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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30)화 (30/174)

30화

모든 치료가 끝난 후 제프리에게서 물러났다.

“와아.”

나조차도 내가 사용한 신력이 신묘하여 감탄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제프리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무심결에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매만졌다.

“……안 아파.”

보통이라면 상처를 입었으니 만질 때 따끔거리는 통증이라도 남아 있어야 했을 텐데, 신력에 의해 모두 치료된 덕에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그러더니 팔뚝에 났던 상처들도 확인했다. 뺨뿐만이 아니라 그의 팔에 났던 상처들 역시 모두 말끔하게 치료된 후였다.

나도 내가 직접 신력을 사용했다는 것에 놀라서 내 손을 바라보았다.

비브르가 준 신력이 바로 이런 거구나.

직접 신력을 사용하고 나서야 비브르가 정말 수호룡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첫인상에 고작해야 펜던트 안에 들어있는 정령 정도려니 생각한 게 무색할 정도였다.

“이거 네가 치료해 준 거야? 방금 그 하얀 빛으로?”

제프리가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그런 거 같아.”

“미라벨 너 정말 대단하다.”

순수하게 감탄을 터트리는 제프리 덕에 놀란 마음도 곧 풀어졌다.

“나도 처음 써 봐. 신기하다.”

“처음이라고?”

“응.”

제프리가 아직 어린아이라 다행이었다.

만일 성인이었다면 일이 번거로워질 뻔했는데, 그런 불상사를 막을 수 있었다.

“그래서 제프리, 너 왜 날 찾아온 거야? 감자 갚으려고? 감자는 천천히 갚아도 되는데.”

분위기를 환기할 겸 제프리에게 웃으며 물었다.

그가 나를 찾아온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리고 제프리가 나를 찾아올 이유를 떠올려 보니 생각나는 게 있기는 했다.

내가 제프리에게 짐마차에서 나눠 주었던 감자에 대한 것이었다. 제프리가 그걸 두 배로 갚는다고 했으니 어쩌면 그걸 갚기 위해 나를 찾아왔을지도 몰랐다. 그런 거라면 이렇게 무모하게 찾아오지 않아도 되었는데.

그러나 내 말에 제프리는 멋쩍게 웃으며 뺨을 긁적거렸다.

“그게…….”

내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달싹거리던 제프리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거 까먹었어.”

“뭐?”

“아, 그러네. 내가 너한테 감자도 갚아야 하는구나. 깜빡하고 있었어.”

제프리가 낭패라는 듯이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말했다.

볼일이 있다기에 당연히 감자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아예 잊고 있었던 제프리를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뭐야. 난 그거 때문에 온 줄 알았는데. 일단 이리로 와. 계속 서서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까. 저쪽에 앉을 만한 곳이 있어.”

장소를 옮기기 위해 제프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프리는 이번에도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제프리를 작은 연못 근처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어린아이들이 앉아도 거뜬할 만큼 커다란 돌이 바닥에 박혀 있었다.

“자, 앉아. 다른 데는 사람들이 많아서 안 되고, 여기는 괜찮을 거야.”

화려하고 분위기가 좋은 자리는 이미 사람들이 모여 하하 호호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런 외진 곳에 있는 작은 연못가나 되어야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다.

비록 마법구도 없어서 달빛에 의존해야 앞이 보이는 곳이었지만, 그래도 제프리와 대화하기에는 나쁘지 않은 장소였다.

“그래서 여기 찾아온 이유가 뭐야? 따지는 건 아니고, 정말 궁금해서 그래. 이렇게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날 찾아온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내가 돌 위에 털썩 앉으며 묻자, 제프리가 내 옆에 앉았다.

“너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꼭 하고 싶어서 왔어.”

“인사?”

뜬금없는 제프리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프리는 망설이는 듯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나를 보며 쓰게 웃었다.

“크라이튼 대공가에서 나에게 내려진 수배령을 모두 없애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수배령뿐만이 아니라 가이만에게 진 빚 전부 갚아 줬다고 하더라고. 처음에는 갑자기 크라이튼 대공이 왜 나에게 이런 은혜를 베푼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몇 번이나 경비대를 찾아갔다가…… 우연히 크라이튼 대공을 만나게 됐어.”

“할아버지를?”

내가 놀라서 되물었다. 제프리는 묘한 눈길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한동안 말을 꺼내지 않았다.

왜 그러는지 몰라서 그에게 다시 말을 걸려는 찰나에 제프리가 입을 열었다.

“그래. 네 할아버지. 크라이튼 대공이 이유를 묻는 나한테 모든 건 자기 손녀가 부탁한 일이고, 내 상황을 다 파악해 보셨더니 딱하다며 나를 도와준 거라고 했어.”

확실히 크라이튼 대공에게 제프리의 수배를 풀어 줄 것을 부탁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제프리의 빚까지 갚아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아니, 나는 애초에 제프리에게 빚이 남아 있는지도 몰랐다.

크라이튼 대공은 내가 부탁했던 것을 잊지 않고 제프리와 관련된 것들을 꼼꼼히 조사한 후에 수배령을 풀고, 빚도 대납해 준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 손녀가 누굴까 찾고 있었는데, 며칠 전에 널 봤어. 크라이튼 대공가의 마차를 타고 듀아나 여신의 신전으로 향하는 모습을.”

제프리의 말에 손뼉을 쳤다.

마차를 타고 듀아나 신전으로 향할 때 보았던 사람이 제프리가 맞는 모양이었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구나.”

“응.”

제프리가 작은 목소리로 수긍했다.

“나에게는 미라벨 헤일이라고 알려줘서 전혀 예상도 못 하고 있었어. 근데 생각해 보니 맞는 거 같더라고. 넌 할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이곳 수도로 온 거잖아? 그리고 크라이튼 대공은 10년 만에 딸을 찾고, 손녀까지 생겼지. 뒤늦게 알게 됐어. 크라이튼 대공의 손녀가 바로 너구나, 미라벨.”

제프리는 자기가 모든 상황을 추리한 과정을 꼼꼼히 내게 설명했다.

그리고 그의 추리가 모두 맞았음을 확인했다.

“맞아. 내가 할아버지께 부탁드렸어. 네가 수배당하는 건 너무 억울한 처사라고 생각해서.”

내가 순순히 수긍하자 제프리가 내 눈을 똑바로 주시했다.

그의 파란색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의 눈가에 맺힌 물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끼는지도 몰랐다.

“너한테 어떻게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할지 모르겠어. 사실 난 네가 나한테 감자를 준 것도 정말…… 큰 은혜라고 생각했는데.”

작아지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이야기하면서 찬바람에 노출이 되었기 때문인지 그의 손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럼 그냥 나한테 고마워, 한마디만 하면 돼. 그 이상은 필요 없어.”

내가 작게 그에게 속삭이자 제프리가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린 나이에 세상에서 혼자가 되는 기분은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때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살아가는 게 얼마나 힘들고 혹독한지, 아마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알 수 없을 터였다.

제프리는 경비대에 쫓기면서도 꿋꿋한 척하고 있었지만, 그 근간은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아무리 강한 척을 해 봐도 한순간에 혼자가 된 아이였다.

살기 위해서 상단의 짐마차를 얻어타고 다니면서 얼마나 외롭고, 또 무서웠을지…….

그러던 어느 날 그를 한계로 몰아붙이던 수배령이 사라지고 빚마저 없어졌으니 놀랍고 허탈하기도 했을 터였다.

나는 조용히 제프리를 안고 그의 등을 가볍게 토닥거려 주었다.

제프리는 끝끝내 울음을 터트리지는 않았다.

차라리 속 시원히 울기라도 하면 좋았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게 제프리 나름대로 설움을 극복하는 방법이라면 그 방법을 존중해 주어야 할 터였다.

한참이나 내 품에서 거칠어진 숨을 삭힌 제프리가 내게서 떨어졌다.

그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미안. 그리고…… 고마워.”

제프리가 기어가는 듯한 소리로 내게 사과와 고마움을 전했다.

나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나중에 혼자 울고 싶으면 울어. 그거 빌려줄게.”

두 손으로 손수건을 받아든 제프리가 손수건을 가만히 매만졌다. 그러더니 골똘히 고민에 빠졌다.

무슨 고민인가 싶어 물어보려던 찰나, 제프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것도 두 배로 갚을까?”

“뭐?”

“아니, 다른 건 그렇다고 쳐도, 감자는 두 배로 갚기로 했잖아. 그럼 빚도, 손수건도 두 배로 갚아야 하지 않을까?”

제프리는 자기에게 주어진 빚을 꼭 갚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어깨를 한 번 으쓱 추어올렸다.

“마음대로 해.”

제프리는 마음대로 하라는 말에 한동안 손수건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에 담긴 감정이 그리 부정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상쾌한 듯이 보여서 다행이었다.

한참 가만히 움직이지 않던 제프리가 씩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가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이건 안 갚을래. 그래도 되지?”

아예 갚지 않겠다는 의미로 꺼낸 제프리의 말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안 갚아도 돼.”

말을 마치고 제프리를 한참 바라보았다.

확실히 우울해하는 모습보다는 이렇게 밝은 모습의 제프리가 훨씬 보기 좋았다.

“왜 그렇게 봐?”

내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제프리가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안 갚아도 된다고 해놓고 갚으라고 하는 거 아니지?”

쓸데없는 의심을 하는 제프리의 말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냥. 네 머리가 너무 예뻐서.”

대충 둘러댄다고 말한 게 이런 거였다.

썩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제프리의 은색 머리칼은 달빛을 머금어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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