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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37)화 (37/174)
  • 37화

    플레온은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타인에게 그 의무를 돌리게 되었다는 말을 꺼내는 것이 무척 힘들었는지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하는구나, 플레온.]

    비브르가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그러나 정작 들어야 할 플레온에게는 전달되지 않을 말이었다.

    “플레온 사제님.”

    “네?”

    내 부름에 플레온이 고개를 들었다.

    “비브르가 너무 괴로워하지 말라고 전해달래요.”

    “…….”

    플레온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짧게 대답한 플레온은 몇 번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추후에 제게 오시면 직접 들려드릴 테니, 일단은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플레온의 제안에 다들 수긍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미 아는 내용을 재차 확인하는 일은 굳이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빠르게 다음으로 넘어가길 기다렸다.

    “악룡의 봉인을 풀려는 자가 다니엘 크라이튼이라면 그자를 황성에 고발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제법 나이가 어려 보이는 사제 한 명이 손을 들며 제안했다. 열다섯 살쯤 되었을 법한 나이였음에도 이 자리에 끼어 있는 게 신기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뭐, 틀리지 않은 말이기는 했다.

    다니엘 크라이튼이 미래에 악룡의 봉인을 풀게 된다면, 지금 그를 구속하여 막아 내는 게 제일 적합해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아마 여기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을 터였다.

    비록 우리 모두가 미래의 일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우리의 사정일 뿐이었다.

    그가 악룡을 깨우려 한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리 사람들의 신망을 받는 신전이라고 해도 아무런 증거도 없이 다니엘을 몰아갈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다니엘은 귀족이었다. 그것도 제국에서 제일가는 권력자인 크라이튼 대공의 동생. 게다가 내가 직접 지켜본 바로는 크라이튼 대공과 다니엘의 사이가 제법 돈독했다.

    사람들의 이목을 받지 않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크라이튼 대공의 우애 깊은 동생을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최악의 사태를 직면할 수도 있었다.

    그게 바로 대공가와 신전의 전쟁이었다.

    국교가 없는 제국에서 이런 분쟁이 생긴다면 제국이 듀아나 신전의 편을 들 수도 없을 터였다.

    오히려 제국의 귀족을 함부로 대한 것으로 인해 크라이튼 대공가의 손을 들어 준다면, 제국과 신전의 싸움이 되고 말 터였다.

    재앙을 막기 위해 또 다른 재앙을 부르느냐, 아니면 다른 방법을 모색하느냐 둘 중 하나밖에 없었다.

    “그 방법은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군요.”

    “그럼 그를 암살하는 방법은요?”

    어린 사제는 지치지 않고 질문했다.

    플레온은 그를 보며 안타까운 듯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건 불가합니다. 악룡의 힘이 다니엘을 보호하고 있기에 평범한 방법으로는 그를 해하기 어렵습니다.”

    플레온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 역시 이를 시도해 보았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방법 역시 실패로 돌아간 듯했다.

    “일단은 정석대로 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정석대로요?”

    “예. 우리는 다니엘 크라이튼에게서 그가 악룡의 봉인을 풀려 한다는 증거를 어떻게든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악룡을 모시는 이들이 어디서 회동을 하는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악룡 크립소의 봉인을 풀려고 하는 것인지 알아내야 하겠지요.”

    결국 범인을 제외하고는 무엇 하나 명확하게 아는 게 없다 보니 다시 원점이었다.

    “성녀님,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다니엘 크라이튼을 막아내기 전까지 성녀님의 정체를 비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플레온이 내게 제안했다.

    “성녀님께서 듀아나 신전의 성녀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그자의 목표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모든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성녀님의 존재를 숨기는 게 신전에도, 그리고 성녀님께도 제일 좋을 듯합니다. 사실 저의 패착은 그것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앞에 놓인 물을 한 모금 마신 플레온이 다시금 무겁게 말을 이었다.

    “제가 먼저 성자로 나선 까닭에 다니엘 크라이튼이 저를 경계하고 말았죠. 듀아나 여신의 사제일 뿐이라면 다니엘이 그토록 저를 경계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랬더라면 더 많은 것들을 알아내고, 그를 저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후회가 담긴 그의 말에 몇몇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플레온의 말에 동의한다는 의미였다.

    나는 그들을 둘러보다가 어깨를 으쓱 추어올리며 대답했다.

    “전 상관없어요. 딱히 성녀로서 대접받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요. 지금도 마찬가지고, 후에도 마찬가지예요.”

    내 말에 바론 대주교가 기특하다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어서인지 대주교의 다정하고 자상한 눈엔 내가 정말 어린아이로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면 차차 찾아 봐요. 무엇보다 아직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잖아요. 플레온 사제님이 이미 경험하셨던 것처럼, 다니엘이 크라이튼 대공가를 점령하는 것은 14년 후의 일입니다. 그리고 악룡 크립소가 부활하는 건 그보다도 더 후의 일이죠. 아닌가요?”

    내가 확답을 구하듯 말하자, 플레온이 긍정을 표했다.

    “성녀님의 말씀대로입니다. 다니엘 크라이튼, 그자는 크라이튼 대공가를 점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악룡 크립소의 봉인을 풀게 되지요. 날짜로만 따지면 14년 후의 일이 맞습니다.”

    “그럼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14년이에요. 물론, 운이 나빠서 시간이 더욱 단축될 수는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적어도 그 시기가 당장 올해, 내년 이러지는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요.”

    내 말에 다른 사람들이 주저하며 수긍했다.

    물론, 우리에게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해서 마냥 마음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언제든 변수는 생기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바심만 낸다면 될 일도 그르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차분히, 그리고 조용히 다니엘을 주시하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방법을 찾으면서요. 그리고 설령 다니엘의 계획을 우리가 막을 수 없다면, 제가 직접 다니엘을 죽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성녀님, 일반적인 힘으로는 악룡의 보호를 받는 다니엘을 해할 수 없습니다.”

    플레온이 내게 조언했다.

    “정말 아무런 방법도 통하지 않나요? 레피드로도요?”

    수호룡 비브르의 뼈로 만들어진 검. 검을 처음 본 당시에 비브르는 레피드가 악룡 크립소에게 지배받는 자들에게 맞설 검이라고 말했다.

    다니엘을 보호하는 힘이 크립소의 것이라면, 당연히 레피드로 베어져야 옳았다.

    [레피드의 힘이라면 다니엘을 보호하는 힘과 대적할 수는 있을 거란다. 하지만…….]

    “레피드를 다룬다고 해도 그를 감싼 사악한 힘과 맞서기는 힘들 겁니다. 악룡의 힘을 깨부수기 위해서는 레피드와 그 레피드를 완벽하게 다룰 실력이 필요합니다.”

    비브르의 말에 이어지는 듯이 플레온이 내게 말했다. 펜던트를 차고 있는 것은 나였기 때문에 플레온에게는 비브르의 말이 들리지 않을 텐데도 아주 딱 맞춘 타이밍이었다.

    나는 플레온의 말에 잠시 망설였다.

    병사들에게 몰려 죽음을 맞이했던 내 모습을 아는 플레온이라면 나를 미덥지 않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레피드를 완벽하게 다룰 실력, 이라고 하면 당시 다니엘의 병사들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의 실력이겠지.

    그게 어느 정도일까?

    나보다도 훨씬 강한 사람들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당장 숙부님인 브라이언이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그를 따라잡을 수 있을지는 막연했다.

    그에게는 내가 갖지 못한 실력과 경력, 그리고 연륜이 있으니까.

    브라이언을 제외하고 나니 내 머릿속에 나와 비슷한 출발점에 있는 사람이 하나 떠올랐다.

    “제 검술 실력이 못 미더울 정도라 우려하시는 건 이해해요. 그렇지만 지금의 저는 아직 아홉 살인걸요. 더 강해질 수 있어요. 그러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고요. 만약 용병왕 정도로 강해지면 믿음이 갈까요?”

    나와 비슷한 나이이며 훗날 누구보다 강해지는 사람. 그리고 내가 따라잡을 목표가 될 만한 사람.

    “용병왕? 그게 누굽니까?”

    아직 용병왕이라 칭할 만한 사람이 없는 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내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었다.

    “제프리 콜먼을 말씀하시는군요. 예, 그 정도면 아마도…….”

    플레온이 긍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용병왕 만큼의 실력을 쌓아 볼게요. 아니, 그보다 더.”

    내가 확언하듯 말하자 플레온이 난처하게 웃었다.

    “물론 성녀님께서 강해지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겠죠. 하지만 성녀님께서 너무 무리하시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여차하면 조력자로 용병왕을 끌어들이는 방법이 있으니 그런 방법도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조심스럽게 사과하는 플레온의 말에 나는 숨을 길게 내쉬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알겠어요. 그것도 고려해 볼게요.”

    제프리와 다시 만나면 그와 좀 더 가까워지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감자를 나눠 준 일이나 수배를 풀어 준 일로 제프리가 나한테 어느 정도는 호의적일 거라는 점이었다.

    내가 수긍하는 모습을 보이니 플레온 사제도 나를 향해 미소를 보였다.

    그때, 바론 대주교가 가볍게 손뼉을 쳤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알아보자는 성녀님의 말씀에는 동의합니다. 아직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아요. 너무 급하게 움직이다가는 오히려 잘못될 수도 있으니 일단은 여기서 대화를 마치도록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바론 대주교가 사제들을 향해 제안했다.

    다들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사제들은 나가기 전에 내게 다가왔다.

    무얼 하려는 건지 의아해하는데 가장 먼저 다가온 라이넬 사제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눈높이를 맞추는 건가 싶어 바라보는 찰나에 그가 두 손을 내밀었다. 마치 그의 손에 내 손을 올려 주길 바라는 듯한 모습이었다.

    얼떨떨해하며 그의 손 위에 손을 올리자 라이넬 사제가 이마를 내 손등에 가져다 대었다.

    “여신님의 은총이 깃들기를.”

    라이넬 사제를 그렇게 짧게 읊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의 행동이 과거 성자를 향해 예를 취했던 모습임을 깨달았다.

    나도 한때는 먼발치서 성자였던 플레온에게 이런 예를 올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이제는 내가 성녀가 되었으니 그들이 내게 이런 행동을 하는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조금 부담스럽고 어색하게 느껴지는 반면에, 그들의 행동이 전부 나를 위한 존경과 동경의 마음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싫지는 않았다.

    이제 된 건가 싶은 찰나에 다른 사제들도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들 모두 라이넬 사제와 같은 예를 취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회의장에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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