 엘리엇의 부연설명에 더욱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미라벨이 정말 엘리엇을 이기긴 했나 보구나.”

    “그렇다니까요? 체력 훈련을 시작한 지 이제 한 달도 채 안 된 애송이가, 심지어는 검을 쥐어 본 것도 오늘로 사흘밖에 안 되었는데 엘리엇과 황태자 전하를 상대로 이겼다니까요? 게다가 들어 보니 가일에게 검술을 배운 것도 아니라고 하더군요.”

    “그렇지. 가일은 벨이 더 어릴 때 갔으니까……. 그때 벨은 너무 어려서 검을 잡는 게 뭔지도 몰랐을 거야. 가일이 기사라는 것도…….”

    엄마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브라이언은 아차 싶은 마음에 잠시 대답하길 망설였다.

    “그래도 미라벨이 며칠 안 됐는데 벌써 재능을 보인다니 기쁜걸? 가일도 이 사실을 알았다면 기뻐했을 거야.”

    엄마가 뒤늦게 밝게 이야기하자 브라이언이 내심 안도한 얼굴로 말했다.

    “일반적인 검술 재능이라고 생각하진 않아. 엘리엇도 검술에 있어서는 제법 재능이 있거든. 날 닮아서.”

    말을 마치며 브라이언이 엘리엇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아버지, 머리 망가진다고요!”

    “어차피 저녁이라 씻을 건데 뭔 상관이냐?”

    “그래도요!”

    칭얼거리는 엘리엇을 가늘게 뜬 눈으로 노려본 브라이언이 돌연 엄마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말인데 코넬리아.”

    “응?”

    갑작스러운 부름에 당황한 엄마가 눈을 크게 떴다.

    “미라벨이 본격적으로 검을 배운다면 분명 나보다도 훨씬 뛰어난 기사가 될 게 틀림없어.”

    “숙부님, 그 정도까지는…….”

    점점 과장되어가는 브라이언의 말에 난감해하며 그를 만류하려 했다. 그러나 브라이언은 그런 나를 보며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니, 미라벨. 이 숙부는 기사로서 눈이 제법 정확하단다. 네가 처음 황태자 전하의 허점을 만들기 위해 삐끗한 척 발을 디딘 것도, 그리고 엘리엇의 목검을 날려 버린 것도.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가 할 수 있을 만한 것은 아니야. 그건 말하자면…… 센스의 영역이지. 그런 센스는 키운다고 해서 생겨나는 게 아니야. 그리고 넌 그걸 타고났지.”

    잠시 물을 마셔서 마른 입을 축인 브라이언이 다시금 엄마를 바라보았다.

    “코넬리아, 미라벨에게 기사 훈련을 시키고자 하는데 괜찮겠니?”

    브라이언이 부탁하듯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는 조금 당황한 기색으로 브라이언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러더니 조금의 시간이 지나 나를 돌아보았다.

    “미라벨, 넌 어떠니?”

    “저요?”

    “그래. 오빠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슨 말인지 알았어. 미라벨에게 검술 재능이 뛰어나다는 말이지?”

    “그래. 그것도 아주 천부적으로.”

    엄마는 브라이언의 말에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난 미라벨이 하고 싶지 않다면 굳이 시키고 싶지 않아. 오빠도 알잖아. 하고 싶지 않은 걸 억지로 하다 보면 사람이 얼마나 불행해지는지. 게다가 기사 훈련은 아주 힘들다고 알고 있어. 그러니 난 우리 벨이 하고 싶지 않다면 그냥 이 정도로 만족할래.”

    브라이언은 엄마의 말에 수긍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미라벨, 넌 어떠니? 나도 네 엄마와 같은 생각이다. 생각해 보니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너에게 강요하지 않으마. 기사 훈련을 하지 않겠다고 해도 네가 원한다면 검술 훈련이나 체력 훈련은 계속 진행하도록 할 테니 부담은 갖지 말고 천천히 생각해 보렴.”

    조금 전까지 기사 훈련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던 것이 무색하게도 이전보다 누그러진 음색이었다.

    염려와 달리 나는 브라이언이 직접 지도해 주는 기사 훈련을 꼭 받아 보고 싶었다. 내 미래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이 대공가를 위해서라도. 일단은 힘을 키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만일의 사태가 벌어질 경우에 내가 직접 다니엘을 죽일 수 있도록.

    “저는 해 보고 싶어요. 숙부님께 꼭 기사 훈련을 받아 보고 싶었어요!”

    내가 빙긋 웃으며 대답하자 잠시 식당 내에 침묵이 흘렀다.

    그 후 곧 브라이언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었다.

    “잘됐다. 정말 잘 생각했다, 미라벨!”

    마치 춤이라도 출 듯이 기뻐하는 브라이언의 모습에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나 역시 그들의 웃음소리를 따라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저녁 식사가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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