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22)화 (22/174)
  • 22화

    내가 주저하면서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갑자기 내 앞에 성자님이 나타났다니?

    물론, 이곳이 듀아나 신전이니 듀아나 신전을 대표하는 성자님이 내 앞에 계신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성자님을 만나 뵈러 온 것이 아니라 내 신력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온 것이었다.

    그런데 왜?

    “당신은 성자님이신가요?”

    내가 경계하면서 묻자 플레온이 느리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사방에 울려 천둥처럼 메아리치는 기분이었다.

    정신을 빼놓는 울림에 두 손을 들어 귀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소리를 차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행히도 소리가 오래 울리지는 않았다. 귀를 막았던 손을 내려 얼떨떨한 기분으로 플레온을 바라보았다.

    플레온은 활짝 웃는 얼굴로 내게 말을 걸었다.

    “역시 당신께선 저를 아시는군요. 제대로 찾았나 봅니다.”

    “…….”

    플레온은 내가 그를 알아본 것이 굉장히 만족스러운 듯싶었다.

    “설마 저를 이곳으로 이끈 게 성자님이신가요?”

    내가 차마 앉지 못하고 그에게 따지듯이 묻자 플레온이 나를 직시했다.

    “질문에 대한 해답은 저와 대화를 마치면 얻으실 겁니다.”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성자님께서 왜 저를 부르신 건지…….”

    내가 듀아나 신전과 인연이 있는 거라고는 치료제를 살 때 방문한 것이 전부였다.

    접점이라고는 고작 그런 것뿐인데 대체 왜?

    당황스러움에 중얼거리자 플레온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저를 알고 계시니까요.”

    “…….”

    플레온이 아리송한 말을 꺼냈다.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성자 플레온을 알고 있는 게 뭐가 문제인 거지?

    내가 의아해하는 사이 플레온이 방금 전 했던 말의 의미를 더욱 길게 풀어냈다.

    “정확히는 제가 성자라는 걸 알고 계시니까요. 미라벨 헤일, 당신께서.”

    “네?”

    “미라벨 님. 당신의 나이는 몇이죠?”

    플레온의 질문에 허를 찔렸다.

    처음에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성자 플레온. 내 기억 속에서 너무도 선명한 이름이었기 때문에 그를 알고 있다는 게 왜 그를 만날 사유가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시간이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말대로 현재엔 플레온이 성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터였다.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나타난 듀아나 신전의 성자.

    그것이 내 앞에 있는 노인의 정체였으니까.

    그리고 플레온은 내가 그를 ‘성자 플레온’으로 알고 있기에 나를 찾은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의 말이 무엇을 시사하는지 깨닫고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가 내 나이 스무 살에 나타난다는 말은, 지금 이 시간대의 일반인들이라면 ‘성자 플레온’이라는 호칭을 몰라야 한다는 말이었다.

    물론, 나까지도.

    그런데 나는 너무 자연스럽게 그를 성자라고 생각해 버렸다. 내게는 그게 당연했으니까.

    “일단 앉으시지요. 대화를 좀 나눠야 하지 않겠습니까? 미라벨 님, 당신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플레온은 재차 그의 앞에 있는 빈자리를 권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가 권한 자리에 주춤거리며 다가가 앉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어찌 되었든 그와 대화를 나눌 필요성이 있었다.

    “미라벨 님. 당신은 아마 미래를 알고 계실 겁니다. 당신께선 미래에서 온 자니까요. 그렇지요?”

    질문이었지만, 어조는 확신하는 듯이 명료했다.

    나는 주름이 가득한 그의 눈을 자라보다가 순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맞아요. 전부는 아니지만.”

    “당신이 이곳에 오기를 정말 많이 기다렸습니다.”

    “저를 왜요?”

    미래에서 돌아왔다고 해 봤자 내가 아는 건 굉장히 한정적인 정보들이었다.

    길에서 노숙하는 법, 걸리지 않고 상단의 짐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법 같은 게 대체 무슨 쓸모가 있을까?

    무언가 중요한 역할이 되어 미래의 정보를 활용해야 한다면, 그건 나 같이 용병 생활을 전전하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이 아니라 좀 더 숭고하고 정의롭고 똑똑한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플레온은 내 당황스러움을 이해한다는 듯이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당신을 과거로 되돌려 준 존재가 당신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게 누구예요?”

    내가 주저하며 묻자 플레온이 손을 움직였다. 지레 겁을 먹고 목을 움츠리자 플레온이 허허거리며 웃었다.

    “자, 이걸 받으시지요.”

    플레온이 품에서 작은 벨벳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끈을 풀어 헤치고 닫혀 있던 입구를 벌리자 날개가 달린 하트 모양의 펜던트가 나왔다.

    독특하게도 은색으로 이루어진 이 펜던트의 정면에는 빨간 눈을 한 하얀색 뱀의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일단 플레온이 건네주어서 펜던트를 받았다.

    그 외에 더 특별한 뭔가가 있나 싶어서 앞뒤로 펜던트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특이사항은 발견하지 못했다.

    전체적으로 어린아이나 할 법한 귀여운 장식의 펜던트였다.

    “이게 뭐예요? 이걸 대체 저한테 왜…….”

    “그분이 미라벨 님을 이곳으로 부른 장본인입니다. 그 펜던트를 가지고 계시면, 미라벨 님께서 왜 과거로 왔는지 알려 줄 겁니다.”

    플레온이 짧게 펜던트를 소개했다.

    나는 플레온을 한 번, 그리고 펜던트를 또 한 번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저를 데려온 장본인이 ……이 펜던트라고요?”

    “예.”

    내가 황당해하는 것과 달리 플레온은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펜던트를 ‘그분’이라고 칭하는 것도 황당한데, 고작 이 펜던트가 다니엘에게 죽었던 나를 과거로 회귀시킨 장본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대체 이 펜던트가 뭐기에?

    다시금 펜던트를 확인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세요. 이 펜던트가 왜 저를 과거로 돌려놓았고, 또 왜 제게 이 펜던트를 주신 건지에 대해서도……요.”

    그러나 내 질문은 허무하게 허공에 스러질 뿐이었다.

    내 앞에 있어야 할 플레온은 온데간데없고 하얀 잿더미만 수정 위에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성자님?”

    펜던트를 쥔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플레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방금 일어난 일이 모두 환상인 것처럼.

    덜컥.

    허탈한 마음에 다시금 수정 위에 앉을 때가 되어서야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내가 들어온 문이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걱정을 담아 묻는 그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확인했다.

    “여기, 성자님이 계셨는데요…….”

    내가 손으로 플레온이 있던 자리를 가리켰다.

    사제는 하얀 잿더미를 확인하고는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건가 싶어 입술을 달싹이자 사제가 다시금 나를 보았다.

    “여신님께 부름을 받아 가신 겁니다. 죄책감 느끼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조금 전까지…… 제 앞에 계셨, 는데요.”

    “예. 그러셨을 겁니다.”

    사제의 반응대로라면, 플레온은 죽었다는 게 된다.

    정말 잠깐이었다.

    펜던트를 확인하고 다시 고개를 들기까지.

    그 짧은 사이에 플레온이 죽었다.

    꼭 악랄한 흑마법에 홀린 기분이었다.

    황당함과 충격으로 인해 머릿속이 뒤죽박죽 섞이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신전에 오지 말았어야 했나 보다.

    “일단 이리 나오십시오. 다른 분들이 걱정하고 계십니다.”

    고개를 돌려 문 너머를 확인했다. 그곳에는 나와 함께 신전을 찾았던 칼리나와 아니타가 초조한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사제가 내게 내민 손을 피한 채 수정으로 이루어진 방을 나왔다.

    그리고 이만 돌아갈까 생각을 하다가 사제를 돌아보았다.

    “이거, 성자님께서 제게 주셨어요.”

    “…….”

    “근데 이건 제 물건이 아니니 돌려드릴게요.”

    내가 사제를 향해 펜던트를 내밀자, 사제가 복잡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펜던트의 주인은 아가씨입니다. 갖고 계시는 게 좋을 겁니다.”

    사제가 펜던트를 거절하며 말했다.

    “제가 주인이 아니에요. 이건.”

    “성자님께서 아가씨께 전달해 드리기 위해 계속 기다리고 계셨던 겁니다. 그러니 아가씨 것이죠.”

    혼란한 마음으로 펜던트를 확인했다.

    우선은 이 펜던트를 내가 가지고 있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신전에서 나오니 안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하늘이 보였다.

    분명히 내가 출발한 건 아침과 점심 그 사이쯤이었는데, 벌써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내가 신전 안에서 체감한 시간과 밖의 시간이 달랐던 것 같았다.

    신전에서 나와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라탔다. 칼리나와 아니타 역시 마차에 오르고 난 후에야 마차가 천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조금은 넋이 나간 기분으로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았다.

    무언가 대단히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플레온은 자신과 대화를 하면 내 궁금증이 해결될 것이라 했지만, 그건 모두 거짓말이었다.

    오히려 그와 대화를 하는 바람에 내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지고 의문투성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짐도 하나 생겼지.

    손에 쥐고 있던 펜던트를 벨벳 주머니 안에 도로 넣어 두었다.

    일단은 쉬고 난 후에, 정신이 말짱해지면 다시 확인해도 늦지 않을 것이었다.

    “저기…… 작은 아가씨.”

    한참 넋을 빼놓고 있으니 아니타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응?”

    “안에서 무슨 일 있으셨어요? 그 안에서 정말 오래 계셨잖아요.”

    “으응. 아니야. 별일 없었어.”

    괜히 심란한 마음이 아니타에게 옮아가지 않도록 대충 둘러댔다.

    오늘따라 유난히 피로가 짙게 느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