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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29)화 (29/174)
  • 29화

    무도회는 생각보다 늦게까지 이어졌다.

    해가 저물어 저녁 시간이 되고 나서도 무도회장의 흥이 꺼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엄마도, 그리고 황후 폐하도 모두 이 시간까지 무도회장에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꽃을 피우는 게 당연한 듯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지루함에 지쳐 칭얼거리다가 그를 호위하는 기사에게 업힌 채 무도회장을 떠났다.

    엘리엇과 제니엘은 두 사람만의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는 듯이 보였다.

    내 주변으로도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크라이튼 대공가와 어떻게든 연을 맺고 싶은 사람들이 아직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내게 다가와 칭찬을 일삼았다.

    칭찬의 종류는 대부분 태어나서부터 외지에 있다가 돌아온 거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우아하고 완벽하다는 아부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나는 대충 그들의 말을 웃으며 넘겼다.

    만일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아홉 살짜리 꼬마 여자아이였다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당황하다가 사람들 사이에서 고립되었을 뻔했다.

    그나마 과거의 성인이었던 경험으로 천진하게 웃는 척하며 사람들의 칭찬을 받아넘길 수 있었다.

    저녁이 되니 솔직히 조금 피곤해졌다.

    어린아이 특유의 반짝하는 체력은 좋았지만, 그만큼 피로도 빨리 찾아오기 때문이었다.

    나는 무도회 한쪽에 서서 팔짱을 낀 채로 무도회장 내부를 돌아보았다.

    사람들은 이제 각자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엄마도 황후 폐하도 한창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크라이튼 대공과 브라이언, 그리고 다니엘 역시 다른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에 정신이 쏠려 있었다.

    즉, 지금 나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이었다.

    있을 만큼 있었고, 또 할 만큼 했으니 이만 돌아갈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이대로 들어간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는 없을 터였다.

    잠시 고민하다가 걸음을 움직였다.

    내가 향하는 곳은 무도회장 바깥에 마련된 정원이었다.

    내내 실내에만 있다 보니 답답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침실로 돌아가면 속이 답답해서 급체라도 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정원에는 환한 빛을 내는 마법구가 이곳저곳에 장식되어 있어서 특별히 어둡거나 앞이 안 보이지는 않았다.

    마법구 가격이 꽤 비쌀 텐데, 역시 대공가는 이런 사소한 것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구나 싶어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정원을 둘러보았다.

    이미 춤 연습을 하며 몇 번 방문해 본 적 있는 정원이었지만, 낮의 전경과 밤의 전경은 굉장히 큰 차이가 있었다.

    마법구와 정원수가 이루어 낸 조합은 마치 동화 속의 숲에 와 있는 듯이 아름다웠다.

    그 때문인지 정원에도 많은 사람이 나와 있었다.

    몇몇은 무도회장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기도 했고, 분수대 앞에서 소소하게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정원 끝자락에서 부스럭거리는 기묘한 소리를 들었다.

    호기심에 소리가 난 곳을 찾아 움직였다.

    정원과 외부의 경계가 되는 커다란 정원수가 심긴 곳이었다. 그곳은 마법구의 불빛조차도 희미하게 닿는 외진 장소였다.

    혹시나 침입자가 있는 거라면 당장 경비병을 부를 생각에 최대한 경계하며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그 끝에서 익숙한 얼굴을 한 남자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이고, 힘들다.”

    정원수 사이를 억지로 비집고 들어온 아이가 끙끙거리며 정원 안으로 기어들어 왔다.

    머리에 붙은 나뭇잎이나 흙에서 뒹군 듯 지저분한 옷차림, 그리고 뺨, 팔 등에 난 생채기로 말미암아 그 아이가 이곳까지 들어오는 데 얼마나 많은 수고를 들였을지가 눈에 선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제프리?”

    “응? 으악!!”

    도저히 상황 파악이 안 돼서 단도직입적으로 제프리에게 물었다.

    제프리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에 놀랐는지 허둥거리다가 그대로 잔디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워낙 볼품없이 나동그라지는 탓에 그만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혹시 웃었다가 기분이 상할까 염려되어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아 내었다.

    “자, 일어나.”

    내가 손을 내밀자 제프리가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어린아이답지 않은 거친 손이 내 손을 크게 감싸 쥐었다.

    내가 곧 힘을 주자 제프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말 걸어서 깜짝 놀라는 바람에 넘어졌잖아.”

    제프리가 내 손을 놓고는 두 손으로 엉덩이에 묻은 흙을 팡팡 털어내며 툴툴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여기서 뭐냐고 따져야 할 사람은 제프리가 아니라 나인 것 같았다.

    “아니, 제프리. 너 왜 여기 있는 거야?”

    헛웃음을 터트리며 그에게 물었다. 제프리는 목이 아픈지 목에 손을 얹고 좌우로 흔들며 대답했다.

    “왜 여기 있기는? 너 보러 왔지. 사람들이 널 보려면 여기로 와야 한다길래. 한참 숨어서 돌아다닌 다음에야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만났네. 오랜만이야, 미라벨.”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이 이야기한 제프리가 씩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미소가 전보다 가벼운 듯이 보였다.

    “웃을 때가 아니야. 너무 무모했어. 여기 있던 게 내가 아니라 경비병이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잘못 걸렸으면 큰 처벌을 받았을 거야.”

    내 지적에 제프리가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글쎄, 거기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확실히 그랬으면 곤란하긴 했겠다.”

    제프리가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

    너무 태연하고 무모한 말이었다. 짐마차에서 만났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제프리는 조금 막무가내인 성격 같았다.

    “그래도 안 걸렸으니까 됐지. 굳이 일어나지 않은 일은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아.”

    본인이 위험해질 수 있었다는 것을 이해했으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기는 건지, 아니면 이해하지 못한 건지 알 수 없는 제프리의 발언에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러다가 제프리의 머리에 시선이 꽂혔다. 그의 머리에는 정원수를 통과해 올 때 붙은 나뭇잎이 여전히 붙어 있었다. 아무래도 머리 부분이라 제프리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영 거슬려서 제프리에게 다가갔다. 갑작스럽게 좁아진 거리에 제프리가 당황하며 뒤로 반걸음 물러났으나 내가 제프리보다 먼저였다.

    손을 뻗어 제프리의 머리에 붙어 있는 나뭇잎을 떼 주었다.

    “네 말대로 오늘은 운이 좋아서 안 걸렸지만, 다음에는 조심해. 네 몸 네가 챙겨야지.”

    “아, 으, 으응.”

    제프리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말했다.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상처도 많네.”

    “이,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그의 얼굴에 난 작은 생채기를 보며 말하자 제프리가 화들짝 놀라서는 두 손으로 뺨을 가리며 말했다.

    기겁하며 놀라는 모습이 귀여웠다.

    잠시 그런 제프리를 보다가 목에 걸린 펜던트를 매만졌다.

    분명히 비브르가 내게 두 가지 신력을 주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하나는 비브르의 비늘로 만든 검, 레피드였고, 또 다른 하나는 보편적으로 듀아나 여신의 사제들이 사용할 수 있는 신력이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기로, 듀아나 신전의 사제들은 치유의 힘을 갖고 있었다.

    안 그래도 한번 사용해 보고 싶었는데 마침 상처가 난 제프리가 내 앞에 나타났다. 속에서 이는 호기심에 제프리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제프리, 이리로 와 볼래? 내가 상처를 좀 볼게.”

    “이, 이, 이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제프리가 크게 당황하여 좌우로 도리질을 쳤다.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물론, 제프리의 말대로 나무에 쓸린 가벼운 상처였기 때문에 그대로 놔둬도 적당히 나을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제프리가 이렇게까지 거부하는데 내 억지를 부리기도 민망해서 결국 포기하고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러자 제프리가 눈을 빠르게 감았다 뜨더니 이내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을 내렸다.

    “아냐. 봐도 돼. 마음껏 봐!”

    조심성 없이 외치는 소리에 내가 외려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어 소리를 듣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조심하래도.”

    “앗, 미안.”

    제프리는 그제야 혀를 내밀며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그런 제프리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의 뺨에 난 상처에 손을 대었다.

    내가 만지는 게 쓰라린 모양인지 제프리가 눈살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신력을 받기는 했으나, 사용하는 방법을 모르니 다시 원점이었다.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 거지?

    [손끝에 신력을 싣는 거야.]

    그때 들려온 것은 목에 얌전히 걸려 있던 비브르의 목소리였다.

    “비브르?”

    “응?”

    내가 무심코 비브르의 이름을 언급하자 제프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황급히 의아해하는 제프리를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때, 비브르가 다시 내게 말을 걸었다.

    [너에게는 쉬울 거야. 넌 나에게 선택받은 아이니까. 한번 해 보렴.]

    비브르의 말에 다시금 제프리의 뺨으로 손을 뻗었다.

    신력이라는 게 어떤 느낌인지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고민에 빠져있는 사이, 내 손끝에서 옅게 빛이 나기 시작했다.

    뺨에서 피어난 빛에 제프리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거렸지만, 내게서 멀어지지는 않았다. 겁은 나지만, 나를 믿어 주는 듯한 모습이었다.

    약 3초 정도의 시간이 지나 곧 빛이 스러졌다.

    조심스럽게 제프리에게서 손을 떼자, 그의 뺨과 몸에 나 있던 작은 상처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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