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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42)화 (42/174)

42화

엘리엇은 검을 들고 있었음에도 대련에 영 집중하지 못하는 듯했다.

눈치를 살펴보니 나와 대련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하긴, 엘리엇으로서는 브라이언의 제안이 뜬금없게 느껴졌을 테니 그럴 법도 했다.

나는 아주 잠시 브라이언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엘리엇을 주시했다.

브라이언은 내가 에이드리안과 대련에서 넘어질 뻔했던 것이 단순히 발을 삐끗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엘리엇과 대련을 해 보라고 시킨 거겠지.

에이드리안은 아직 어리고 경험이 없어서 통했지, 만일 검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다면 오히려 내가 역으로 공격당했을 터였다.

확실히 브라이언 정도의 실력자가 그런 허술한 잔꾀를 파악하지 못할 리가 없지.

차라리 다행이다. 이전과 달리 기초부터 확실히 다지며 배우는 것도 좋았지만, 내가 브라이언에게 받고 싶은 건 지금의 내 상태에서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길이었다.

여기서 내가 엘리엇을 상대로 최선을 다한다면, 브라이언도 내 현재 상태에 대해서 재고해 주지 않을까?

“미라벨, 네가 먼저 와.”

계속해서 나를 주시하던 엘리엇이 내게 말했다. 선수를 내게 양보해 주겠다는 말이었다.

“그래도 되겠어?”

“당연하지.”

엘리엇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의 높은 자신감을 속으로 칭찬하며 먼저 그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내가 든 목검의 끝이 엘리엇의 왼쪽 목을 노리고 들어갔다. 엘리엇은 발을 뒤로 빼며 몸을 뒤로 젖혀 내 목검을 피했다. 그러는 것과 동시에 다시 앞으로 발을 내디디며 목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가까워진 거리에 자칫 그의 목검에 다칠 뻔했지만, 내밀었던 목검을 회수하여 그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윽!”

그러나 엘리엇의 힘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강한 듯했다. 목검을 쥐고 있는 손에 타격감이 전달되며 근육이 욱씬욱씬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검을 놓지 않고 그대로 전신을 이용해 엘리엇을 밀쳐냈다. 그 탓에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난 엘리엇은 눈을 크게 뜬 채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미라벨 너…….”

“엘리엇, 기왕이면 최선을 다해 줘.”

당황해하는 그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엘리엇은 나와 대련하는 것을 영 안 내켜 했던 것도 있고, 무엇보다 내가 검을 잡은 지 이제 사흘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와 진지하게 겨룰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렇지만 지금은 다를 터였다.

단 일 합으로도 알 수 있겠지.

내가 단순하게 검을 휘두르는 사흘짜리 애송이가 아니라는 것쯤은.

브라이언에게 내 실력을 제대로 보이려면, 엘리엇이 나와 제대로 겨루어 주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내 실력을 내보이지 못할 테니까.

그러면서도 뒷덜미가 조금 오싹오싹하기는 했다. 엘리엇의 힘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더욱 무겁고 강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어린 나한테는 좀 무리인 상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번에는 진심이야. 조심해.”

엘리엇이 뒤로 물러나더니 자세를 바꾸었다. 설렁하게 검을 들고 있던 아까와는 달리 진지한 모습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표정도 진지해졌다.

나 역시 엘리엇과 마찬가지로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는 엘리엇의 자세에서 틈을 찾기 위해 집중했다.

그 순간, 엘리엇이 검을 들고 나를 향해 빠르게 쇄도하기 시작했다.

왼쪽 아래 끝에서부터 날카롭게 올라오는 목검을 몸을 틀어 피한 후 빠르게 엘리엇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목검의 손잡이를 세워 그의 손목을 쳐올렸다. 하지만 엘리엇이 이를 간파하고 다급히 손을 회수하는 바람에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다.

아쉬움을 느낄 새도 없이 엘리엇이 뒤로 뒷걸음질 친 다음에 곧장 내 검을 쳐올렸다.

무겁고 날렵한 공격에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다. 게다가 기우뚱거리며 몸의 균형이 어그러진 탓에 뒤로 넘어갈 상황에 처했다. 나는 엉덩방아를 찧는 대신 재빨리 몸을 뒤로 굴렸다.

흙바닥에서 볼품없이 구르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인해 엘리엇에게 지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바로 몸을 일으켜 세운 후 엘리엇에게서 조금 멀어졌다.

엘리엇은 여전히 집중한 얼굴로 나를 주시하다가 다시 높은 기합 소리와 함께 달려들었다.

종으로 내리긋는 공격을 막기 위해 목검을 위로 올려 쳤다. 두 손으로 잡고 버티고 있음에도 손목이 아릿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통증을 참아내느라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그에게 더욱 가까이 붙은 후 어깨로 그를 밀쳐냈다. 주춤하는 엘리엇의 목검 날 부분을 잡아채었다.

아차 하는 사이에 몸을 뒤로 굴려 그에게서 목검을 빼앗았다. 진검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테지만, 목검이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엘리엇 역시 이런 행동을 짐작하지 못했는지 크게 당황한 모습이었다.

검을 최대한 멀리 던져 버린 나는 그대로 바닥을 굴러 엘리엇의 밑으로 다가갔다. 마침내 엘리엇의 아래에 도착한 순간, 검을 아래에서 위로 휘둘렀다.

“헉!”

엘리엇은 순식간에 목에 닿은 검에 놀라 헛숨을 들이쉬었다.

“그만!”

대련이 이 이상 이어질 수 없다고 판단한 브라이언이 대련의 중지를 외쳤다.

나는 엘리엇의 목에 대고 있던 목검을 회수하고 목검을 지팡이 삼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엇은 그제야 길게 숨을 내쉬며 손을 들어 목을 살폈다.

“미라벨 승.”

브라이언은 놀란 엘리엇을 향해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과연 엘리엇을 이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진짜였구나.”

브라이언이 희미하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아니에요. 운이 좋았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진검이었으면 제가 엘리엇한테 졌을 거예요.”

아직도 손바닥과 손목, 그리고 어깨에 울리는 찌릿거리는 느낌에 소름이 다 끼칠 정도였다.

엘리엇과 체급 차이가 날 것은 미리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엘리엇의 힘이 강했다.

역시 어려서부터 훈련한 것을 감안해야 했던 것 같다.

“혹시 가일에게 검을 배운 적 있니?”

“아버지께요?”

“그래.”

“아니요.”

내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자 브라이언이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수긍했다.

“하긴, 체계적이지는 않았으니까.”

“네?”

“응? 아, 아니다. 여하튼 엘리엇을 상대로도 잘 싸웠구나. 잘했다, 미라벨.”

브라이언이 칭찬의 의미로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더니 눈을 가늘게 좁히고 엘리엇을 확인했다.

“엘리엇, 넌 열두 살이나 되어가지고 아홉 살인 미라벨에게 져서 쓰겠느냐?”

한심해하는 목소리에 엘리엇이 억울하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가 이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됐습니까? 저도 미라벨한테 져서 분하거든요?”

흥,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팩 돌린 엘리엇이 흘긋 나를 살폈다. 그러더니 나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어 내 어깨를 가볍게 도닥거렸다.

“어쨌든 미라벨, 대단한데? 마지막에 목검을 그렇게 잡아당길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근데 생각해보면 실제 전투 중에는 이것보다 더 많은 변수가 생기겠지?”

“그럴 거다.”

엘리엇의 질문에 대답한 건 브라이언이었다. 엘리엇은 샐쭉 브라이언을 노려보았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미라벨, 그런 행동은 가급적이면 하지 마. 지금이야 목검이니 다칠 일이 없었다지만, 진짜 검이었으면 손가락이 남아나지 않았을 거야.”

“응. 명심할게.”

“그래, 뭐, 물론 그런 일이 없어야 하겠지만.”

작게 중얼거린 엘리엇이 크게 숨을 들이쉬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다음에는 안 질 거니까 각오해.”

“나도! 나도 안 질 거야!”

엘리엇의 다짐에 에이드리안까지 가세했다. 두 아이들이 손을 들며 다짐하는 모습이 매우 귀여웠다.

나는 두 사람을 보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래. 기대할게.”

그 순간, 기사들이 있는 방향에서 ‘우와아’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갑작스러운 함성에 놀라 어깨를 움츠리자 브라이언이 기사들을 향해 매서운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 너희들 때문에 우리 조카가 놀라잖아! 당장 조용히 해!”

박력을 담아서 외치는 소리에 금세 기사들의 함성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작님! 아무리 소공자님을 상대로, 같은 어린이로서 게다가 검을 잡은 지 며칠 되지 않은 우리 소공녀님께서 승리를 거뒀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맞아요! 천재가 탄생한 거 아닙니까!”

“배운 적도 없는데 그런 거면 천재지. 암, 천재야.”

기사들은 브라이언을 향해 자신들이 함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꺼내기 시작했다.

왠지 멋쩍은 기분에 웃고 있으니 기사들이 다시금 환호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슬며시 브라이언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피어나는 게 보였다.

그러나 금세 미소를 지운 브라이언이 기사들을 향해 다시 외쳤다.

“당장 자리로 복귀하지 않으면 오늘 심야 훈련도 있을 줄 알아.”

“우우……. 알겠습니다.”

작게 야유를 내뱉은 기사와 병사들은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가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놀랐지?”

브라이언이 걱정을 담아 내게 물었다.

“조금요. 그래도 괜찮아요.”

어깨를 으쓱 추어올리니 브라이언이 다시금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때였다.

“황태자 전하!”

멀리서 시종 한 명이 연무장 안으로 다가왔다.

“왜 그래?”

에이드리안이 고개를 돌려 시종을 확인하자 시종이 에이드리안과 우리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런 후에야 입을 열었다.

“황후 폐하께서 돌아가신다고 하십니다.”

“벌써?”

“벌써라니요? 시간이 늦었습니다. 오늘 오후 수업을 모두 미뤄 놓았는데 이대로라면 새벽까지 하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시종의 말에 에이드리안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미라벨, 그럼 나는 이만 갈게.”

“네, 들어가세요.”

“다음에는 내가 꼭 이길 거야.”

주먹을 쥐면서까지 다짐하는 에이드리안을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에이드리안이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브라이언과 엘리엇도 함께였다.

그리고 이내 에이드리안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브라이언이 나와 엘리엇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곧 저녁 식사할 시간이구나. 가지 않으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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