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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38)화 (38/174)
  • 38화

    사제들이 순서를 지켜 회의장을 나가고, 마지막까지 안에 남은 사람은 플레온 사제와 라이넬 사제, 그리고 나와 바론 대주교뿐이었다.

    “성녀님.”

    “네?”

    바론 대주교의 부름에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성녀님께도 이제는 신력이 느껴집니다. 그것도 아주 충만한 정도로요. 이미 사용하는 방법을 아실지도 모르지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희가 성녀님께 신력을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 가르쳐드려도 되겠습니까?”

    바론 대주교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안 그래도 내가 처음 신전을 찾게 된 계기가 신력 때문이었다.

    신력을 사용하여 치료할 수 있는 힘을 얻길 원했으니까.

    엄마를 낫게 해 주고 싶다는 마음이었지만, 그 외에도 신력이 갖고 있는 치유의 힘은 생각보다 쓸 곳이 많았다.

    나는 꿈인 듯 바론 대주교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네. 오히려 제가 더 부탁드리고 싶은 말이에요. 외람되지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성녀님께서 신력을 사용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저희는 저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겁니다.”

    바론 대주교는 말을 마치고 인자하게 웃었다.

    “매주 시간을 정해서 라이넬 사제를 만나러 오십시오. 우리 신전에서는 현재 라이넬 사제가 신력을 다루는 능력이 제일 뛰어납니다. 그에게서 배우면 금세 능력을 사용하는 법을 익히게 될 겁니다.”

    내가 놀라고 있을 때, 바론 대주교가 라이넬 사제에게 말했다.

    “라이넬 사제, 그대가 성녀님께 신력을 운용하는 법에 대해 알려드리도록 하게.”

    “예, 영광입니다.”

    라이넬 사제는 기꺼이 바론 대주교의 명령에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라이넬 사제님만 괜찮으시면 오늘부터 할 수 있을까요?”

    “오늘부터요?”

    “네. 괜찮으시면요. 굳이 다음으로 미룰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요.”

    내가 눈을 반짝이며 답하자 라이넬 사제가 부드럽게 웃었다.

    “예, 그럼 그리하겠습니다. 회의실에서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으니 자리를 옮기는 게 좋겠습니다.”

    라이넬 사제는 함께 가자는 의미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런 라이넬 사제의 손을 잡았다.

    내가 손을 잡자 라이넬 사제가 나를 이끌고 어딘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회의장에서 라이넬 사제의 손을 잡고 나오자,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칼리나와 아니타가 나를 보며 반색했다.

    “괜찮으셨어요?”

    아니타가 내게 물었다. 듀아나 여신의 신전 회의실에서 무슨 일이 생길 일은 없었지만, 아니타가 나를 걱정해 주는 게 고마워서 나는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응. 괜찮아. 나 기다리느라 지루했지?”

    “아니에요. 저희는 괜찮아요.”

    대답은 아니타 대신 칼리나가 했다. 아니타가 멋쩍은 듯이 뺨을 긁적이는 것으로 보아 좀 지루했던 듯했다.

    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어린 아니타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근데 아직 할 일이 남았어. 아니타, 칼리나. 지루해도 조금만 참아 줘.”

    “네, 작은 아가씨.”

    “그럼요. 저희는 걱정하지 마세요.”

    두 사람의 대답을 들은 후 곧장 라이넬 사제와 함께 이동하기 시작했다.

    [신력을 어느 정도 운용하게 된다면, 나 역시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겠지. 그때가 기다려지는구나.]

    ‘뭐? 자유로워진다고?’

    지나가듯 언급한 비브르의 말에 의아함을 표했다.

    내가 신력을 운용할 수 있게 된다면 수호룡인 비브르의 봉인까지도 풀 수 있다는 말일까?

    ‘악룡 크립소의 봉인을 푸는 것처럼?’

    [아니, 그건 아니란다. 오해가 있는 것 같구나. 내가 자유로워진다는 건 봉인이 풀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작은 펜던트에서 나와 움직일 수 있게 된다는 의미란다.]

    비브르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게는 두 말의 의미가 동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오는 거랑 봉인이 풀리는 거랑은 다른 거야?’

    [그래. 엄밀히 말하자면 지금 이 펜던트에 들어가 있는 나는 사념체일 뿐이란다. 내 몸은 이곳이 아닌 세계 정수의 아주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지. 그러니 내 봉인을 푸는 건 내 몸을 찾기 전까지는 할 수 없는 거란다.]

    부연하는 비브르의 말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요컨대 이 펜던트에는 비브르의 몸이 봉인되어 있지 않다는 말이었다.

    [만일 미라벨 네가 신력을 운용하는 데 능숙해진다면, 펜던트 속의 사념체로 존재하는 나를 구체화할 수 있을 게다. 그럼 굳이 펜던트를 통해 대화를 나눌 필요도 없겠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과연 펜던트 속의 비브르가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확실히 신력을 운용해서 구체화할 수 있으면 좋겠네. 이 펜던트는 나중에 성인이 되고 난 후에 하기에는 조금…… 유아스러우니까.’

    손을 들어 펜던트를 매만졌다. 하트 모양에 양쪽으로 날개가 달린 귀여운 펜던트였지만, 확실히 아이가 할법한 디자인이었다.

    ‘근데 플레온은 비브르 너와 대화하기 위해서 펜던트를 목에 걸고 다녔던 거야? 나처럼?’

    문득 노인의 모습을 한 성자 플레온을 떠올렸다. 성자일 당시의 플레온은 지금 이 신전에 있는 플레온보다도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내게는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그런 그가 날개 달린 하트 모양 펜던트를 목에 걸고 있는 모습은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았다.

    [펜던트니까 당연히 목에 걸어야 하지 않겠니? 나를 실체화하는 데 성공하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란다.]

    비브르가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이 내게 물어보았다.

    그 물음을 듣는 순간, 나는 플레온이 성자로 있는 내내 이 펜던트 목걸이를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성자님이 이런 귀여운 목걸이 하고 있었다니. 너무 안 어울리는데…….’

    왠지 상상이 잘 가지 않아서 지금의 플레온이 펜던트를 하는 모습을 떠올리다가 이내 가볍게 고개를 털었다. 괜히 이상한 상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내가 하도 이상한 행동을 보이니 라이넬 사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보았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나는 라이넬 사제를 향해 별일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라이넬 사제의 손을 잡고 도착한 곳은 훈련장이었다.

    많은 성기사와 사제들이 무리를 이루어 훈련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라이넬 사제는 그대로 훈련장을 지나쳐 문이 굳게 닫힌 곳에 나를 안내했다. 그곳 역시 훈련장이었는데 조금 전 개방되어 있던 곳과 달리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미라벨 님께서는 앞으로 여기서 훈련을 진행할 겁니다.”

    “여기서요? 그럼 앞으로 여기로 오면 되나요?”

    “네. 아무래도 이곳이 조용하다 보니 미라벨 님께서 신력을 운용하시기 편할 겁니다.”

    나는 그의 설명에 천천히 훈련장 내부를 돌아보았다.

    알 수 없는 기운으로 둘러싸인 돔 모양의 훈련장이었다.

    안과 밖을 연결해 주는 건 스테인드글라스였고, 듀아나 여신님의 조각상이 훈련장 중앙 허공에 양각되어 있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손을 앞으로 내밀어 보시겠습니까?”

    라이넬 사제가 시키는 대로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손끝에 닿는 이 느낌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말을 마친 라이넬 사제가 내 손에 기운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하얀빛을 내뿜는 신력이 내 손끝에 어리었다.

    이미 일전에 느껴 본 적이 있는 감각이었다.

    제프리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던 그때, 내 손에서 이런 따듯한 빛이 나왔었다.

    “미라벨 님의 체내에도 이런 따뜻한 신력이 존재할 겁니다. 이 느낌을 익히셨다면, 몸에서 그런 기운이 맴돌고 있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처음부터 찾는 건 쉽지 않을 테니 천천히 느껴 보시기를 바랍니다.”

    라이넬 사제의 말대로 최대한 몸에서 그런 기운을 찾으려 했지만, 좀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과거로 돌아온 직후에도, 지금에도 내 몸의 뭔가가 달라진 것 같지는 않았기에 내 몸에 있는 신력을 느끼는 것은 내게 너무 난해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이전에 제프리를 치료해 주었던 것을 떠올려 보면 그렇게 어렵게 구현되는 기운은 아닌 것 같았는데…….

    [어렵지 않을 거란다. 너는 나에게 선택받은 특별한 존재이니 금방 그 느낌을 찾아낼 수 있을 거야.]

    아쉬워하는 사이에 비브르가 나를 향해 응원해 주었다.

    “힘내세요, 작은 아가씨!”

    “힘내세요!”

    칼리나와 아니타 역시 나를 향해 힘을 북돋아 주고 있었다.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슴이 간질간질해지는 그런 쑥스러움 같달까?

    나는 다시 마음을 먹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내 몸에 맴도는 따뜻하고 몽글한 기운을 찾기 위해 정신을 집중시켰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몸속에 있는 이질적인 기운을 발견해내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닐 테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신력을 찾을 수가 있을까?

    [미라벨, 너의 존재 그 자체가 나 수호룡 비브르의 선택을 받은 존재란다. 너의 기운 속에서 다른 것을 찾으려 하지 말려무나.]

    비브르는 헤매는 내가 안타까웠는지 작은 힌트를 주었다.

    나는 한참이나 비브르가 내게 한 말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나의 기운 속에서 다른 것을 찾지 말라고?

    라이넬 사제가 내 속에서 신력의 느낌을 찾으라 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말이었다.

    그럼 대체 뭐가 정답이지?

    의아해하던 순간에, 갑작스럽게 비브르가 했던 말이 어떤 의미인지 단숨에 와닿았다.

    내 몸 자체가 따뜻하고 부드러운 기운을 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다른 것을 찾으려 하니 찾지 못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찾았어요.”

    눈을 뜨고 라이넬 사제를 보며 말했다.

    사실은 찾았다고 하기보다는 깨달았다는 말이 옳았지만, 어쨌든 라이넬 사제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는 이 말이 가장 적당한 것 같았다.

    “정말이십니까?”

    의아해하는 라이넬 사제를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것 좀 보세요.”

    나는 들었던 두 손으로 내 마음을 집중시켰다. 손끝에서 옅은 온기가 나는 기분이 들었다.

    “맙소사.”

    그리고 다시 확인한 내 손 위에는 라이넬 사제가 보여 주었던 빛보다도 더욱 밝고 커다란 빛이 모여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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