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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27)화 (27/174)
  • 27화

    엘리엇의 에스코트를 받아 크라이튼 대공가의 연회장으로 향했다.

    길목에서 몇몇 귀족들이 엘리엇을 알아보고 알은체했다. 그들은 엘리엇의 에스코트를 받는 나에게도 관심을 보이려 했지만, 엘리엇이 철벽처럼 차단해 버리는 바람에 결국 포기했다.

    나는 어차피 연회장에서 만날 거 미리 인사해도 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연회장 내부도 아니었고, 외부에서까지 상대하면 안으로 들어가기 더 힘들어질 거라며 엘리엇이 짧게 충고했다.

    확실히 연회장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다른 사람들의 인사를 다 받아주다 보면 제시간에 무도회장으로 들어가지도 못할 것 같았다.

    마침내 연회장 입구에 도착했다.

    하인은 나와 엘리엇을 보고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공자님, 그리고 소공녀님. 입장을 고할까요?”

    “그렇게 해 줘.”

    엘리엇이 하인의 질문에 답했고,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인은 곧 연회장 입구를 열어 주며 커다란 소리로 외쳤다.

    “엘리엇 크라이튼 공자 듭시오! 미라벨 크라이튼 소공녀 듭시오!”

    연회장에 우리 둘의 입장을 알리는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엘리엇과 함께 천천히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연회장 안쪽에 브라이언과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두 분은 흐뭇한 얼굴로 우리의 입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도착해 있던 터라 장내가 혼란스러울 것이라 예상했는데, 이상하게도 우리가 계단을 내려서는 동안 아무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오케스트라단의 연주 역시 멈춘 후였다.

    침묵과 주목 속에서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서자 조금씩 소곤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한 명씩 또는 무리를 지어 우리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말로만 들었던 코넬리아 공녀님의 영애시군요.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저는 마가리타 레포네 백작 부인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레포네 백작 부인. 미라벨 크라이튼입니다.”

    사람들이 기꺼운 얼굴로 나에게 인사했다.

    나는 그동안 배웠던 예법대로 그녀에게 인사했다.

    이어서 다른 사람들도 너나 없이 자신을 내게 소개하기 시작했다.

    소개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크라이튼 대공가와 인연을 맺고 싶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나는 그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차라리 몬스터 토벌대에 참여해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는 게 내게는 더 익숙하고 편안했다.

    용병대에 들어가는 것조차 번잡스러워서 피하던 성격이었기에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이는 것은 익숙하지 않아서 곤혹스러웠다.

    몇몇 사람들은 내게 또래의 자녀들이나 조카들을 소개해 주겠다며 운을 떼었는데 사실 그런 제안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누가 누구를 소개해 준다는 건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한참 누군지 모를 자작의 인사를 받고 있을 때였다.

    “알렉산더 크라이튼 대공 각하 듭시오! 다니엘 크라이튼 듭시오!”

    크라이트 대공의 입장을 알리는 소리가 울렸다.

    크라이튼 대공과 다니엘이 함께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크라이튼 대공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인 나를 발견하고는 내게 손짓했다.

    가까이 오라는 의미로 보였다.

    “미라벨, 대공 각하께 가 봐.”

    내가 차마 가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자 엘리엇이 내게 제안했다.

    “대공 각하께서 널 사람들에게 소개해 주려는 거야. 오늘 연회의 주인공은 너와 고모님이니까. 가서 인사해야지.”

    엘리엇이 나를 재촉했다.

    “그럼 가 볼게.”

    “응. 잘해.”

    엘리엇의 응원을 받으며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크라이튼 대공에게 다가갔다.

    내가 크라이튼 대공의 앞에 서자, 크라이튼 대공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가, 손을 잡지 않으련?”

    크고 투박한 손. 하지만 내게는 항상 다정하게 내밀어 주었던 손이었다.

    “네, 할아버지.”

    나는 기꺼이 웃으며 크라이튼 대공의 손을 잡았다. 크라이튼 대공이 흡족한 얼굴로 웃음을 지었다.

    멀리 있던 엄마도 크라이튼 대공과 내 사이로 다가왔다.

    “엄마랑도 손잡지 않을래?”

    엄마도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다른 손으로 엄마의 손을 잡았다.

    나는 곧 양쪽에 크라이튼 대공과 엄마를 대동한 채로 연회장의 단상 위로 향하게 되었다.

    우리가 걸어갈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마침내 단상 위에 섰을 때, 크라이튼 대공이 연회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다들 무도회에 참석해 주어 고맙소.”

    말을 잠시 마친 크라이튼 대공이 엄마를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엄마도 크라이튼 대공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이쪽은 알다시피 사랑하는 나의 딸 코넬리아 크라이튼.”

    크라이튼 대공이 엄마를 소개하자 엄마가 고개만 숙여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를 보내었다.

    “그리고 여기 이 꼬마 숙녀님은 내 목숨보다 사랑해 마지않을 손녀딸 미라벨 크라이튼이오.”

    나 역시 크라이튼 대공이 나를 소개하는 타이밍에 맞추어 예를 갖춰 인사했다. 엄마 때와 마찬가지로 내가 인사를 하자 박수가 쏟아졌다.

    혹시나 예법에 어긋나게 하지는 않았나 걱정하며 고개를 들고 보니 크라이튼 대공과 엄마가 흐뭇하게 나를 바라보는 게 보였다.

    내가 뭔가 틀리게 한 건 없는 모양이었다.

    “코넬리아는 괜찮겠지만, 미라벨은 아직 많은 것이 서투를 테니 그대들이 이해해 주길 바라겠소. 그럼 다시 한번 코넬리아와 미라벨의 귀환 무도회에 참석해 준 것에 감사의 인사를 드리오. 준비한 것들을 마음껏 즐기도록 하시오.”

    “축하드립니다, 대공 각하!”

    “공녀님과 소공녀님이 돌아오셔서 정말 기쁘시겠어요!”

    크라이튼 대공의 개회사가 끝나자 사람들이 축하의 말을 하나씩 건네었다.

    들을 만큼 축하의 말을 들은 후에야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연회장 중앙으로 내려왔다.

    그러는 사이 크라이튼 대공의 주변은 사람으로 가득 차 버렸다.

    내게 했던 것처럼 크라이튼 대공에게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며 쓰게 웃었다.

    크라이튼 대공은 이런 일이 익숙한 듯이, 그리고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모두 기억하는 듯이 그 사람들과 인사하고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제 더 올 사람이 없는 건가 싶을 무렵, 뒤이어 뜻밖의 손님이 연회장에 도착했다.

    “마리안느 카스트로 황후 폐하 듭시오! 에이드리안 카스트로 황태자 전하 듭시오!”

    이어지는 손님의 이름에 연회장이 일순 조용해졌다.

    문이 열리고 곧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서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리안느 황후 폐하는 일전에 만나 뵈었던 것처럼 아름답고 우아했다.

    그리고 마리안느 황후 옆에 있는 에이드리안은 어린 나이부터 무뚝뚝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나보다 두 살 어리면 이제 일곱 살일 텐데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 와도 별 감흥이 없는 모양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에이드리안이 나를 발견했다.

    아직 어린 에이드리안은 황후 폐하의 손을 잡고 나와 엄마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엄마가 먼저 황후 폐하와 에이드리안을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

    나 역시 엄마를 따라서 인사하자 황후 폐하가 손을 내려 내 뺨을 어루만졌다가 손을 회수했다.

    “다시 만나서 반갑구나, 미라벨.”

    부드러운 손길이 지나고 난 후, 마리안느 황후 폐하가 엄마를 보며 웃었다.

    “너도 그간 잘 지냈지?”

    “정말 와 주실 줄 몰랐어요. 어려운 걸음이었을 텐데 정말 감사해요.”

    “너와 네 딸을 위한 연회인데 내가 어떻게 빠질 수가 있겠어?”

    엄마와 황후 폐하께서 나누는 대화를 지켜보다가 에이드리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에이드리안은 무언가 할 말이라도 있는 건지 나를 빤히 주시하고 있었다.

    “하실 말씀 있으세요?”

    내가 의문을 이기지 못하고 묻자 에이드리안이 눈썹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저번에는 놀라게 해서 미안했어. 내가 사과할게.”

    사과는 하고 있었지만, 딱히 반성한 말투는 아니었다.

    나는 딱히 그때의 에이드리안이 내게 잘못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나랑 부딪치기는 했지만, 넘어진 건 에이드리안이었으니까. 게다가 에이드리안이 그때 응접실을 찾아온 이유도 내 입장에서는 납득이 갔다.

    에이드리안은 그동안 마음고생한 황후 폐하를 보고 엄마를 혼내 주고 싶어 했다. 그렇게 하는 게 황후 폐하를 위한 거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 나이 대의 어린애가 할 만한 생각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황후 폐하와 엄마가 해후를 풀게 되었으니 더 잘된 일이었다.

    “괜찮습니다, 황태자 전하. 사과해 주셔서 감사해요.”

    내가 웃으면서 그에게 대답하자, 에이드리안이 빤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가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졌지만, 딱히 피할 것도 없어서 마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에이드리안이 손을 불쑥 내밀었다.

    “그럼 우리 친구 할래?”

    “친구요?”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눈을 크게 떴다.

    옆에서 우리를 바라보던 엄마와 황후 폐하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잠시 망설이며 그의 손을 확인했다. 나보다도 작은 손으로 악수를 청하고 있었다.

    손을 뻗어 그의 작은 손을 잡았다.

    그러자 에이드리안이 손을 크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럼 우리 오늘부터 친구 하는 거야. 알았지?”

    “네, 그렇게 해요.”

    에이드리안의 말에 확답하니 그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천진해 보이는 그의 웃음이 귀엽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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