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무도회가 끝난 후로 대공가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모든 것이 이전처럼 돌아오지는 않았다. 조금의 변화가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내 일상의 가장 큰 변화는 새벽 훈련이었다.
“미라벨, 오늘부터는 검을 다루는 법을 배우도록 하겠다.”
그동안은 내내 체력 훈련만 시키던 브라이언이 2주 만에 내게 목검을 건네주었다.
좀 더 기초를 다진 다음에 시작할 줄 알았는데, 내 생각보다 빠르게 목검을 들게 되었다.
안 그래도 검을 다루는 법을 알고 싶었던 내게는 아주 반가운 변화였다.
나는 무거운 목검을 확인하며 내가 아직 어린아이라는 사실을 다시 실감했다.
용병으로 활동하던 때 같으면 이런 무게는 무겁게 느껴지지도 않았을 텐데, 지금은 벽돌을 든 듯이 무겁게 느껴졌다.
“진검을 기대했을지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목검으로 훈련을 할 거란다. 검을 다루는 법부터 배울 거야. 아직 네게 진검은 위험하거든.”
“네, 알겠어요. 숙부님.”
브라이언은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검을 쥐는 법을 알려 주마 이런 식으로 한번 쥐어 보렴.”
브라이언은 직접 검을 쥐는 법을 시범을 보이며 나에게 따라 할 것을 종용했다.
내가 평소 검을 쥐었던 방식과는 조금 달랐지만, 그래도 금세 따라 할 정도는 되었다.
“이렇게 하면 되나요?”
내가 브라이언이 검을 쥐는 법을 따라 하며 묻자, 브라이언이 꼼꼼히 내 자세를 살폈다.
그리고는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감이 좋아서 그런지 자세는 금방 따라 하는구나. 그럼 검을 휘두르는 법을 알려 줄 테니 잘 보렴.”
브라이언은 검을 쥔 상태로 정면을 응시하며 내가 참고할 수 있도록 아주 느린 자세로 허공을 횡으로 베었다.
그 단순한 자세를 보면서 나는 그가 얼마나 오랜 수련을 해왔는지 실감했다.
보통 속도가 느리면 틈이 보이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아주 천천히 검을 휘두르는 브라이언에게서 조금의 빈틈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검을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 검을 나누는 적수였다고 하더라도 섣부르게 공격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완벽에 가까운 자세를 보며 나도 모르게 감탄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러자 브라이언이 나를 보며 나직이 웃음을 터트렸다. 곁에서 보고 있던 엘리엇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라벨이 아버지께서 검을 쓰는 게 신기한가 봐요.”
엘리엇이 장난치듯 브라이언에게 말했다.
브라이언은 흐뭇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자 미라벨, 너도 한번 해 보렴. 자세가 틀리면 고쳐 주마.”
“네, 숙부님!”
나는 최대한 브라이언이 했던 자세를 떠올리며 천천히 검을 횡으로 베었다.
브라이언은 검을 휘두르는 나를 팔짱을 낀 채 바라보다가 내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방금 자세가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발을 더 벌리고 하체에 더 힘을 실어. 그리고 어깨에는 너무 힘이 들어갔다. 힘을 풀고 다시 해 보거라.”
브라이언은 꼼꼼히 내 자세를 봐주었다.
이 외에도 어깨의 방향이나 시선 방향 등에 대해서 직접 고쳐 준 브라이언이 다시금 검을 휘두르길 제안했다.
나는 브라이언의 자세를 모방한다는 기분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생각만큼 브라이언의 자세를 따라 하지는 못 했는지 브라이언은 조금씩 내 자세를 교정해 주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반복적으로 검을 휘두르고 나서야 브라이언은 내 자세를 시정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불안함에 브라이언과 엘리엇을 돌아보았다. 브라이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고, 엘리엇은 나를 향해 엄지를 들어 보였다.
근처에 앉아서 구경하던 아니타 역시 나를 보며 박수를 치는 흉내를 내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내 동작이 나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심하고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지금 이 자세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고작 한두 번 휘두르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적어도 천 번, 만 번은 휘둘러서 몸에 자연스럽게 익도록 해야 내 것이 되는 것이었다.
“좋다, 미라벨. 그럼 그 자세를 기억하며 횡으로 베기 백 번을 먼저 해 보자꾸나.”
“네, 숙부님.”
“엘리엇, 너도 오늘부터 기초를 더욱 수련하도록 하자. 미라벨의 옆에서 같이 횡으로 베기 백 번.”
“네, 아버지.”
브라이언의 지시에 엘리엇이 나와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섰다.
그리고는 내가 했던 것처럼 자세를 잡고 검을 횡으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확실히 기초 자세를 처음 익힌 나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부드러운 동작이었다.
거의 브라이언에 준할 만큼 엘리엇의 자세도 훌륭했다.
어려서부터 브라이언에게 검을 배운 탓에 군더더기가 없는 자세를 유지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잠시 엘리엇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나도 검을 횡으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나 혼자 검을 익히고 부족한 부분이 느껴지면 책으로 독학을 해야 했는데, 이제는 검으로 정점에 다다른 사람에게서 기초부터 검술을 배울 수 있었다.
그 기쁨이 힘든 훈련조차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있었다.
수차례 검을 휘두르다 혹여나 내 자세가 흐트러지면 지켜보고 있던 브라이언이 지적을 해 주었다.
그렇게 한 시간 반 동안 검을 연습하고, 나머지 반 시간 동안 마무리로 체력 훈련과 스트레칭까지 하고 나서야 훈련이 끝났다.
연무장에서 돌아와 욕실로 향했다.
검을 휘두르는 동작들로 인해 등의 근육이 미약하게 열을 내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자 그 열기가 천천히 식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힘들지 않으세요?”
칼리나가 불현듯 내게 물었다.
고개를 돌려 칼리나를 확인하자 칼리나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검술 배우는 거요.”
“아니, 전혀. 오히려 운동도 되고 좋은걸. 게다가 지금까지는 체력 훈련만 하다가 이제 목검을 잡기 시작한 거라서 재미있어.”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았다.
만일 브라이언이 내게 검술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 혼자 검을 익힐 요량이었다.
그런데 브라이언이 내 부탁을 들어주고 검을 익힐 수 있도록 배려까지 해 주는데 불만을 가질 새가 없었다.
게다가 아직 어린 내 몸은 용병이었을 때의 나만큼 체력이 넘쳤다.
그 이전에 빠르게 지치는 것도, 오늘은 없는 듯했다. 이건 신력 덕분인가? 나중에 비브르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 같았다.
“작은 아가씨께서는 기사가 되고 싶으신 건가요?”
조심스럽게 묻는 칼리나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딱히 기사가 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내 목표는 어디까지나 다니엘에게서 이 크라이튼 대공가를 지켜내는 거였고, 이를 위해 검술을 익힐 필요성을 느낀 거였으니까.
하지만 나중에 기회가 되면 기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기사가 되면 작위를 받을 테니까.
메이너드 자작 부인을 통해 들은 귀족 사회에서, 작위를 받지 않은 귀족 여성은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 사는 것이 보통인 듯했다. 이외에는 매우 한정적인 삶을 사는 모양이었다.
결혼에 뜻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내 미래를 위해서라면 기사가 되어 작위를 받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일단은.”
쉽게 수긍하니 칼리나가 신기하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어려운 길일 텐데요.”
“괜찮아. 이미 그보다 더 어려운 길을 걸었거든.”
“네?”
무심코 용병으로 살아왔던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나는 의아해하는 칼리나를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냐. 그냥.”
이상해 보일 거라는 걸 알면서도 변명할 여지가 없어서 대충 얼버무렸다.
그나마 내가 아직 어려서 칼리나는 그저 어린아이가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쯤으로 넘기는 듯했다.
목욕을 마치고 나와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우리 벨 왔어?”
엄마가 나를 가장 먼저 반겨 주었다.
엄마의 옆으로 다가가자 엄마가 나를 가볍게 안아 주었다.
“오늘도 새벽부터 훈련했다지?”
“응. 오늘은 드디어 숙부님께서 목검을 휘두르는 걸 가르쳐 주셨어.”
내가 들뜬 목소리로 대답하자 엄마가 기특하다는 듯이 내 등을 토닥거렸다.
“그래. 무리하지 않아도 되니까 힘들면 쉬기도 하고 그래.”
“쉬다니, 미라벨이 얼마나 인재인지 몰라서 하는 소리다, 코넬리아.”
엄마의 말을 받아친 건 막 식당으로 들어온 브라이언이었다.
“엘리엇도 며칠은 걸려서 동작을 고쳤는데, 미라벨은 하루 만에 동작을 익히더구나. 이 정도면 재능이야. 그것도 매우 뛰어난 재능.”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브라이언이 부드럽게 눈을 휘어 웃었다.
“정말 우리 벨이?”
“그래. 나도 좀 놀랐어. 체력 훈련을 따라가는 속도도 빠르고, 자세도 훌륭하고. 그리고 끈기도 있지. 미래가 기대된다고. 어쩌면 미라벨이 가일을 닮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가일을…….”
엄마는 아버지의 이름이 언급되자 조금 감격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과거 기사였고, 죽을 때도 기사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았던 아버지.
평민이었으나 검술 실력이 뛰어나 기사가 되었고, 작위까지 받았던 아버지였다.
과거 용병이었을 때도 검술에 재능이 있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정말로 아버지를 닮은 걸지도 몰랐다.
나 역시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때였다.
“가일 경의 실력이 뛰어나기는 했지. 미라벨이 가일 경을 닮아 검술을 배우는 게 빠르다고는 해도 여자아이가 검술을 배우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싶구나. 그러다가 상처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니?”
초를 치며 식당 안으로 들어온 것은 다니엘이었다.
다니엘은 크라이튼 대공과 함께 식당 안으로 들어오며 퍽 다정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걱정을 담은 듯한 말이었지만, 그가 나를 결혼으로 팔아 치우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말이 단순한 걱정으로만 들리지는 않았다.
“아무리 듀아나 신전의 신력으로 흉터까지 지울 수 있다고는 해도 상처가 나지 않는 게 제일 낫지 않겠느냐?”
“확실히 다칠까 봐 좀 우려스럽기는 해요.”
다니엘의 말에 엄마도 아쉬움을 표하며 말했다.
엄마와 다니엘의 속뜻이 다를 거라는 걸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유감이었다.
“걱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난 미라벨이 뭐라도 하는 게 기특해서 보기 좋구나. 미라벨, 아가. 네가 원한다면 난 뭐든 지원해 줄 생각이란다. 다만 너무 무리하지는 말렴.”
크라이튼 대공이 지나가며 내 어깨를 가볍게 도닥거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