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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35)화 (35/174)

35화

엘리엇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메이너드 자작 부인의 수업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미라벨! 듣고 있느냐?]

갑자기 들려온 비브르의 목소리에 자리에서 우뚝 멈추어 섰다.

귀가 아니라 머릿속으로 울리는 목소리는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네가 어제도 그제도 바빠 보여서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만, 내 이야기를 좀 들어줄 때가 되지 않았느냐?]

비브르의 간곡한 목소리에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니타가 나를 따라오고 있었지만, 다행히도 아니타 외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나는 아니타를 향해 가까이 다가오라는 의미로 손짓했다.

“아니타, 이리 와 봐.”

[미라벨,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이냐?]

내 의도도 이해하지 못하고 비브르가 나를 재촉했다. 나는 애써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척했다.

“네, 작은 아가씨.”

아니타가 잰걸음으로 빠르게 내 곁으로 다가왔다.

“메이너드 자작 부인의 수업을 들으면서 사과 주스를 마시고 싶은데 주방에 전달해 줄 수 있을까?”

“네, 금방 다녀올게요!”

“응. 메이너드 자작 부인에게 대접할 차도 잊지 말고. 그리고 네 것도 챙겨 와.”

당장이라도 주방으로 달려가려는 아니타를 붙잡고 추가적으로 말했다.

“제 것도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 아니타를 향해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내가 챙겨 주는 게 기쁜지 아니타는 조금 상기된 얼굴로 내게 꾸벅 인사했다.

“네! 그럼 먼저 올라가 계세요, 작은 아가씨!”

인사를 마친 아니타가 금세 주방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아니타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메이너드 자작 부인이 있을 응접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때 비브르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두 손을 허리에 올리고 마찬가지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이 있을 때 대답하기 곤란하잖아. 아니타를 보내고 말 거느라 늦은 거야.”

그러고는 비브르가 대답하기 전에 바로 말을 이었다.

“근데 무슨 이야기 말하는 거야, 비브르? 설명은 다 끝난 거 아니었어?”

마침내 혼자가 된 다음에야 비브르의 말에 대답했다.

[큰 줄기에 대해서 설명하기는 했지만,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도 나와 이야기해야 하지 않겠느냐?]

비브르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앞으로의 이야기?”

[그래. 그리고 내게 말을 걸 때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단다.]

계속해서 주변을 살피며 대답하는 내가 안타까웠는지 비브르가 덧붙였다.

“그럼 어떻게 대화해?”

[네가 펜던트를 차고 있는 동안은 나와 정신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는 상태란다. 그러니 내게 전달하겠노라. 마음먹으면 네 말이 곧 나에게 전달이 된단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가서 속으로 비브르에게 말을 거는 상상을 했다.

‘이렇게 하면 될까?’

[그래. 그렇게 하면 나도 들을 수 있단다.]

‘정말 들려?’

말을 하지 않아도 의사소통이 된다는 점이 신기해서 비브르에게 물었다.

[들린단다.]

‘정말 신기하다. 이런 식으로도 대화가 되는구나.’

[다들 그렇게 신기해하는구나. 플레온도 그렇고, 미라벨 너도.]

‘성자님도 그랬어?’

[그렇단다.]

성자 플레온도 결국 처음에는 나와 같았다는 게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결국은 그도 성자가 되기 전까지는 나랑 똑같았구나.

[당연하지. 미라벨 넌 지금 성녀인걸.]

“……어?”

예상하지 못한 비브르의 말에 하마터면 계단에서 헛발을 내디뎌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반사적으로 난간을 짚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조심하거라. 몸이 재산이지 않느냐. 앞으로 악룡 크립소를 부활시키려는 이들과 싸워야 하는데 이런 사소한 걸로 다치면 곤란하단다.]

“아니, 잠깐만. 내가 뭐라고?”

“네?”

실수로 지나가는 하녀의 앞에서 말을 꺼내 버렸다.

하녀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크라이튼 대공가의 작은 아가씨죠.”

“앗, 아……. 응, 고마워. 지나가는데 방해해서 미안해.”

괜히 창피함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래서 비브르와 대화하기 전에 주변을 살폈던 건데 실수해 버리고 말았다.

하녀는 내 사과에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는 먼저 계단을 올라 2층 복도로 사라졌다.

뜨겁게 달아오른 뺨을 두 손으로 감싸며 잠시 열을 식혔다.

[왜 그렇게 놀라지? 당연한 이야기지 않느냐? 플레온이 나와 함께하며 성자가 되었으니, 미라벨 너 역시 나와 함께하는 동안은 성녀란다.]

생각해보니 확실히 그랬다.

성자 플레온 또한 비브르의 부탁으로 악룡 크립소의 봉인을 막아야 한다는 사명이 주어졌다. 그리고 듀아나 신전의 성자로 나타나게 되었다.

나도 성자 플레온과 같은 수순을 밟고 있으니 성녀라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래도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던 호칭이었기에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기는 했다.

[나와 함께 듀아나 여신님의 신전으로 가다오. 그럼 그곳에서 널 성녀로 인정해 줄 거란다. 아니, 이미 널 성녀로 여기고 있을 거란다.]

‘그럼 더 자세하게 나눠야 한다는 이야기는 뭐야?’

본론으로 돌아와 비브르에게 물었다.

[그 이야기는 듀아나 여신님의 신전으로 가면 꺼내도록 하마. 지금 여기서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는 신전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대화하는 게 더욱 낫겠지.]

‘그럼 결국 신전으로 가 봐야겠네?’

[그렇단다.]

비브르의 대답을 듣고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 추어올렸다.

‘근데 적어도 오늘은 안 돼.’

[왜 그러느냐?]

내가 딱 잘라 거절하자 비브르가 놀라서 내게 물었다. 나와 내내 함께 있어서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나도 일정이 있어. 그렇게 마음대로 일정을 빼먹을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롭지는 않단 말이야.’

내 말이 끝난 다음에야 비브르가 납득한 듯이 비음을 흘렸다.

‘오늘은 안 되고, 가급적이면 내일, 아니면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날을 잡아 볼게. 안 그래도 나도 궁금했거든.’

[기다리고 있으마.]

비브르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조용해졌다.

그 사이 나는 메이너드 자작 부인이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 앞에 도착한 뒤 몸을 잘 정돈했다. 그리고는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를 바라보았다.

하녀는 눈치 좋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을 향해 고했다.

곧 문이 열리고 응접실 내부가 드러났다.

* * *

다음날이 되어서야 나는 메이너드 자작 부인에게 배우는 교양수업을 뒤로하고 듀아나 여신의 신전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신전으로 향하는 내내 부드럽게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듀아나 여신의 신전에 방문하는 건 지금의 몸이 되고 난 후로 두 번째였다.

첫 번째 방문했을 때는 성자 플레온이 재가 되어 사라지는 바람에 경황이 없어 무얼 생각할 틈도 없었다.

‘있잖아, 비브르.’

마차 창문을 바라보며 속으로 비브르를 불렀다. 맞은편에 아니타와 칼리나가 있기 때문이었다.

[왜 그러느냐?]

곧이어 비브르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성자님이 내게 네가 봉인된 펜던트를 봉인하고 수명이 다하여 재로 돌아가게 되었잖아. 기억해?’

[당연히 기억하고 있단다. 나는 망각의 축복을 받은 인간이 아니라 수호룡이란다.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은 모두 내 머릿속에서 잊혀지지 않는단다.]

처음 신전에 갔을 때를 떠올리며 묻자 비브르가 대답했다.

망각을 축복이라 말하며 모든 것을 잊지 못한다는 비브르의 목소리는 슬픔을 머금은 듯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비브르는 성자 플레온과 함께 악룡 크립소의 부활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했을 터였다.

그런 동료나 마찬가지인 존재가 허무하게 재로 돌아갔으니 마음이 편치는 않겠지.

‘그때 성자님께서 재가 되어 사라지셨으면, 지금의 성자님은 어떻게 되는 거야? 전에 듣기로 내게 널 전해 준 건 미래의 성자님이셨잖아?’

조심스럽게 비브르에게 질문했다. 어쩌면 비브르에게는 아픈 질문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나와 함께했던 플레온은 네가 과거로 돌아오기 전의 사람이란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곳의 플레온과는 같은 사람이면서 또 다른 사람이기도 하지.]

‘그럼 내가 성자님의 자리를 빼앗게 된 건가?’

내가 궁금하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플레온이 성자로서 각성하여 세상에 나타나는 것이 내가 아는 미래였다.

하지만 플레온은 악룡 크립소의 부활을 저지하는 데 실패한 뒤 비브르와 함께 시간을 되돌렸고, 과거로 되돌아온 나에게 그들의 사명을 넘겼다.

그로 인해 나는 비브르의 부탁을 받아 악룡 크립소를, 정확히는 악룡 크립소의 부활을 꿈꾸는 다니엘을 막아내기로 했다.

그러면서 비브르의 말대로 성녀라는 지위까지 얻게 될 터였다.

그럼 본래 성자가 되어야 했을 플레온은?

[플레온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는 본래부터 듀아나 여신님의 종이었단다. 그는 다른 시간대의 자신이 듀아나 여신님의 은총을 받은 성자였다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단다.]

확언하는 비브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이상한 점을 깨닫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성자님은 자신이 성자였다는 걸 알고 있는 거야?’

[본래는 그리해서는 안 되지만 듀아나 여신님의 은혜로 기억을 모두 갖고 있을 거란다. 그 많은 실패의 날에 대한 기억을 전부. 크립소를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시무룩한 비브르의 목소리에 나는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플레온이 모든 기억을 갖고 있다면, 확실히 그로부터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터였다.

플레온과 줄곧 함께였던 비브르에게도 별달리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얻지는 못했기에 플레온의 기억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적어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시작하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그때, 마부가 마부석과 연결된 창을 조금 열고 칼리나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칼리나는 마부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내게 전달해 주었다.

“작은 아가씨, 곧 듀아나 신전에 도착합니다.”

“그래?”

“네.”

대답을 듣고 창문을 열어 밖을 확인했다.

칼리나의 말대로 마차 창문 너머로 듀아나 여신을 섬기는 천사들의 조각상이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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