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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24)화 (24/174)
  • 24화

    나는 거울 앞에 서서 내 목에 걸린 펜던트를 들여다보았다.

    “네가 내게 말을 걸었니?”

    펜던트에게 말을 건다고 스스로 생각하니 우스웠지만, 어차피 방에는 나 혼자뿐이었고 정말 상대가 펜던트가 맞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기 때문에 주저하지 않고 펜던트를 향해 말을 걸었다.

    [그래. 내가 말을 걸었단다, 인간 아이야.]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리며 펜던트 속의 뱀이 눈을 깜빡였다.

    내 추측이 모두 맞는 모양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펜던트 속의 뱀이 너야?”

    내가 묻자 뱀이 눈을 반짝였다.

    [그래. 이 몸은 듀아나 여신님의 수호룡 비브르란다. 여신님의 가호가 닿는 땅이라면 나의 이름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을 텐데, 알고 있니?]

    “비브르?”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었다.

    듀아나 여신의 손과 발이 되어 주는 수호자가 뱀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물론 평범한 뱀은 아니었다.

    하얗고 긴 뱀의 몸체에 루비를 닮은 붉은 눈동자, 그리고 하얀색의 커다란 피막 날개.

    그것이 신화 속에서 언급되는 듀아나의 수호룡 비브르의 특징이었다.

    하지만 미심쩍기는 했다.

    무슨 여신의 수호룡이 펜던트 안에 갇혀 있으며, 왜 펜던트 속 뱀 그림에는 수호룡 비브르의 특징인 하얀색 피막 날개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글쎄, 근데 왜 여신의 수호룡이라는 네가 펜던트 속에 갇혀 있는 건데?”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어. 악룡과의 아주 커다란 전쟁이 있었거든. 믿어 주렴, 인간 아이야. 나는 정말 수호룡 비브르란다.]

    내가 심드렁한 표정을 하고 있자 펜던트가 자신이 수호룡 비브르라는 것을 피력했다.

    그러나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실리지 않고 있었다.

    스스로도 대답하며 내가 믿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자칭 비브르가 눈을 길게 감았다가 떴다.

    플레온이 말한 게 수호룡 비브르였겠지.

    듀아나 여신의 신전, 그리고 나를 기다리던 미래의 성자 플레온, 플레온이 내게 전달해 준 듀아나 여신의 수호룡 비브르가 봉인된 것으로 추정되는 펜던트 목걸이까지.

    영 못 미덥다는 듯이 이야기하긴 했지만, 내가 앞서 경험한 일들이나 플레온의 죽음을 떠올리면 그가 정말 수호룡 비브르일 거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래, 비브르. 일단은 그렇게 주장하니 믿어는 줄게.”

    당장은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펜던트 속 뱀이 진짜 비브르가 아니라고 해도 별로 상관은 없었다.

    만일 단순히 영적인 존재가 갇힌 마법 아티팩트라고 해도 무언가 쓸모가 있을 터였다.

    보통은 많은 지식이 있거나, 마법적인 효능을 올려 주거나 하는 방식인데, 과연 이 펜던트는 어떤 능력이 있는 걸까?

    처음에는 펜던트가 너무 꺼림칙해서 거부했었는데 지금 이렇게 목에 직접 걸어 보니 왜 그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마법 아티팩트 같은 건 줄 알았으면 진작 걸어 보았을 텐데.

    “그래서, 플레온 성자님께서 나한테 너를 준 이유가 뭐야? 성자님의 말대로라면 내가 갖고 있는 궁금증을 네가 해소해 줄 수 있다고 하던데.”

    내가 질문하자 비브르가 잠시 숨을 골랐다.

    [맞아. 나에게 모든 질문의 답이 있어.]

    운을 뗀 비브르가 눈을 두 번 깜빡였다.

    [가장 먼저, 네가 죽음 이후에 과거로 돌아온 이유가 궁금할 거야. 그렇지 않니?]

    썩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이유를 들을 수 있게 되었으니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싶어. 얘기해 줄래?”

    [네가 회귀할 수 있었던 건 악룡 크립소의 흔적이 네게 남았기 때문이야.]

    “……뭐?”

    비브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악룡 크립소?

    맹세컨대 마물을 토벌하러 다닌 적은 있어도 용과 마주한 적은 없었다.

    애초에 나는 용이 전설로나 내려오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는 없고 전설에서만 볼 수 있는 허구의 존재.

    그리고 내가 용이 실존하지 않는다고 믿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용병 생활을 하며 돌아다니는 동안 용을 만난 적도, 용을 만나 본 적이 있다는 사람을 만난 적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가 용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에 과거로 회귀한 거라는 이야기를 하다니.

    게다가 그 용이 평범한 용도 아니고 악룡이라니?

    뭐, 동화 속의 내용처럼 공주님을 납치하는 용이라도 된다는 의미일까?

    스스로 생각하고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비브르와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더욱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줄어들고 있었다.

    [인간 아이야, 너는 악룡 크립소의 지배를 받는 인간에게 죽임을 당했단다.]

    내가 황당해하고 있자 비브르가 첨언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이전까지는 느끼지 못한 흥미를 느꼈다.

    나를 죽인 사람이 악룡 크립소의 지배를 받는 인간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크라이튼 대공을 배신한 다니엘 크라이튼에게 죽임을 당했었다.

    그렇다는 말은 곧 다니엘이 악룡 크립소인지 뭔지 하는 존재와 어떤 연결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것도 아직까지는 추상적인 것에 불과했다.

    나는 내가 직접 보았던 것 외에는 신뢰하지 않는 편이었다.

    비록 다니엘이 크라이튼 대공가를 빼앗으려 하기는 했지만, 스케일 자체가 너무 달랐다.

    대공가 하나 차지하려고 악룡에게 영혼이라도 바쳤다는 걸까?

    아무래도 영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자세히 이야기해 줄래? 악룡은 뭐고, 악룡에 지배당한 사람은 또 뭔지.”

    [그 전에 너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 내가 전해 주는 이야기를 모두 듣게 되거든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지 않으련?]

    “부탁이 뭔데?”

    비브르가 내게 부탁하고 싶은 내용이라니.

    혹시 악룡이라도 처치해 달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어린 나이에 용병으로 이름을 크게 날리기는 했지만, 용을 처리할 정도로 검술 실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따진다면 어린 내가 아니라 나보다도 검을 잘 다루고 능숙하며, 강한 사람을 찾아가는 게 옳겠지.

    그리고 그 조건에 부합할 만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지금의 브라이언이나 미래의 엘리엇이었다. 아니면 용병왕의 칭호까지 얻었던 제프리 정도일까?

    뭐, 회귀 전의 나라면 서포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용병왕 제프리나 브라이언, 엘리엇에 버금갈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수준급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애초에 내가 크라이튼 대공의 의뢰를 받게 된 것도 제국에서 활동하는 용병 중 나름대로 이름이 알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미안하지만 악룡을 죽이는 일이라면 사양이야.”

    [다행이구나. 내 부탁은 악룡을 죽이는 게 아니니!]

    밝은 목소리에 나도 안심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비브르의 말에 얼굴을 다시 굳힐 수밖에 없었다.

    [용은 죽일 수 없다, 가엾은 인간 아이야. 용은 죽지 않아. 다만 그 힘을 봉인하여 잠재울 뿐이지.]

    “그 말은?”

    [나를 대신해서 악룡 크립소의 봉인이 풀리는 걸 막아 주렴!]

    해맑은 목소리로 비브르가 내게 부탁했다.

    터무니없는 내용이었다.

    “미안하지만, 난 그럴 힘도, 여유도 없어.”

    내가 딱 잘라서 거부하자 비브르가 시무룩한 티를 내며 낑낑거렸다.

    [하지만, 이건 네가 원하는 일이기도 할 게다.]

    “네가 나를 과거로 돌려보낸 존재라면, 내가 과거에 용병이었다는 걸 잘 알 거야. 그렇지?”

    [재화를 받고 일을 대신 해 주었던 그때의 일을 말하는구나.]

    “그래, 맞아. 그리고 나는 용병으로 다니면서 하나의 철칙을 세웠어. 내가 받는 것만큼의 일을 하자는 거야. 근데 악룡을 봉인이 풀리는 걸 막으라니,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

    내가 황당해서 따지자 비브르가 침묵을 유지했다.

    더 할 말이 없어서 그런다고 생각해서 이제 펜던트를 벗으려는데 비브르가 내게 다시금 말을 걸었다.

    [인간 아이야, 네가 원하는 건 복수잖아. 안 그러니?]

    비브르의 말에 막 펜던트 목걸이를 벗으려던 손이 멈추었다.

    [그럼 내가 이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겠구나. 내가 너를 선택한 이유. 널 굳이 과거로 데려온 이유.]

    “뭔데, 그게?”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그에게 묻자 비브르가 눈을 깜빡였다.

    [악룡 크립소의 봉인을 해제하려는 자가 바로 다니엘 크라이튼이라는 인간이야.]

    나를 죽인 자가 악룡 크립소의 지배를 당한 존재라고 했으니 다니엘이 관련이 있을 거라고 짐작은 했다.

    그런데 비브르는 단순히 관련이 있는 자일 뿐만이 아니라 직접 악룡의 봉인을 해제하려는 자이기까지 하다니…….

    [악룡의 지배를 받는 자들은 그런 자들을 일컫는 말이야. 악룡의 봉인을 풀려는 자들. 나는 너에게 용을 죽이라 하지 않아. 다만 악룡 크립소의 봉인이 풀어지지 않도록 막아 줘. 그게 안 된다면 다시 봉인을 해 줬으면 한다.]

    비브르가 간절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사정하는 듯한 어조라서 나도 조용히 비브르의 말을 들어 주었다.

    그리고 모든 말을 듣고 난 후에야 대략적인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요컨대 비브르 네가 바라는 건 다니엘을 막아 달라는 말이지? 그걸 위해서 다니엘의 손에 죽은 나를 과거로 돌려보내 주었고.”

    확인차 비브르에게 물었다.

    [맞아! 그를 막으면 악룡 크립소의 봉인도 막을 수 있어!]

    비브르의 목소리에는 희망이 가득했다.

    나는 펜던트 목걸이를 풀려던 손을 내려놓은 후 거울을 빤히 응시했다.

    “그럼 넌 내게 뭘 줄 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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