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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25)화 (25/174)

25화

[네가 악룡 크립소의 봉인이 풀리는 걸 막는다면 듀아나 신전에서 너를 성녀로 극진히 대우하게 될 거란다. 너도 플레온의 사례를 보았을 테니 그게 얼마나 큰 보상인지는 알 거야. 그리고 또…….]

내 질문에 비브르가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이 술술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니. 내 말은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야.”

[……그럼 대체 무얼 바라는 거니? 금은보화가 필요하니?]

비브르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네가 조금 전에 다니엘이 악룡 크립소의 봉인을 해제하려 한다고 확신하듯 말했지. 그건 네가 이미 다니엘이 악룡과 어떤 연결 고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 아니야?”

[그렇단다.]

“그럼 그와 관련된 자세한 정보를 내게 줄 수 있겠지. 안 그래? 그 정보가 있으면 다니엘을 치는 것도 쉬울 거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많겠지.”

비브르가 바라는 게 악룡의 봉인이 풀리지 않는 거라면, 나는 다니엘이 목적이었다.

다니엘이 차후에 크라이튼 대공가를 차지하는 일을 막을 수 있는 거라면 나는 뭐든지 할 자신이 있었다.

다니엘이 악룡의 봉인을 깨트리기 전에 그를 처리해 버릴 수 있다면, 비브르도 좋고, 나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내 상황에서는 다니엘을 처리할 방법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런 일을 하기에 지금의 나는 너무 어렸다. 고작 아홉 살의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당장 내가 그를 죽이려고 달려들어도 다니엘이 힘을 주어 나를 쳐내기라도 한다면 당장 바닥에 나뒹굴 터였다.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방법은 있을 테지만, 아쉽게도 다니엘을 크라이튼 대공가에서 몰아내기에는 가문 안에서의 그의 입지가 생각보다 공고했다.

크라이튼 대공은 설마하니 친동생인 다니엘이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고는 의심조차 하지 않는 듯이 보였고, 엄마나 브라이언 역시 다니엘에게 반감이 있지 않은 듯했다.

저택에서 다니엘에게 가장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나와 엘리엇 정도일까?

그러나 나랑 엘리엇이 그를 싫어한다고 해서 계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세대가 두 번 교체되기 전까지 다니엘을 몰아낼 방법은 없다고 봐야 옳았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 다니엘이 크라이튼 대공가를 접수하겠지.

내 기억으로 14년 후.

적어도 내가 성인이 되는 11년 후에 뭘 해 보고 싶어도 3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촉박했다.

그러나 다니엘이 악룡 크립소를 깨우려 한다는 것을 증명해 낼 수 있다면, 어쩌면 지금이라도 그를 몰아낼 수 있을지 몰랐다.

이 펜던트 속에 있는 게 정말 수호룡 비브르고, 또 듀아나 신전에서 다니엘의 악행을 증언해 준다면 못 할 것도 없겠지.

[네가 무얼 바라는지 알겠다.]

그러나 들려오는 비브르의 목소리는 힘을 잃은 상태였다.

[하지만 나는 다니엘 크라이튼이 악룡의 봉인을 깨트리려 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는 것이 없구나.]

“뭐라고?”

예상치 못한 답에 헛웃음이 터졌다.

[내가 아는 건 다니엘 크라이튼이 크립소의 봉인을 풀려 한다는 것과 그를 주축으로 악룡을 섬기는 이들이 모이고 있다는 점이야. 그리고 크립소는 특정 장소에 있는 게 아니야. 나를 보거라. 나 역시 이 작은 펜던트 목걸이에 갇혀 있지 않니?]

확실히 비브르가 들어있는 펜던트 목걸이는 작았다. 기껏해야 보통 로켓의 갑 정도 크기일까?

수호룡이라는 비브르도 그런 작은 곳에 갇혀 있었으니, 악룡이라고 뭐 더 엄청난 곳에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악룡도 이런 작은 로켓 같은 곳에 봉인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기대했을 텐데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구나. 미안하단다.]

비브르는 힘없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하지만 내가 듣고 싶었던 것은 그런 사과가 아니었다.

내게는 마치 모든 정보를 아는 것처럼 말해 놓고, 정작 중요한 정보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니?

그래놓고 나보고 다니엘을 막으라고?

[대신 너에게 악룡에게 지배받는 자를 대적할 신력을 보태 주마.]

황당해하는 나에게 비브르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나는 가만히 거울 속에 비치는 펜던트를 바라보다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어떻게 다니엘이 악룡의 봉인을 풀 거라는 걸 알았어? 이렇게 정보가 없다시피 한데 무슨 근거가 있으니 다니엘이라고 특정한 거 아니야?”

[그래. 다니엘 크라이튼이라는 자가 크립소의 봉인을 풀려 한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란다. 그리고 그 근거는 바로 내 경험이고.]

“경험? 그럼 다니엘이 악룡의 봉인을 풀려는 걸 봤단 말이야?”

[그래. 너는 미래를 한 번 겪고 왔으니 플레온이 성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거야. 그렇지 않니?]

맞는 말이었다.

내가 과거로 돌아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성자로 이름이 높은 사람이었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비브르가 말을 이었다.

[플레온 역시 크립소의 부활을 막기 위해 나의 선택을 받았던 성자였다. 나는 그에게 힘을 주었고, 그는 나의 힘을 사용하여 크립소의 힘이 미치는 자들을 하나둘씩 찾아내었지.]

비브르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온전히 눈을 감은 후에야 비브르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내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크립소를 숭배하고 있더구나. 그리고 그중에서도 크립소의 힘에 준하는 악한 인간을 발견했단다.]

“그게 다니엘이었군.”

[맞아. 하지만 오랜 시간 힘을 키우고 크립소의 봉인을 깨트리기 위해 노력해 온 다니엘을 상대하기에는 아무리 신력의 힘이 있다 하더라도 플레온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단다.]

과거를 떠올리는 게 매우 힘들었던 탓인지 비브르가 잠시 침묵했다.

나는 비브르가 다시금 말을 꺼낼 때까지 침묵을 유지했다.

[결국…… 우리는 실패했고, 악룡 크립소가 봉인에서 깨어났지.]

침통한 음성으로 그가 얼마나 깊은 괴로움을 참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크립소의 부활을 막지 못하고, 죽음의 끝에 선 플레온이 내게 부탁했다.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면 다니엘 크라이튼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그래서 찾은 게 나구나.”

[맞아. 너를 찾기 위해 나와 플레온이 많은 힘을 들였지. 플레온은 마지막 남은 힘을 자신을 봉인하는 데 사용했고, 나는 너를 찾아서 시간을 되돌렸단다.]

내가 죽음에서 돌아온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는가 보다.

그저 갑작스러운 기적이 벌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단순히 기적이라고만 할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비브르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붉은 눈이 유독 흐린 것 같았다.

[플레온은 신전에서 줄곧 너를 기다렸다. 너는 죽은 후에 곧장 과거로 돌아왔다고 생각했겠지만, 너를 찾고 또 과거로 보내기 위해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거든. 그러다가 과거로 돌아온 네가 마침내 듀아나 여신님의 신전을 방문한 거야. 플레온은 너를 만나기 위해 봉인을 풀었고, 내가 봉인된 펜던트를 너에게 전달했지. 그게 그의 마지막 역할이었으니까…….]

플레온은 자신의 역할을 다해 내 앞에서 죽음을 맞이한 모양이었다.

썩 유쾌하지 않은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감사는 전해야겠지.

과거로 돌아온 덕분에 나는 평생 그리워했던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있었고, 또한 엄마를 죽음에서 구원할 수 있었다.

[아무 정보가 없었던 우리가 찾아낸 것이 바로 다니엘 크라이튼이었단다. 그래서 너에게 알려 줄 수 있는 건 그자가 크립소의 봉인을 풀 자라는 것 외에 알려 줄 것이 없구나.]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래도 어느 정도 플레온과 비브르가 이해 되기는 했다.

저들도 최선을 다해 악룡 크립소의 봉인이 깨어지는 것을 막고 싶어 했지만, 끝끝내 막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잠시 펜던트를 매만졌다.

[내 부탁을 거절하고 싶다면, 신전에 도로 나를 가져다 주렴.]

비브르는 거의 포기한 듯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비브르가 원하는 것은 악룡의 부활을 막는 일이었고, 나는 악룡의 힘을 빌린 다니엘을 처리하는 게 목적이었다.

나는 내 힘으로 직접 그를 몰아낼 생각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악룡의 힘을 빌리는 그를 나 혼자 처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다니엘의 곁에 악룡이 함께라는 걸 안 이상, 나 역시 혼자의 힘으로만 그를 견제할 수는 없었다.

나 역시도 다른 힘을 사용하여 그를 견제해야만 했다.

기왕이면 같은 목표를 갖고 있는 비브르와 함께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한다면 듀아나 신전까지도 나의 편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럼 비브르, 네가 원하는 건 어쨌든 악룡의 봉인이 풀리기 전에 다니엘을 처리하는 거지?”

[……그래.]

“그래, 좋아. 네 부탁, 들어줄게. 어차피 내 목적도 다니엘이니까.”

[정말이냐?]

내 착각인가 싶었지만, 펜던트 속 비브르의 눈이 커진 것 같았다.

“거짓말 안 해. 뭐 하러 그러겠어? 어차피 거절할 거면 이대로 신전으로 되돌려 보내기만 하면 될 텐데.”

[…….]

비브르는 잠시 말이 없었다.

비브르도 당장 좋다고 할 줄 알았는데 뜻밖의 반응이었다.

혹시 이래 놓고 미안하다고 스스로 거절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럴 리가 없을 터였다.

이대로 거절할 거라면 무엇 하러 나를 과거로 돌려놓았겠어?

[정말…….]

마침내 비브르가 말을 꺼냈다.

비브르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았다.

[정말로 고맙구나. 어려운 결정이었을 텐데 내 부탁을 들어준다고 해서.]

잘 들어보니 비브르가 꼭 우는 것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비브르의 눈도 일렁거리는 게 보였다.

나는 괜히 머쓱한 기분이 들어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천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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