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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26)화 (26/174)
  • 26화

    비브르의 부탁을 듣기로 결정한 이후, 나는 펜던트를 벗어서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

    비브르가 우는 것을 굳이 방해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플레온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부탁을 거절하지 않은 게 너무 감격적이었던 걸까?

    좀처럼 알 수 없었다.

    궁금한 것과 별개로 나도 침대에 누운 채 한동안 잠에 빠지지 못했다.

    플레온이 재가 되어 사라졌던 것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신전에서 만난 플레온의 모습은 내가 알던 것보다 더욱 나이 들어 보였다.

    나를 찾고, 또 만나기 위해 많은 시간 공들였기 때문일까?

    끝내 자신의 힘으로 악룡의 부활을 막지 못한 그가 무슨 생각으로 나를 찾았을지 계속해서 신경이 쓰였다.

    이른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펜던트를 챙겼다. 목에 걸고 나자 눈을 감고 있던 비브르가 눈을 뜨는 것이 보였다.

    [어려운 결정 해 줘서 다시 한번 고맙다는 인사 전하마.]

    “그래. 그래도 뭐, 당장은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 그렇게 고마워할 거 없어.”

    비브르가 눈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내가 너에게 전해 준다고 했던 신력을 기억하니?]

    “응. 기억해.”

    비브르가 제안한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였다.

    악룡 크립소에게 지배받는 자를 대적할 신력이라고 했던가.

    내가 알고 있는 신력은 치료의 힘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내가 듀아나 신전에 들렀던 이유이기도 했다.

    조금은 기대하는 마음으로 거울을 바라보았다.

    비브르는 웃는 듯한 눈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너에게 주려는 건 두 가지 힘이란다. 하나는 너도 알다시피 듀아나 여신님의 은총을 받은 사제들이라면 사용할 수 있는 그 신력이고, 다음은 물리적인 것이란다.]

    “물리적인 것?”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자 비브르가 눈을 감았다.

    곧 펜던트에서 옅은 빛이 나기 시작했다. 성스럽게 느껴지는 그 빛은 이내 펜던트에서 빠져나와 허공에 어리기 시작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빛을 향해 두 손을 뻗었다. 빛을 받쳐 안듯이 공손한 자세였다.

    그러자 곧 빛이 길쭉하게 변하더니 형태를 구성했다.

    “와!”

    완전히 형태를 구성한 것이 내 두 손 위에 천천히 내려섰다.

    그것은 검이었다.

    검 손잡이부터 날까지 아주 아름다운 백금 색의 성스러운 검.

    나는 조심스럽게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어린 내가 들기에도 부담이 없을 정도로 가벼운 검이었다.

    검을 가볍게 휘둘러 보았다.

    아직은 내가 휘두르기에 검신이 너무 길었다.

    하지만 잘 훈련하다 보면 금세 익숙해질 것도 같았다.

    [어때? 마음에 드니?]

    “응. 마음에 들어.”

    [그 검은 나의 뼈로 만들어진 검이란다. 크립소에게 지배받는 자는 악의 기운을 사용하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매우 까다로울 텐데, 그 검이 있다면 맞서는 게 어렵지는 않을 거야. 이름은 ‘레피드’야.]

    비브르의 뼈?

    “그런 걸 막 뽑기도 해?”

    뼈로 만들어진 검이라니 왠지 꺼림칙했다.

    검, 레피드를 내려놓을까 잠시 고민하고 있으니 곧 비브르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수호룡이라는 걸 잊었느냐? 나는 과거부터 이어진 악룡 크립소와의 전쟁을 통해 나를 대신해 싸울 인간을 정하였단다. 그리고 나와 함께하는 자에게 준 힘이 바로 그 검이야. 아주 오래전 나의 뼈를 깎아 만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검. 소중히 사용해 주렴. 버리지도 말고.]

    “……알았어.”

    그래도 겉모습만 보면 용의 뼈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웠기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검이 다니엘을 몰아낼 아주 중요한 무기가 될 테니까.

    “그런데 검집은 없어? 그럼 보관하기가 힘들 거 같은데.”

    새로 하나 맞춰야 하나 고민하며 비브르에게 물었다.

    [검집이 따로 필요하지 않아. 그 검은 네가 사용하지 않길 원하면 손에서 사라질 거란다.]

    “정말?”

    신기한 마음에 검을 바라보며 사용하지 않겠다, 고 생각했다. 그러자 레피드가 투명하게 흐려지더니 사라졌다.

    내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자 비브르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가 사용하고자 한다면 다시 나타날 거야.]

    그 말대로였다. 다시 검을 쓰겠다고 생각하자마자 바로 내 손에 나타난 것이었다.

    [신력이 담긴 검이야. 네가 그걸 사용하는 걸 본다면 크립소의 힘에 지배당하는 자들이 금세 널 알아볼 거야. 그렇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숨겨두는 걸 추천한다.]

    “신기하다.”

    나는 말을 마치며 다시 레피드를 휘둘러 보았다.

    과거 검을 휘두르던 기억을 되살려 움직이니 어색하지 않게 움직일 수 있었다.

    어차피 오늘은 무도회로 인해서 새벽 훈련이 없었다.

    하루 종일 무도회로 피곤할 테니 오늘만큼은 오전에 휴식을 좀 더 취하라는 브라이언의 배려였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검이 생겼는데 휘두르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검술을 쓴 지가 너무 오래돼서 벌써부터 검을 어떻게 휘둘렀는지 기억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최대한 기억을 되살려볼 겸 오늘은 침실에서라도 레피드를 휘둘러 볼 생각이었다.

    과거로 돌아오며 손과 발이 짧아졌기 때문에 긴 검신이 가끔 바닥에 끌렸지만, 그런 것은 검에 익숙해지면서 서서히 나아질 것이었다.

    정신없이 레피드를 휘두르며 스스로 감을 찾아가던 순간이었다.

    똑똑, 익숙한 노크 소리가 침실을 찾아왔다.

    “작은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아니타의 목소리였다.

    나는 얼른 손에 쥐고 있던 레피드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응. 아니타. 들어와.”

    내가 허락을 내리니 아니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평소라면 세숫물이 담긴 대야를 왜건에 실어 왔을 아니타였지만, 오늘은 빈손이었다.

    “……작은 아가씨?”

    “왜?”

    괜히 도둑질이라도 하다 들킨 것처럼 아니타를 바라보았다.

    아니타는 침실의 상태를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침실이 왜 이래요? 혹시 도둑이라도 들었나요?”

    “도둑?”

    나는 그제야 침실을 확인했다. 긴 검신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침실 바닥에 볼품없는 칼자국이 남아 버렸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글쎄? 왜 이러지?”

    내가 시치미를 떼자 영문을 모르는 아니타는 복잡한 시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건 작은 아가씨께서 씻으러 가면 제가 보고를 올릴게요. 그럼 보수할 수 있을 거예요.”

    “부탁할게, 아니타.”

    다행히도 더 캐묻지 않는 아니타를 향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럼 작은 아가씨, 목욕물을 미리 준비해 놨으니 어서 욕실로 가요.”

    “그래, 가자.”

    아니타의 안내를 받으며 욕실로 향했다.

    칼리나를 위시한 다른 하녀들 모두 내 무도회 준비를 위해서 정성을 쏟았다.

    정성스러운 손길로 목욕을 마친 후에는 마사지를 받았다. 그런 후에 분홍색의 귀여운 드레스로 갈아입고, 머리를 치장했다.

    얼마 안 걸릴 거라고 생각했건만, 오전부터 시작된 준비는 정오가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준비를 마치고 나니 벌써 무도회가 열리는 시간이었다.

    “오늘은 정말 특별한 날이에요.”

    머리를 정성스럽게 빗어 주던 칼리나가 내게 말했다.

    치장 중인 터라 움직일 수가 없어서 눈만 들어 거울에 비친 칼리나를 바라보자 칼리나가 눈웃음을 지었다.

    “성인이 될 즈음에 데뷔탕트가 되어서 무도회에 처음으로 참가하는 게 보통이거든요.”

    “그래?”

    “네. 하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거든요.”

    “어떤 경우인데?”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칼리나에게 묻자 칼리나가 뿌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녀님 같은 높은 지위에 있는 분들은 굳이 그런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돼요. 그리고 그건 우리 작은 아가씨도 마찬가지고요. 크라이튼 대공가의 소공녀신걸요.”

    나는 새삼스럽게 크라이튼 대공가가 황실에 버금가는 권력을 쥐고 있다는 걸 떠올렸다.

    이러니 다니엘이 크라이튼 대공가를 노리는 거겠지.

    하지만 어제 비브르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면 다니엘은 크라이튼 대공가만을 노리는 게 아닌 듯싶었다.

    결과적으로 그가 하고자 하는 건 악룡의 부활이었다.

    크라이튼 대공가를 차지하는 건 추측하자면 일차적인 목표였던 걸까?

    “자, 다 됐습니다. 어떠세요?”

    거울 속에 비치는 내 모습이 정말로 귀여웠다.

    이 저택에 도착해서 매일매일 나는 내 어린 모습에서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있었다.

    “정말 예쁘다. 고마워, 칼리나. 언제나 예쁘게 꾸며 줘서.”

    “아니에요, 작은 아가씨. 작은 아가씨께서 귀엽고 예쁘셔서 어떻게 꾸며도 잘 나오는걸요.”

    나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한 번 더 살폈다.

    분홍색이 포인트로 들어간 귀여운 드레스에 곱게 묶은 양 갈래머리 그리고 꽃 모양 머리핀까지.

    고생이라고는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 보이는 귀족 집 꼬마 아가씨의 모습이 따로 없었다.

    “이제 가실 시간이에요. 밖에서 공자님께서 기다리세요.”

    아니타가 시간을 확인하며 나를 보챘다.

    결국, 거울에서 시선을 떼고 파우더룸 밖으로 나왔다.

    “다 끝났니?”

    파우더룸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엘리엇이 나를 발견하고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얼른 가자.”

    “그래. 그럼…… 귀여운 꼬마 아가씨, 저와 함께 무도회에 가지 않으시겠어요?”

    엘리엇이 과장스러운 동장으로 내게 에스코트를 청했다.

    나는 메이너드 자작 부인에게 배웠던 것을 떠올리며 최대한 우아한 동장으로 엘리엇의 손에 내 손을 조심스럽게 얹었다.

    “영광이죠, 멋진 꼬마 신사님.”

    내가 대답하자 곧 엘리엇이 낮은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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