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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23)화 (23/174)
  • 23화

    듀아나 신전에 다녀온 이후로는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새벽같이 일어나 브라이언에게 체력 훈련을 받았고, 아침을 먹고 난 후에는 가볍게 티타임을 가졌다가, 점심을 먹기 전까지 사교계의 교양을 공부해야 했다.

    점식을 먹은 이후에는 시간을 쪼개어 예의범절과 무도회에서 출 춤을 배우곤 했다.

    가정교사는 어린 시절의 엄마를 가르친 적 있는 메이너드 자작 부인이었다.

    메이너드 자작 부인은 예순을 넘는 나이였음에도 행동 하나하나가 흐트러짐 없이 우아하고 완벽했다.

    처음 귀족가의 예절을 배우게 된 나조차도 빠르게 습득할 수 있도록 매우 강도 높은 지도를 하고 있었다.

    몸을 쓰는 일은 내게 오히려 달가운 일이었다. 가령 예절이나 춤을 배우는 일은 나도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었다.

    가벼운 몸놀림을 내는 법이라든가 춤을 출 때 스탭을 밟는 법도 다행히도 내게는 크게 무리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교양이었다.

    교양은 일반적으로 귀족들이 가지는 소양이었다.

    일종의 상식 같은 것들.

    평민으로 살아왔던 내게는 너무도 별세계의 내용들이었기 때문에 나는 유독 교양을 익히는 게 어려웠다.

    결국 메이너드 자작 부인은 자신이 주는 자료들을 외우고 또 외우는 것을 반복하라고 내게 말했다.해야만 하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과에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게 되었다.

    예절과 무도가 일찍 끝난 덕분에 나는 오전도, 오후도 모두 교양을 공부하게 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걸 완벽하게 하면 좋겠지만, 공녀님께서는 당장 코앞으로 다가온 무도회에서 적당히 대화가 될 정도까지 올라가는 게 목표입니다.”

    내가 유난히 헤매고 있으면 이렇듯 메이너드 자작 부인이 나를 채근했다.

    “공녀님께서는 아직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이런 주제들을 모두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별로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조바심 낼 것 없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알겠어요, 부인.”

    “대답이 너무 느리군요.”

    “알겠어요, 부인.”

    “좋아요. 내일이 지나면 그 뒤는 시간을 충분히 내서 천천히 공부하면 될 겁니다.”

    그래도 완전히 머리가 굳지는 않았는지, 아니면 아홉 살의 습득 능력을 가졌기 때문인지 메이너드 자작 부인이 알려 주는 내용 중에서 절반은 기억해 냈다.

    당연하게도 메이너드 자작 부인은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며 속상해했지만. 내게는 이 정도도 감지덕지였다.

    “그럼 오늘 교양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내일 무도회가 열리기 전까지 제가 드린 자료는 두 번 이상 읽으셔야 합니다.”

    “고마워요, 부인.”

    드디어 메이너드 자작 부인의 교양 수업으로부터 해방이었다.

    예절과 무도를 모두 익히고 나서 그 비어 버린 시간이 교양 수업으로 채워질 줄 알았더라면 예절과 무도를 그렇게 빨리 끝내 버리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천년만년 제자리걸음을 할 수도 없었다.

    어쨌든 모든 수업이 종료되고 내 여유 시간이 생겨야 다니엘의 뒤를 캐고 다닐 수가 있을 테니까.

    이 저택에 있는 간자가 대체 몇 명인지,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서는 나에게 긴 시간이 필요했다.

    이미 몇 년 동안 깊이 파고들었던 자들을 색출해 내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수업이라는 게 하나에서 계속 증폭해 나가다 보니 여유 시간을 가질 수가 없었다.

    메이너드 자작 부인의 말마따나 조바심을 내면 안 되는데…….

    아직 시간은 많았다.

    내가 기억하는 다니엘의 행동 개시일이 14년 후였으니까, 당장은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지는 않겠지.

    게다가 엄마와 다니엘이 접촉하는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에 당분간은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아무렴 다니엘이 엄마를 건든다면 크라이튼 대공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겠지. 그건 정말 다행이었다.

    내일 있을 무도회만 지나면 어떻게든 시간적 여유가 생길 테니 뭐라도 좀 찾아봐야 할 것 같았다.

    “작은 아가씨, 괜찮으세요?”

    내가 녹초가 되어 책상에 엎드려 있으니 아니타가 울상을 지으며 다가왔다.

    나는 그런 아니타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내일 무도회가 끝나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아마도.”

    시간을 충분히 들여서 공부하자고 했던 메이너드 자작 부인의 말을 떠올려 보면 무도회 이후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아질 수 있으리라 믿었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응. 그럴게.”

    아니타의 응원을 받으며 다시 기운을 차렸다.

    그러고는 점심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작은 아가씨, 하나 궁금한 게 있어요.”

    “뭐가 궁금한데?”

    “그…… 이전에 신전에 방문해서 받았다는 그 펜던트 있잖아요. 그거 왜 착용을 안 하세요?”

    “아…….”

    아니타는 신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알지 못하니 내가 왜 펜던트를 께름칙하게 여기는지 모르고 있었다.

    아무리 성자 플레온이 내게 해답을 줄 거라며 건네준 펜던트라고 해도 쉽사리 펜던트를 착용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내가 왜 과거로 왔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미래에서 과거로 회귀한 것 자체가 아주 특별한 일이라는 것은 이해하고 있었다.

    하물며 엄마의 원수를 갚을 기회까지 생겼으니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두 번째 생이었다.

    그렇기에 목적만을 위해서 달려왔다.

    왜 내가 회귀했는지에 대해서 굳이 알 필요도 없었다.

    그렇지만 신경이 안 쓰이는 것은 아니었다.

    버리기에는 아깝고, 갖기에는 꺼림칙한.

    내게 있어서 그 펜던트는 그런 느낌이었다.

    * * *

    저녁 식사를 모두 마치고 목욕까지 끝낸 후에야 한결 가벼운 기분으로 내 침실에 돌아올 수 있었다.

    침실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몸을 실었다. 여전히 침대는 나를 포근하게 감싸 주었다.

    그렇게 잠시 침대에서 뒤척거리던 찰나에, 협탁에 놓여 있던 작은 벨벳 주머니로 시선이 향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는 너무도 명백했다.

    듀아나 신전에서부터 가져와 손 한번 대지 않고 그대로 방치 중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이걸 계속 방치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결단이 필요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협탁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벨벳 주머니를 향해 손을 뻗었다. 부드러운 벨벳의 감촉이 손가락에 닿았다.

    나는 그대로 벨벳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변함없이 날개가 달린 하트 모양의 은색 펜던트 목걸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처음 내가 보았을 때와 달라진 점이 있었다.

    펜던트 전면에 그려졌던 뱀의 눈이 지금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혹시 착각인가 해서 눈을 비벼 뜨고 다시 확인을 해 보았다. 그러나 뱀의 눈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펜던트의 그림을 잘 살펴보았다.

    자세히 보니 펜던트 속의 하얀 뱀은 마치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럴 수가 있을까?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펜던트 안에 있는 뱀은 고작해야 그림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림이 눈을 감고 잔다고?

    차라리 벨벳 주머니 안에서 눈 부분의 안료가 지워졌다고 생각하는 게 더 빠를 터였다.

    나는 진짜 그런 게 아닐까 싶어 벨벳 주머니를 거꾸로 까뒤집었다.

    그러나 안에서는 어떤 붉은색의 안료도 묻어나지 않았다.

    다시 펜던트를 확인하는데 아주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펜던트 속에서 사라졌던 뱀의 눈이 다시 나타났다.

    “이게 무슨…….”

    펜던트 속의 뱀을 계속해서 응시했다.

    뱀 또한 나를 응시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뱀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펜던트 속의 뱀이 눈을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펜던트 속 뱀 그림이 눈을 깜빡이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플레온이 펜던트를 ‘그분’이라고 칭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 왜 플레온이 펜던트를 사람처럼 부르는지 당시에는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이제는 이해가 갈 것 같았다.

    플레온이 ‘그분’이라 지칭했던 것은 단순히 펜던트를 칭하는 게 아니었다.

    정확히는 펜던트 위에 그려진 뱀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럼 정말로 이 뱀이 나에게 진실을 알려줄까?

    의아한 기분이 들었지만, 또다시 펜던트를 벨벳 주머니에 처박아 두기만 한다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고, 그 어떤 것도 해결되지 못할 거란 것을 떠올렸다.

    마침내 용기를 내서 펜던트를 목에 걸었다.

    그러자 아주 특별한 일이 생겨났다.

    [아, 드디어! 나의 목소리가 닿았구나!]

    “누구?”

    머릿속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었다.

    마치 내 또래의 어린 여자아이의 것과 같은 목소리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소리가 어디서 들려온 것인지 몰라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반사적인 행동이었지만, 생각해 보니 내 침실에 다른 누군가가 있을 리가 없었다.

    만일 있었더라면 내가 진작 알았을 테니까. 그것도 아니면 암살자라는 소리인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몇 가지 경우의 수를 지우고 나니 남는 것은 바로 펜던트뿐이었다.

    이 침실에 있는 또 다른 어떠한 존재.

    그렇게 나는 나에게 말을 건 상대가 바로 펜던트의 뱀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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