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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40)화 (40/174)

40화

처음에는 내가 잘못 보았나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진짜 에이드리안이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황태자 전하?”

불쌍하게 쭈그려 앉아 있는 에이드리안을 불렀다.

“응?”

그러자 에이드리안이 귀가한 주인을 만난 강아지처럼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여기는 무슨 일이세요?”

에이드리안이 크라이튼 대공가에 올 일이 있던가?

뭐, 이유가 아주 없지는 않을 터였다.

어쨌든 황족도 귀족들과 종종 교류하는 실정이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궁금한 건 왜 에이드리안이 다른 곳도 아니고 정원 앞에서 멍하니 있었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용무가 있다면 이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누군가를 만나든 담소를 나누든 하고 있어야 맞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에이드리안은 내 질문에 바닥을 보며 우물쭈물했다.

대체 그가 왜 이러는지 몰라서 그를 보필하는 시종을 바라보았다.

시종이 에이드리안의 눈치를 살피며 내게 상황을 설명했다.

“황후 폐하께서 공녀님을 만나러 오시는 길에 동행하셨습니다. 소공녀님을 만나 뵙길 원하셔서요.”

시종이 전해 준 뜻밖의 상황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나를?”

“예. 소공녀님을요.”

왜 나를 만나러 왔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에이드리안이 내 손님이라는 사실은 확인했다.

“혹시 무슨 볼일이 있어서 오신 거예요?”

“아니, 그냥 미라벨 네가 보고 싶어서. 우리 친구잖아.”

내 질문에 에이드리안이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루비를 닮은 그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었다.

나는 귀여운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오실 거였으면 미리 연락을 주지 그러셨어요. 그랬으면 이렇게 기다리게 하지 않았을 텐데요.”

나는 에이드리안을 향해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에이드리안은 내가 내민 손을 한참이나 바라보기만 했다.

“곧 마차가 떠날 거라 거기 앉아 계시면 먼지 마셔요. 일어나세요.”

이대로 있으면 계속 바라만 볼 것 같아서 제안했다. 에이드리안은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를 깜빡거리다가 이내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나는 힘을 주어 에이드리안을 일으켜 세웠다.

“읏차!”

아무리 에이드리안이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리고 체구가 작다고 하더라도, 나 역시 고작 아홉 살짜리 여자애였기 때문에 에이드리안을 일으키는 데엔 많은 힘이 들었다.

그래도 무리 없이 일어난 에이드리안을 보며 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제 손을 놓을까 하는데 에이드리안이 내 손을 놓아 주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에이드리안의 손을 잡은 채로 그를 이끌었다.

“안으로 들어가시겠어요? 주방에 일러 다과를 내오라고 할게요.”

“혹시 머랭 쿠키도 돼?”

“머랭 쿠키요? 글쎄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에이드리안의 질문에 몸을 돌려 칼리나를 돌아보았다.

“칼리나, 머랭 쿠키가 될까?”

“예, 될 거예요.”

“그럼 주방에 말해서 준비해 달라고 해 줘.”

“예, 작은 아가씨.”

칼리나가 주방으로 향했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에이드리안을 바라보았다.

“된다고 하네요. 말해 놨으니까 들어가 있으면 나올 거예요.”

“응. 고마워.”

에이드리안의 손을 잡은 채로 안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메인 응접실은 그럼 엄마랑 황후 폐하께서 쓰시겠네?”

“예, 작은 아가씨.”

주변에서 대기하던 하녀가 내 물음에 대답했다.

메인 응접실로 가는 것도 좋은 선택이었지만, 굳이 엄마와 황후 폐하께서 담소를 나누시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일단 제 방으로 가실래요?”

“미라벨 네 방으로?”

“네. 싫으시면 다른 응접실로 들어가도 되고요.”

“아냐. 난 좋아.”

“그래요, 그럼.”

에이드리안을 대동한 채 계단을 올라 마침내 내 방 앞에 도달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실내가 나왔다.

에이드리안은 그제야 내 손을 놓아 주었다.

나만큼이나 작은 손으로 어찌나 악력이 센지 몰랐다.

“일단 이쪽에 앉으세요.”

방 한쪽에 마련된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내가 가리킨 자리 그대로 가서 착석했다. 나도 에이드리안의 맞은편에 몸을 실었다.

푹신하고 부드러운 소파에 앉으니 피로가 좀 풀리는 기분이었다.

신력을 제어하는 법을 배우느라 시간을 보내고, 고급 마차라 승차감이 좋기는 했지만, 어쨌든 움직이는 마차 안에서 또 한참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피로가 물밀듯이 밀려오는 듯했다.

그래도 소파는 고급이라 그런지 몸을 포근히 받쳐 줘서 꼭 잠이 올 것만 같았다.

“미라벨 너 어디 아파?”

내가 소파 등받이에 볼품없이 기대어 있으니 에이드리안이 놀라서 내게 물었다.

뒤늦게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메이너드 자작 부인에 배운 것처럼 몸을 바르게 했다.

“아니에요.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랬어요. 그래서, 황후 폐하 따라서 저를 만나러 오신 거예요?”

“응! 친구잖아. 어머니께서 친구를 만나러 여기 오는 길이어서 나도 친구를 만나러 온 거야.”

해맑게 대답하는 에이드리안을 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언제 이렇게 가까워졌나 모를 정도로 사교성이 좋은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두 번째로 만난 무도회에서는 내게 친구가 되자고 했었지.

그때를 생각하면 웃음이 났다.

첫인상은 그렇게 좋지 않았는데 또 뭐가 좋다고 다음에 만났을 때는 친구가 되자고 한 건지.

“근데 어디 갔었어? 없어서 한참이나 기다렸는데…….”

“듀아나 신전에 다녀오는 길이에요.”

“신전은 왜?”

에이드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볼일이 있어서요.”

“볼일이 뭔데? 신전에 볼일이 있어? 난 한 번도 그런 적 없는데.”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 이상 자세하게 말할 내용은 아니기 때문에 화제를 전환할 만한 게 필요했다.

“그러고 보니 황태자 전하께서도 저희 숙부님한테 검술 훈련을 받으시죠?”

“맞아! 배우고 있어. 매일매일 검술 훈련 시간만 기다리는걸? 다른 공부 시간은 다 따분하고 지루해서…….”

다른 공부 시간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지루한지 에이드리안이 진저리를 쳤다.

“저도 숙부님한테 검술을 훈련받고 있어요.”

“뭐? 미라벨 너도?”

“네. 황태자 전하나 엘리엇처럼 오래 배우지는 못했지만요.”

“신기하다. 너도 검을 배우는구나.”

두 눈을 깜빡거리는 게 그래도 그 나이대의 어린애 같은 모습이라 제법 귀여운 면이 있었다.

“그럼 나랑 대련해 볼래?”

“대련이요?”

“응. 나랑 비슷한 나이 중에서 검을 쓸 줄 아는 건 그나마 엘리엇뿐인데, 엘리엇은 너무 강해서…….”

아무래도 엘리엇은 에이드리안보다 검을 배운 기간이 길기도 했고, 나이 차이도 꽤 되었기 때문에 상대가 되지 않을 터였다.

그건 나도 짐작으로 알 수 있었지만, 에이드리안이 내 상대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어려지기 전부터도 검으로 먹고산 기간이 길었다.

그런 내가 아무리 어려졌다고 해도 에이드리안 하나 이기지 못할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에이드리안은 나보다 두 살이나 어렸다. 당연히 체격도 내가 더 큰 편에 속했다.

“후회하실 텐데요?”

“왜 후회해?”

“제가 이길 거니까요.”

당연하다는 듯이 꺼낸 말에 에이드리안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기 전엔 모르는 일이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괜찮으시면 진짜 대련이라도 해 보실래요?”

나야 지금 내 체력으로 어느 정도가 되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에 마다할 필요가 없었다.

에이드리안은 내가 도발하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도 연무장 있지?”

“그럼요. 안내해 드릴게요.”

소파에서 일어나 침실을 나섰다. 에이드리안은 내 뒤에서 씩씩거리며 따라오고 있었다.

“근데 머랭 쿠키 안 드셔도 돼요?”

“대련하고 먹으면 되지!”

“뭐, 그래도 되겠지만.”

나야 상관없는 일이었기에 그를 데리고 익숙하게 걸어가 연무장에 도착했다.

연무장에는 크라이튼 대공가의 기사와 병사들이 열심히 수련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지나쳐 나와 엘리엇이 항상 수련하는 안쪽 연무장에 도착했다.

연무장에는 브라이언과 엘리엇이 있었다. 두 사람은 검을 겨누고 있었는데, 당연하게도 엘리엇이 브라이언을 이길 리가 없었다.

공격이 막힐 때마다 비어 있는 곳을 가볍게 터치하는 것으로 브라이언이 엘리엇의 검술을 봐주고 있었다.

우리의 걸음 소리를 들은 브라이언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우리를 발견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미라벨? 황태자 전하?”

“흐앗!”

그 사이를 노려 엘리엇이 브라이언의 왼쪽 옆구리를 노렸지만, 애석하게도 브라이언은 보지도 않고 엘리엇의 공격을 목검으로 막아내었다.

“일단 여기까지 하자꾸나, 엘리엇.”

“네, 아버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인 엘리엇이 마침내 시선을 돌려 우리를 확인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황태자 전하?”

엘리엇도 에이드리안이 크라이튼 대공가의 연무장을 찾은 것이 의아했는지 에이드리안을 향해 물었다.

에이드리안은 짧은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가 두 사람 앞에 섰다.

“미라벨도 검을 배운다고 들었네.”

“예, 그렇죠. 얼마 안 되긴 했지만.”

엘리엇이 대답하며 나와 브라이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래서 미라벨이랑 대련하려고.”

“예?”

“뭐라고요?”

어느 것을 고를지 목검을 고르고 있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엘리엇과 브라이언이 크게 놀라며 물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황태자 전하, 미라벨은 이제 목검을 잡은 지 사흘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미라벨과 무슨 대련을 하시겠다고 그러십니까?”

“맞습니다, 황태자 전하. 말도 안 되는 주장이십니다. 차라리 제가 상대가 되어 드리죠.”

브라이언과 엘리엇이 차례로 에이드리안에게 따지듯 말했다.

“안 돼? 하지만 미라벨은 된다고 했는데?”

극렬한 두 사람의 말에 되레 놀란 에이드리안이 어깨를 움츠리며 물었다.

“무슨 말이야, 미라벨? 네가 황태자 전하랑 대련하겠다고 했다고?”

엘리엇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에이드리안이 헛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아니면 그러길 바라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나는 두 팔을 허리에 올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제가 대련하겠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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