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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36)화 (36/174)
  • 36화

    마차는 속도를 줄이다가 이내 완전히 멈추어 섰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우리를 따라온 기사의 손을 잡아 천천히 마차에서 내려섰다.

    내가 내린 다음에는 칼리나와 아니타의 순서대로였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따로 통보한 적이 없음에도 지난 번에 나를 맞이하러 왔던 사제가 미리 나와 나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사제님. 여신님의 은총이 있기를.”

    메이너드 자작 부인에게 배운 예를 차려 사제에게 인사했다. 사제는 조금 놀란 얼굴을 하다가 이내 다시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나와 똑같이 인사했다.

    “아가씨께도 여신님의 은총이 있기를.”

    인사를 마친 사제의 시선이 내 목에 걸려있는 펜던트를 향했다. 그러더니 씁쓸하게 웃었다.

    “역시 그렇게 되신 거군요.”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왜 씁쓸하게 웃었던 건지에 대해서는 조금 아리송했다.

    내가 비브르와 손을 잡았다는 것을 알면 당연히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의아한 마음에 그를 보며 눈을 깜빡이자 그가 다시금 일을 열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모두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오는 걸 알고 계셨나요?”

    미리 나와서 날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모두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전부 내가 신전에 방문하리라는 것을 알아야만 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어제 갑작스럽게 비브르의 말을 듣고 결정한 내용이기 때문에 나는 딱히 듀아나 신전에 방문하겠다는 연락을 넣지 않았다.

    혹시 저택에서 넣었던 걸까?

    “플레온 사제님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의문뿐이던 내 귀에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이곳으로 오며 비브르와 함께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플레온이 원래부터 듀아나 여신님의 종이라는 말이었다.

    그에게 미래의 기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지라도 있는 건가?

    [아마도 어느 정도의 예지를 사용할 수는 있을 거란다. 플레온은 어찌 되었든 성자의 그릇이었으니까.]

    의아해하는 사이에 비브르가 내게 설명했다. 나는 그제야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시지요.”

    사제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신전 내부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를 보더니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과거에도 몇 번인가 신전에 방문했었지만, 이렇게 모두가 나를 보며 공손히 인사하는 경우는 없었다.

    벌써 내가 비브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알려진 걸까?

    하긴, 플레온이 내가 신전에 도착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기도 했으니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저는 듀아나 여신님을 모시는 사제 라이넬입니다.”

    한참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에 나를 안내하던 사제가 스스로를 소개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확인했다.

    “편하게 라이넬 사제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라이넬 사제는 태연히 웃으며 말했다.

    “저는 미라벨 크라이튼이에요. 아가씨라고 하지 말고 미라벨이라고 불러주세요.”

    나 역시 라이넬 사제에게 내 소개를 마쳤다.

    “예, 알겠습니다. 미라벨 님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네.”

    님까지 붙이는 건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훨씬 나았다.

    “근데 어디로 가는 거예요?”

    생각해보니 들어오라는 말에 무턱대로 안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정작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래 봤자 다른 사제들이 있는 곳으로 가리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확인차 그에게 물었다.

    “회의실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대주교님과 사제님들이 미라벨 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 네, 알겠어요.”

    내가 순순히 긍정을 표하자 라이넬 사제가 부드러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는 걸 보니 이미 설명은 들으신 모양이군요.”

    “네. 비브르한테 대충 얘기는 들었어요.”

    “그리고 그 일을 하기로 하셨고요.”

    “네.”

    생략된 말들이 있었지만,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힘든 길이 될 겁니다. 이미 한 번의 실패를 겪은 일이니까요. 그래서 미라벨 님께 이런 막중한 일을 맡기게 된 게 저는 굉장히 송구스럽습니다.”

    라이넬 사제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나를 보며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혹시 그 길에 도움이 필요하거든 언제든지 듀아나 신전을 찾아주세요. 저뿐만이 아니라 신전의 모두가 미라벨 님을 도울 겁니다.”

    아마도 진심이겠지만, 라이넬 사제의 말은 제법 마음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는 듯했다.

    안 그래도 비브르와 대화하면서 싱숭생숭해졌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 듯했다.

    “이곳입니다.”

    마침내 커다란 문 앞에 멈추어 섰다.

    이전에 성자 플레온을 만났던 것과 비교하면 훨씬 작은 크기였지만, 이제 아홉 살인 내 시선에서 보기에는 회의실의 문은 이미 충분히 커 보였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 안으로는 미라벨 님 외에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라이넬 사제가 칼리나와 아니타를 향해 말했다.

    “정말 안 될까요? 그냥 옆에만 있으려는 건데요.”

    칼리나가 불안해하며 말하는 소리에 라이넬 사제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위험한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밖에서 대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칼리나와 아니타는 망설이며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들을 안심시키고자 했다.

    곧 라이넬 사제가 문고리를 들어 두 번 노크 사인을 보내고는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문이 덜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안으로 드시지요.”

    내가 망설이며 라이넬 사제를 돌아보자 라이넬 사제가 손을 들어 안을 가리켰다.

    크게 심호흡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회의실에 둥글게 모여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성녀님.”

    그중에서 가장 화려한 옷을 입고 있던 사람이 내게 다가와 인사했다.

    아마도 그가 대주교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외의 사람들은 라이넬 사제와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들을 확인하다가 이내 한 사람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일전에 보았던 성자 플레온과 달리 조금 젊어 보이는 인상의 플레온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를 본 후에야 나는 그때 재가 되었던 게 미래의 플레온이 맞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플레온, 오랜만이구나.]

    들리지 않을 테지만 비브르 역시 오랜만에 만나는 플레온을 반겼다.

    “안녕하세요, 미라벨 크라이튼입니다. 여신님의 은총이 깃들기를.”

    나는 두 손을 모아 인사했다.

    주변에서 흐뭇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저는 이곳 신전의 대주교를 맡고 있는 바론입니다. 모두를 대신해서 인사드립니다. 여신님의 은총이 깃들기를.”

    자신을 바론이라 소개한 대주교가 내 이마에 검지와 중지를 동시에 가져다 대었다.

    피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왠지 분위기에 압도되어 피할 수가 없었다.

    그의 손이 내 이마에 닿자 옅은 빛이 반짝하고 났다가 사라졌다.

    신기하게도 몸이 매우 가뿐해진 기분이 들었다.

    “이쪽으로 와 앉으시죠. 다른 이들에 대한 소개는 시간이 남으면 천천히 하겠습니다.”

    대주교가 자리를 안내해 줬다.

    동그란 원형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앉은 상태였기에 딱히 상석이라 할 곳은 없었지만, 어쨌든 내 자리는 바론 대주교의 옆이었다.

    “우선 대화를 나누기에 앞서 어려운 결정을 해 주신 성녀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미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나를 성녀라고 인식하는 듯했다.

    나는 성자나 성녀가 되면 의식을 치르거나 어떤 중대한 책임의식 같은 게 생기지는 않을까 생각했지만, 딱히 그런 건 없는 듯했다.

    비브르의 말대로 내가 비브르의 제안을 받아들여 함께하게 되었으니,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이곳에서 성녀의 대우를 받는 모양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성녀님의 존재를 세상에 공표하는 것이 맞습니다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모든 절차를 생략한 점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조금 실망스럽던 찰나에 바론 대주교가 덧붙였다.

    그의 말대로라면 원래는 어느 정도의 절차나 과정이 있나 보다.

    그래 봤자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이었기에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 추어올렸다.

    “괜찮아요. 그리고 제가 이곳에 온 건 비브르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에요. 굳이 이런저런 말로 시간 낭비하지 않아도 되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셔도 돼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론 대주교가 내게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숙여 인사해 주었다.

    어쩐지 이곳에 도착한 뒤론 계속 인사만 받는 것 같아 뻘쭘하던 때에 플레온이 입을 열었다.

    “성녀님께서도 이미 아시겠지만, 악룡 크립소의 봉인을 풀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성녀님의 작은할아버지인 다니엘 크라이튼입니다. 이에 대한 건 비브르 님께 들으셨습니까?”

    “네, 들었어요.”

    “다행이군요. 우리가 막을 건 다니엘 크라이튼을 위시한 악룡의 숭배 단체를 막는 일입니다.”

    악룡의 숭배 단체.

    아마도 그 단체의 주축이 다니엘이 아닐까 짧게 생각을 마쳤다.

    아니, 맞겠지.

    그러니 비브르도, 플레온도 다니엘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일 터였다.

    “현재 우리는 그 단체의 흔적을 쫓는 중입니다. 미래에도 워낙 은밀히 움직였던 터라 주축을 찾아내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알잖아요.”

    “예, 그렇죠. 무리의 우두머리는 다니엘 크라이튼입니다. 그리고 그가 악룡의 봉인석을 갖고 있을 확률이 제일 높습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다니엘 크라이튼을 저지하거나, 그가 가지고 있는 악룡 크립소의 봉인석을 빼앗거나…… 그를 죽이는 일입니다.”

    플레온이 짐짓 비장한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미래의 전 고작해야 다니엘이 단체의 주축이라는 것 외에는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했습니다. 정보는 없었고, 시간은 늦었죠. 결국, 미래 시간대의 저는 실패하고 악룡 크립소의 봉인은 풀렸습니다.”

    플레온이 말이 끝날 때쯤에는 다른 사제들의 침중한 한숨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나는 이미 비브르를 통해 플레온과 비브르가 얻어낸 정보가 거의 없다시피 했으며, 실패하여 나에게 몫이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크게 동요가 되지는 않았다.

    “이 모든 일을 되돌리기 위해 비브르 님께서 시간을 돌렸고, 마침내 저보다 더 적임자를 찾아낸 게 바로 성녀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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