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31)화 (31/174)
  • 31화

    내 말에 제프리의 뺨이 금세 발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제프리는 순진한 것 같았다. 아니 순진하다기보다는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 같은 거겠지. 제프리는 아직 열한 살이니까.

    뭐, 일부러 놀려먹으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내가 하는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섬세하게 반응하는 게 정말 귀여웠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잘 익은 토마토처럼 귀까지 빨갛게 물들어 가는 제프리를 보며 나는 그만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뭐야?”

    내가 웃어 버리니 장난친 거라고 생각한 건지 제프리가 내게 발끈해서 외쳤다.

    웃음은 여전히 속에서부터 터져 나왔지만, 오해를 만들고 싶지는 않아 최대한 웃음을 참아 내려 했다. 한참이나 호흡을 고른 후에야 나는 간신히 웃음을 잠재울 수 있었다.

    “미안. 네가 귀여워서 웃음이 났어.”

    “노, 놀리지 마!”

    제프리가 발끈하며 외쳤다. 나는 어깨를 으쓱 추어올리며 그에게 말했다.

    “놀리기는? 전혀 놀리는 거 아냐. 난 내가 느낀 사실대로 말한 것뿐이야.”

    빙긋이 웃는 얼굴로 제프리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제프리가 내 손을 피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예상외로 그는 내 손을 피하지 않았다.

    그 덕에 제프리의 머리칼을 만질 수 있었다. 제프리의 은사처럼 가는 머리칼이 내 손가락 사이에서 흩어졌다.

    “넌 은발이잖아. 이 은색 머리칼이 달빛을 반사해서 반짝거리는 게 정말 예뻐.”

    “진짜? 내 머리카락 색이 좋아?”

    “응? 으응. 예쁘잖아. 특별하고.”

    나처럼 어디서나 볼 법한 갈색 머리칼과 달리 제프리는 한 번 보면 잊지 못할 은발이었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달빛에 비칠 때면 아름답기까지 했다.

    다시 손을 회수하고 제프리를 확인했다.

    제프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릎을 끌어안고 그를 마주 보았다.

    제프리는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나도 굳이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 풀벌레 우는 소리와 연회장의 소음이 섞였다. 제프리는 푸른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이 입술을 떼었다.

    “너도 예뻐, 미라벨.”

    나는 잠시 제프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그러다가 뒤늦게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내가?”

    “응. 네가.”

    제프리의 말에 반사적으로 내 머리칼을 확인했다.

    양 갈래로 묶은 머리칼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이런 흔한 갈색 머리칼을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난 너처럼 예쁜 은발이 아닌데. 흔한 갈색 머리잖아. 수도 어디를 가도 한 명씩은 꼭 있는 색이라고. 특별하지 않아.”

    “아니야. 넌 너라서 특별하고 예뻐.”

    제프리는 수줍어하던 것도 잊은 듯이 내게 말했다.

    그래도 칭찬을 부정하고 싶진 않아서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제프리.”

    “진짜야!”

    내가 자신의 말을 흘려듣는다고 생각했는지 제프리가 다시 한번 발끈하듯 외쳤다.

    “응. 알아. 고마워.”

    나는 대답을 마치고 잠시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

    “제프리, 여기서 지내지 않을래?”

    제프리 앞으로 내려진 수배가 풀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린아이가 어딘가에 쉽게 정착할 만한 세상은 아니었다.

    그래도 제프리는 남자아이인데다 열한 살이었기 때문에 허드렛일이 필요한 곳에서 그를 받아 줄 수 있었지만, 그런 곳은 착취가 심각했다.

    간신히 배를 곯지 않을 정도면 다행인 삶이겠지.

    나는 안다. 제프리는 그런 삶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장차 용병왕이 될 터였다.

    어려서부터 자질구레한 용병 업무를 맡고, 성장해 나가며 결국은 용병계에서도 정점을 찍게 되는 인물이 그였다.

    하지만 그가 용병왕이 되기까지 겪을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기왕이면 제프리가 나와 함께 이 저택에서 검을 배우는 쪽이 낫지 않을까 생각해서 그에게 이곳 크라이튼 대공가에 머무를 것을 제안했다.

    용병으로 지내면서도 검술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실력을 보유하게 되는 제프리였다.

    그러니 브라이언처럼 훌륭한 기사에게 체계적으로 검술을 훈련 받는다면, 틀림없이 아주 뛰어난 검사로 거듭날 터였다.

    과거 내가 알았던 용병왕 제프리 콜먼보다도 더욱 강한 사람이 될지도 모르지.

    물론, 그가 전보다 더 강해지는 것을 바라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냥, 고작 열한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제프리가 굳이 험한 세상을 겪으며 고생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었다.

    그에게 아무런 기회도 없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나라는 기회가 있다.

    크라이튼 대공이 내 부탁을 얼마나 들어줄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어린아이 하나 건사하는 것쯤은 해 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정 안된다면 엄마에게 부탁해서라도. 그것조차 안 된다면 듀아나 신전에 부탁해서라도.

    “어때? 너만 괜찮다면 내가 할아버지께 말씀을 드려 볼게. 여기서 지내면 숙부님께 부탁드려서 기사 훈련도 받을 수 있어.”

    제프리는 내 제안에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맑고 푸른 눈동자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아니, 제안해 준 건 고맙지만 난 됐어.”

    웬만하면 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했건만, 제프리는 거절 의사를 밝혔다.

    경비병에게 쫓기면서 사회의 혹독함을 경험해 봤을 텐데도 내 제안을 거절했다는 게 놀라웠다.

    “왜? 여기 있는 게 더 낫지 않겠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에게 질문했다.

    제프리는 내게서 고개를 돌려 연못을 바라보았다. 그는 선뜻 대답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했다.

    나는 제프리의 답을 기다리며 함께 연못을 바라보았다.

    연못에 달이 비치고 있었다. 달은 유유히 연못에 흐르다가 이내 연못의 끄트머리에 걸려 버렸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 그리고 너한테 더 신세 지고 싶지 않아.”

    “…….”

    “그동안 네가 나한테 너무 많은 것을 해 줬잖아. 짐마차에서는 감자도 나눠 줬고, 나한테 걸려 있던 수배도 풀어 주고 빚까지……. 내가 어떻게 여기서 더 빚질 수 있겠어?”

    제프리는 내가 해 주었던 것들을 전부 빚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조금 서글픈 마음이 들어서 고개를 저었다.

    “이건 빚이라고 생각 안 해도 돼.”

    “아냐. 나는 나 나름대로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제프리는 빙긋 웃는 얼굴로 말했다. 연못을 바라보며 웃는 제프리의 얼굴이 유난히 어른스러워 보였다.

    이제 열한 살인데 뭐가 그리 어른스러운지.

    “정말 괜찮겠어?”

    “응.”

    “나 더 안 물어본다.”

    “그래. 괜찮대도. 근데 대신에…….”

    피식거리며 대답하던 제프리가 조건을 입에 달았다.

    무슨 내용인가 싶어서 제프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조금 전까지 무척 어른스러웠던 제프리가 이번에는 또 쑥스럽다는 듯이 나를 힐끔거리며 훔쳐보기 시작했다.

    “대신에…… 앞으로 가끔씩 이렇게 찾아와도 돼?”

    내게 무슨 부탁할 거라도 있나 싶었더니 부탁이 아니었다.

    “그럼. 대신 연락도 없이 정원수를 넘어서 찾아왔다가 경비병이나 다른 사람한테 들키면 큰 경을 치를 수도 있어. 그러니까 가급적이면 연락하고 찾아와.”

    “응! 그렇게 할게.”

    내가 허락을 내리고 나서야 안심한 듯 함박웃음을 짓는 제프리의 모습이 귀여웠다.

    “미라벨!”

    그때 어디선가 나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엄마의 것이었다.

    “누구야?”

    “우리 엄마야.”

    제프리가 궁금하다는 듯 물어보는 것에 짧게 대꾸했다.

    “너 찾으시는 거 아니야? 여기 계속 있어도 돼?”

    우려하며 말하는 제프리를 보며 난감하게 웃었다.

    내가 자리를 오랫동안 비우고 있었더니 엄마가 걱정돼서 나를 찾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엄마한테 가 봐. 걱정하시겠다. 나도 이만 갈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제프리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후 크게 뱉어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도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려고?”

    “응. 오늘 카렌으로 갈 거야. 오늘 밤에 그쪽으로 출발하는 상단이 있거든.”

    짧은 말이었지만, 그가 나와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상단의 짐마차를 타고 이동하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늘은 여기서 쉬고 가지.”

    “그러고 싶은데 나도 일정이 있거든. 너도 알다시피 때를 맞추지 않으면 놓치고 말 거야. 이번에 카렌으로 가려면 지금 움직여야 해.”

    엉덩이를 팡팡 털며 말하는 제프리를 보며 아쉬움을 느꼈다.

    “언제든 와. 대신 연락은 미리 하고.”

    “알겠어. 대신 너무 자주 찾아온다고 핀잔주기 없기야. 알았지?”

    “당연하지.”

    장난기 가득한 그의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나갈 땐 정문으로 나가도 돼.”

    굳이 들어왔던 길로 다시 나가고자 하는 제프리를 향해 말했다.

    제프리는 어깨를 한번 으쓱 추어올렸다.

    “아냐. 오늘은 정식으로 찾아온 손님도 아니니까 이대로 갈게. 다음에 정식으로 찾아오면, 그때는 제대로 나갈게.”

    말을 마치며 제프리가 정원수를 통과해 지나갔다.

    더는 그가 보이지 않게 되고, 걸음 소리조차도 멀어지고 나서야 나는 정원에서 몸을 돌렸다.

    “미라벨, 어디 있니?”

    다시금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곧 엄마의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래 걷지 않아 주변을 돌아보며 나를 애타게 찾는 엄마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엄마!”

    내가 엄마를 향해 다가가자 엄마가 나를 발견하고는 길게 숨을 뱉어냈다.

    “벨, 대체 어디 있었던 거니? 얼마나 걱정했다고.”

    엄마가 걱정스럽게 말하며 내 뺨을 매만졌다. 부드러운 손길에 나는 미안한 것도 잊고 배시시 웃어버렸다.

    “친구가 찾아와서 얘기하고 있었어.”

    “친구? 어디?”

    엄마가 내 친구를 찾으려는 듯이 주변을 살폈지만, 당연하게도 아무도 찾을 수 없었다.

    “금방 가서 못 찾을 거야.”

    “…….”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엄마가 무릎을 굽히며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미라벨, 혹시 친구를 사귀고 싶은 거니?”

    내 말을 다르게 이해한 엄마가 걱정을 담아 내게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 추어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중에, 나중에 걔가 찾아오면 엄마한테도 소개시켜 줄게.”

    “……그래.”

    내 말에 엄마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두 손을 뻗어 나를 가볍게 안아주었다. 그런 뒤 다시 나를 품에서 놓아 주고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춥겠다. 들어가자.”

    “응.”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