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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21)화 (21/174)
  • 21화

    식사를 마친 뒤에는 잠깐의 소화시킬 여유를 가졌다.

    후원에서의 티타임이었다.

    나는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차 대신 우유가 나오긴 했지만, 엄마와 브라이언, 그리고 엘리엇을 낀 채 한가롭게 티타임을 즐길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출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식사 후 바로 마차를 타면 멀미한다는 브라이언의 충고를 받아들여 출발하기 전에 소화를 시킬 겸 나온 것이었다.

    “근데 미라벨, 정말 검을 배울 거니?”

    우유를 한 모금 마시는데 엄마가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응. 왜?”

    “네가 네 의지로 검술을 배우는 걸 이 엄마가 막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엄마는 네가 위험하게 검을 배우지 않았으면 좋겠어.”

    “어째서?”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검술을 배우는 걸 엄마가 이렇게 우려할 일이 없었다.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엄마가 손수건을 꺼내어 내 입가를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아니야. 엄마가 잘못 말했어. 그냥 몸 다치지 않도록 조심히 배워야 한다.”

    슬픈 얼굴로 나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엄마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브라이언을 돌아보았다.

    “오빠도 그래. 벨이 검술을 배우는 건 벨이 원하는 거니까 어쩔 수 없는 거지만, 적어도 벨을 위험한 곳으로 데려가지 않겠다고만 약속해줘.”

    “가일 때문이구나.”

    “…….”

    내가 엄마의 의중을 꿰뚫어 보지 못한 것과 달리 브라이언은 단숨에 엄마의 속뜻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가일. 가일 휴스턴.

    델피아 마을을 지키고 목숨을 잃은 기사이며, 내 아버지의 이름이기도 했다.

    엄마는 내가 혹시나 아버지처럼 죽어 버리는 것이 아닐지 걱정에 휩싸인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브라이언이 확신하듯 말했다.

    나도 일단은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해 방긋 웃어 보였다.

    그제야 엄마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꼭 그래야 해.”

    * * *

    “엄마가 같이 가 줄까?”

    마차를 향해 걸어가는 길에 엄마가 내게 속삭였다.

    귓가를 간질이는 소리에 목을 움츠리며 까르르 웃음을 흘렸다가 이내 엄마를 새치름하게 바라보았다.

    “아냐. 나 혼자 다녀올게. 엄마는 내 가정교사 뽑느라 바쁠 거잖아. 신전에는 혼자도 다녀올 수 있어. 그리고 나 혼자 가는 거 아니야. 칼리나랑 아니타도 함께 가는걸?”

    나를 뒤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엄마는 고개를 들어 칼리나와 아니타를 확인했다. 엄마의 시선이 닿자 두 사람이 엄마를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이미 마차를 호위할 기사들도 선별했잖아.”

    마지막으로 내가 마차 주변에 기승해 있는 기사들을 가리켰다.

    고작 신전으로 향하는 쌍두마차에 호위 기사만 열 명이 붙었고, 사병이 스물은 넘게 붙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과보호였다.

    “그래. 알았어. 그럼 잘 다녀와.”

    결국 엄마가 못 이기는 척 마차 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응. 다녀올게.”

    나 역시 마차 앞에 서서 엄마와 인사했다.

    엄마는 내가 칼리나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올라타고 난 후에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출발할까요, 작은 아가씨?”

    마부가 마부석과 연결된 창을 통해 물었다.

    “출발해 줘.”

    마부에게 대답하자, 곧 말이 투레질하는 소리를 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마차가 천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속도 때문인지 마차는 느릿한 속도로 도로를 달려갔다.

    나는 창문을 통해 느리게 지나가는 수도의 전경을 시야에 담았다.

    멀리서 사람들이 마차에 달린 엠블럼을 알아보고 크라이튼 대공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이 들려왔다.

    그 사이사이에 딸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나 손녀딸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섞여 있었다.

    아무래도 크라이튼 대공가에서 이번에 무도회와 함께 창고를 개방하는 것 때문에 더욱 소문이 퍼진 듯했다.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구경하는 와중에 멀리 은색 머리를 한 남자아이가 보였다.

    익숙한 외형이라 잠시 남자아이를 확인하기 위해 마차 밖으로 머리를 빼서 자세히 바라보았다.

    “제프리?”

    “위험합니다, 작은 아가씨!”

    그러자 창가 옆에서 말을 타고 따라오던 기사 한 명이 기겁해서 내게 외쳤다.

    그에게 잠깐 시선을 빼앗겼다가 다시 남자아이가 서 있던 자리를 확인했지만, 애석하게 그 자리에 은색 머리를 한 남자아이는 없었다.

    제프리 콜먼……. 수배는 잘 해제되었으려나?

    불우한 과거에도 불구하고 당당했던 남자아이의 얼굴과 은색 머리를 떠올렸다.

    분명히 아까 골목 앞에 서 있던 것은 제프리였다.

    다시 만나면 인사라도 하려고 했는데 아쉽게도 인연이 아닌 모양이었다.

    짙은 아쉬움에 맥이 빠진 나는 창가에서 떨어져 의자 등받이에 몸을 실었다.

    마차가 흔들리는 것에 맞추어 내 몸도 흔들렸다.

    “작은 아가씨, 제프리가 누구예요?”

    힘없이 늘어져 있으니 아니타가 호기심을 보였다.

    “으응. 내가 수도로 올 때 같이 올라왔던 친구 있어. 근데 잘못 봤나 봐.”

    “서운하시겠어요. 친구분을 만난 줄 알았는데 아니셨다니…….”

    “응? 아니, 그 정도는 아니고. 감자 두 개 정도의 아쉬움이랄까.”

    “네?”

    아니타가 당황하며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굳이 아니타에게 왜 감자 두 개만큼의 아쉬움인지에 대해서 설명해 주지는 않았다.

    돌아가면 크라이튼 대공에게 부탁하여 제프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을 한번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 *

    크라이튼 대공가에서 마차로 약 삼십 분을 달린 끝에 듀아나 여신을 모시는 신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기사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려서자 칼리나가 내 치맛자락을 정돈해 주었다.

    나는 그런 칼리나에게 웃어 보이는 걸로 감사를 전하고 곧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신전은 나도 예전에 몇 번 와 본 적이 있었다.

    신전에서는 상처를 치료하는 응급 치료제를 상시 판매하고 있었으므로, 용병으로 다니던 시절에 돈이 모이면 꼭 한번씩 찾아오고는 했었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입구에 다다르자 일전에 본 적 있던 사제가 나를 맞이했다.

    분명히 엄마를 치료하러 왔던 사제였다.

    “안녕하세요, 사제님?”

    “환영합니다, 오시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사제가 정중히 나를 맞이하자 그를 따라온 수습 사제들이 나를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나 역시 짧게 고개를 숙이며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일전에 제가 말씀드렸던 것처럼 신력의 유무를 확인하러 오신 거지요?”

    “맞아요. 그때 제가 신력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하셨잖아요.”

    내가 기억을 떠올리며 대답하자 사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자세한 능력에 대해서는 안으로 드셔서 확인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사제를 따라 신전의 내부에 도달했다. 우리의 앞에 듀아나 여신이 양각으로 새겨진 커다란 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내부까지는 들어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 보는 여신의 조각을 보고 나도 모르게 감탄을 터트렸다.

    마치 여신이 직접 현신한 것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여신의 주변에는 피막 날개를 한 뱀이 고아하게 양각되어 있었다.

    “정말 죄송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아가씨만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저만요?”

    사제라도 같이 들어가 줄 것이라고 예상했건만, 사제는 내가 홀로 이 안으로 들어갈 것을 권했다.

    “들어가면 뭐가 있나요?”

    “들어가 보시면 알 겁니다. 저도, 그리고 이 신전의 사제들도 모두 거쳤던 방법이니 너무 겁먹으실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다짜고짜 안에 혼자 들어가라고 하니 덜컥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혹시 이 모든 게 다니엘의 함정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러나 사제가 워낙 신성하게 바라보고 있는 탓에 그에게 강하게 따질 여력이 생겨나지는 않았다.

    “……알겠어요.”

    사제의 말대로 나 홀로 문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문은 따로 문고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어떻게 열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몸을 돌리자, 사제가 손을 들어 보였다.

    문을 밀어보라는 듯한 제스쳐였다.

    나는 그의 제스처를 이해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커다랗고 육중한 문이 과연 내 손에 열릴까 싶었으나, 내 손이 닿는 것과 동시에 문이 자동으로 열려 버렸다.

    안은 마치 수정으로 꾸민 듯했다. 투명하면서도 빛의 각도에 따라 색이 변하는 게 신비로웠다.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며 안으로 걸어가자, 뒤에서 키긱거리는 마찰음이 들려왔다.

    몸을 돌리자 내가 들어온 커다란 문이 천천히 닫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대로 계속 들어가도 되는 건가?

    사제가 날 속인 게 아닐까?

    사실 사제가 아닌 걸지도 모르잖아.

    머릿속으로 의심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내 맞은편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 것은.

    주의를 집중하니 14년 후의 크라이튼 대공만큼이나 노쇠한 노인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누구세요?”

    주춤거리며 노인이 다가오는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물러났다.

    나를 지켜 줄 무기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황급히 머리에 꽂았던 핀이라도 뽑아 견제할까 생각했지만, 고작 핀을 가지고 상대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리 노쇠했다고는 하나 어린아이의 힘으로 성인 남성을 이길 수는 없을 테니까.

    “경계하지 마십시오. 꼬마 숙녀님.”

    노쇠한 외모와 달리 성스럽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인이 말했다.

    “저는 이 듀아나 여신을 모시고 있는 플레온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플레온이라고 소개한 노인은 내게 다가오기도 전에 멈추어 서서 한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무엇을 가리키나 싶어 바라보니 그곳에 그루터기처럼 생긴 수정이 놓여 있었다.

    “우선 앉으시지요. 드릴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순순히 그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플레온이라는 이름은 듀아나 신전의 성자를 이르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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