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28)화 (28/174)
  • 28화

    “네 이름이 미라벨이라고 했지?”

    에이드리안이 내게 질문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이드리안이 내 이름을 몇 번 중얼거렸다.

    “이름 예쁘다.”

    배시시 웃으며 대답하는 에이드리언이 조금은 귀엽게 느껴졌다.

    “그렇게 말해 줘서 감사해요. 황태자 전하의 성함도 멋있어요.”

    “그럼. 이 이름은 황제 폐하께서 직접 지어 주신 이름인걸.”

    에이드리안이 위풍당당한 기세로 말했다. 그러다 돌연 나를 보며 내 눈치를 살피는 듯이 눈을 깜빡거렸다.

    “있잖아, 미라벨.”

    “네?”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서 에이드리안을 바라보자 에이드리안이 수줍어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춤……출래?”

    “춤이요?”

    뜬금없는 제안이었다. 그가 내게 춤을 추자고 제안할 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에 당황스러움에 그를 바라보았다.

    “응. 다들 그랬어. 무도회에 오면 춤추는 거라고.”

    에이드리안은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나도 무도회에서 춤을 추게 될 거라는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도회에 내 또래가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엘리엇하고 한 번 춤추면 되나 싶었는데, 무도회에서 처음으로 추는 춤이 에이드리안과의 춤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다.

    뭐, 그래도 딱히 싫은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한 번은 출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거기다 황후 폐하께서 옆에서 지켜보고 계신데 에이드리안의 춤 신청을 거절하는 것도 굉장히 눈치가 보였다.

    “좋아요. 그럼 정식으로 춤 신청 해 주실래요?”

    춤을 추자고 내게 제안했으면서, 내가 선뜻 받아들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에이드리안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허둥지둥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잠깐만!”

    에이드리안이 내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배웠던 것을 최대한 떠올리는 듯 어색한 동작으로 한쪽 무릎을 굽힌 채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름다운 레이디, 저랑 춤을 추시겠어요?”

    춤 신청 멘트까지도 꼭 외운 듯했다.

    그래. 아직 어린 나이에 이 정도로 외운 것만 해도 충분히 잘한 거지.

    나는 피식 웃으며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영광이에요, 황태자 전하.”

    내가 긍정하자 곧 무릎을 굽혔던 에이드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어려서부터 뭘 배우긴 배웠는지 에이드리안은 나를 회장의 중앙으로 데려왔다.

    그러더니 어색하게 손을 내밀어 춤을 추기 위한 포즈를 잡았다.

    나 역시 그동안 메이너드 자작 부인에게 배웠던 것을 떠올리며 자세를 잡았다.

    “할게!”

    아직 자연스럽게 시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에이드리안이 내게 통보했다.

    그러더니 천천히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나는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리드하는 에이드리안을 확인했다.

    그러다가 그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작게 소리를 내어 웃어 버렸다.

    “하나, 둘……. 하나, 둘…….”

    에이드리안이 열심히 박자를 세며 춤을 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찌나 집중하고 있는지 내가 웃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그런 에이드리안의 노력을 가상히 여겨 못 본 척하기로 했다.

    다행히도 그가 집중해서 춤을 추려 한 덕분에 스텝이 꼬이는 일은 두 번밖에 일어나지 않았다.

    박자를 놓친 에이드리안이 내 발을 밟거나 헛발을 디디는 바람에 넘어질 뻔한 것 정도였다.

    다행히 넘어지려는 에이드리안을 내가 자연스럽게 받아 내어 볼썽사납게 뒹구는 처지는 면할 수 있었다.

    우리가 아슬아슬한 모습을 보여 줄 때마다 멀리서 사람들이 탄식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 무도회의 주인공인 나와 황태자 에이드리안의 춤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이목이 주목된 것 같았다.

    그 탓인지 에이드리안은 춤을 출 때 더욱 몸을 긴장시켰다. 나를 받치고 리드해야 하는 그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 가는 게 여실히 느껴졌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리드를 하는 꼴이 되었다.

    봄날 나비의 춤처럼 통통 튀던 발랄한 음악이 서서히 멎어갔다.

    나름대로 무도회에서 첫 춤을 춘 것치고는 잘했다고 생각하며 노래가 끝나가는 타이밍에 맞추어 그의 손을 놓았다.

    나는 배웠던 대로 그에게서 한 걸음 떨어진 채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잡고 무릎을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

    “영광이었습니다, 황태자 전하.”

    에이드리안 역시 황급히 예의를 차리며 내게 인사했다.

    “저도 영광이었습니다, 레이디.”

    우리가 서로를 보며 인사를 나눈 그 순간이었다.

    주변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박수 소리에 놀라서 주변을 돌아보니 무도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우리 두 사람을 보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를 달고 있는 채였다.

    “이렇게 보니 황태자 전하와 미라벨 소공녀께서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맞아요. 두 분께서 꼭 어린 신랑 신부 같아요.”

    “방금 춤추는 거 보셨어요? 어쩜 저렇게 귀여우신지!”

    박수 소리 사이로 사람들이 너스레를 떠는 것이 들려왔다.

    아직 그 소리가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에이드리안만 눈을 깜빡거렸다. 엄마와 황후 폐하는 그 소리에 난감한 듯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이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크라이튼 대공가와 황실이 한때 틀어졌던 사이를 회복하고 다시 인연을 맺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굳이 그런 것까지 고려해서 에이드리안과 춤을 춘 건 아니었는데, 왠지 조금 난처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미라벨!”

    나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엘리엇이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금발 머리의 어린 여자아이가 있었다. 나보다 서너 살 정도 많을까 싶은 아이였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엘리엇은 에이드리안을 향해 고개를 까딱여 인사했다. 에이드리안 역시 엘리엇에게 고개만 까딱거리며 인사를 받았다.

    “급하게 배웠다고 들었는데 엄청 잘 추던데?”

    엘리엇은 에이드리안에게 인사가 끝난 후 나를 향해 기특하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그런 엘리엇을 마주 보며 어깨를 한번 으쓱 추어올렸다.

    “이 정도는 금방 해. 그런데 옆에 있는 분은…….”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엘리엇이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여자아이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러자 여자아이가 엘리엇보다 먼저 내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황태자 전하, 그리고 크라이튼 소공녀. 엠버러 슈페른 백작의 딸 제니엘 슈페른이라고 합니다.”

    나는 제니엘 슈페른의 소개를 들은 후에야 그녀가 엘리엇의 짝사랑 상대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만나서 반가워. 난 에이드리안 카스트로야.”

    에이드리안이 제니엘 슈페른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엘리엇을 한 번 흘긋 바라본 후 환하게 웃으며 제니엘 슈페른을 향해 인사했다.

    “처음 봬요. 저는 미라벨 크라이튼이에요.”

    “네, 엘리엇에게 말씀 많이 들었어요. 이번에 크라이튼 공녀님과 함께 대공가로 돌아오셨다고요.”

    “맞아요. 아직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조금 서투르지만, 잘 부탁드릴게요.”

    다정하게 웃는 제니엘은 내가 보기에도 시선을 빼앗길 정도로 귀엽고 예뻤다.

    청초한 느낌이 난다고 할까?

    어린아이인데도 이런 백합과 같은 느낌이 나는 사람을 처음 봐서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슬쩍 엘리엇을 살펴보았다.

    미래에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된다는 걸 알고 있기도 하고, 엘리엇이 지금도 제니엘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니 괜히 장난기가 돌았다.

    “근데 두 분은 춤 안 추세요? 저랑 황태자 전하는 췄는데요.”

    내가 운을 떼자 제니엘과 엘리엇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두 사람 모두 귀까지 얼굴이 빨개지는 게 제법 귀여웠다.

    “설마 엘리엇, 춤 못 추는 거 아니지?”

    내가 주저하는 엘리엇에게 천진하게 물었다.

    “내가? 아닌데? 나 춤 잘 춰.”

    조금 삐걱거리는 음성으로 대답한 엘리엇이 제니엘을 다시금 힐끔거리다가 몸을 돌렸다.

    “저, 제니엘…….”

    “으, 으응.”

    “나랑, 춤출래?”

    평소 나와 함께 있을 때 보여 주었던 자연스럽고 당당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색하고 딱딱한 엘리엇이 제니엘에게 춤을 청했다.

    그런데 웃기게도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엘리엇뿐만이 아니었다.

    “그, 그럴까?”

    방금까지 화사하고 예쁘게 웃던 제니엘 또한 엘리엇의 춤 제안에 목각인형처럼 뻣뻣해져 버린 것이었다.

    그래도 서로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좋아서 부끄러움을 어쩌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으니까.

    곧 엘리엇이 제니엘을 에스코트했다. 그리고는 홀 중앙에서 오케스트라단의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숫기 없는 모습을 보여 주기에 제대로 춤이나 출 수 있을까 싶었지만, 신기하게도 춤을 출 때는 자연스럽고 우아했다.

    어린아이들이 춤을 추는 게 우아하다고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가 춤을 출 때도 그랬을까?

    부끄럽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사실 에이드리안이 춤을 엄청 잘 춘 것도 아니었고, 나도 다 배웠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충분히 연습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기에 엘리엇과 제니엘이 추는 것만큼 자연스럽고 우아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우리를 보고 박수를 친 건 역시 어린애들 재롱떠는 걸 보는 기분이었겠지.

    게다가 에이드리안은 황태자였고, 나는 크라이튼 대공가의 소공녀였다.

    다들 치켜세워 줄 만하니 그런 반응을 보였던 거겠지.

    나는 엘리엇과 제니엘의 모습이 보기 좋아서 한동안 자리에 멈추어 선 채로 두 사람의 춤을 바라보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