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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20)화 (20/174)

20화

새벽 훈련을 마친 후로 브라이언, 엘리엇과는 헤어졌다.

곧 아침 식사 시간이라 빠르게 목욕을 마치고 내려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빨리 씻고 싶은 마음에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뒤늦게 나를 따라오는 아니타가 버거워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속도를 줄였다.

“감사해요. 제가 너무 느려서 곤란하시죠…….”

“아니야. 내가 급했어. 시간이 촉박한 것도 아니고,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되니까 천천히 가자.”

“배려 감사해요, 작은 아가씨.”

아니타가 감동의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나를 바라보았다.

어린아이에게 무언가 우상이 되어 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타의 속도에 맞추어 느긋하게 욕실로 올라갔다.

욕실에는 이미 나를 위한 따뜻한 물이 채워져 있었다.

옷을 벗고 욕조에 몸을 담그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역시 운동한 뒤에 씻는 게 제일 개운하고 기분이 상쾌했다.

이번에는 아니타를 대신하여 칼리나가 내 시중을 들기 위해 들어왔다.

정성스러운 손길로 운동의 열기를 씻어 낸 후 나오니 내가 입을 귀여운 드레스들이 내 앞에 나열되어 있었다.

하나같이 인형이나 입을 법한 귀여운 옷들이었다.

어렸을 때는 이런 옷을 입어 보고 싶어서 양장점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옷들을 원없이 입어도 되는 자리에 섰다.

오늘은 특별히 하늘색 리본이 포인트로 들어간 드레스를 입었다.

입는 방법이 복잡한 까닭에 칼리나가 나를 도와주었다.

그 뒤에는 씻고 나와 젖은 머리를 말리는 일이었다.

칼리나가 빗을 꺼내어 내 머리를 조심스럽게 빗기 시작했다.

다 젖은 머리였기 때문에 괜찮을까 싶었지만, 빗이 지나간 자리는 물기가 말끔히 사라지고 없었다.

이건 나도 용병으로 생활하며 가장 유용하게 사용했던 마법 아티팩트였다.

마법의 빗. 머리를 누구보다 빠르게 말릴 수 있는 가장 획기적인 아이템.

마법의 빗 하나를 사기 위해 사선을 다섯 번이나 넘나들고, 검게 마른 육포와 딱딱한 빵 조각을 먹었던 기억이 머릿속에 새록새록 떠올랐다.

칼리나의 빗질을 받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의 궁상맞았던 추억 때문이었다.

“추우세요?”

그러나 칼리나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당황해서는 내게 물었다.

나는 칼리나가 혹시라도 놀랄 새라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의문을 부정했다.

“아니.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옛날이요? 작은 아가씨께 옛날이면 언제 적이에요?”

“응?”

칼리나가 장난스럽게 눈을 휘어 웃었다.

그제야 뒤늦게 내가 아홉 살짜리 여자아이라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어…… 네 살?”

당황해서 아무렇게나 대답을 꺼내자 칼리나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작은 아가씨에게는 5년 전도 옛날의 일이군요.”

장난기 가득 담긴 목소리에 나는 괜히 입술을 비죽이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놀림 받은 기분을 지울 수 없는 탓이었다.

그래도 칼리나의 장난이 싫지 않았다.

칼리나는 내 머리를 잘 정돈하여 양 갈래로 묶어 주었다. 그리고 꽃 모양으로 보석이 박혀 있는 핀을 꽂아 주었다.

“자, 어떠세요?”

칼리나가 뿌듯한 얼굴로 거울을 가리켰다.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은 꼬질꼬질한 평민 여자애가 아니라 정말 귀족 꼬마 아가씨 같았다.

“우와.”

나 스스로도 놀라서 거울을 보며 감탄을 터트렸다.

나도 이런 귀여운 모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칼리나는 다른 사람을 꾸미는 능력이 정말 뛰어난 듯싶었다.

나는 그녀를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정말 예뻐. 고마워, 칼리나.”

“천만에요. 자, 그럼 작은 아가씨, 이제 식당으로 가 보실까요?”

“응!”

의자에서 폴짝 뛰어 내려왔다. 그러자 드레스 자락이 허공에서 나비처럼 나풀거렸다.

그 모습이 너무도 신기해서 나는 자리에 서서 내 드레스 자락을 한번 빙 둘러보았다.

내가 몸을 한 바퀴 돌리자 또다시 치맛자락이 허공에 산들거렸다.

아주 사소한 디테일이었지만, 나는 그걸 보며 감탄을 자아내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아니타와 칼리나가 그런 나를 보며 가볍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제야 멋쩍은 기분에 그녀들을 보며 마주 웃음소리를 내었다.

“어, 얼른 가자.”

민망한 마음에 헛기침을 두어 번 내뱉은 후 직접 파우더룸의 문을 열고 나왔다.

“길 잃어요. 저희와 같이 가세요, 작은 아가씨!”

“저도 같이 가요!”

칼리나와 아니타가 나를 따라오며 외쳤다.

나는 그제야 그들이 따라오기 쉽도록 속도를 늦춰 주었다.

만난 지 며칠 되지 않은 칼리나와 아니타가 점점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친절함과 상냥함이 너무 편안하고 좋았다.

식당에 도착하니 엄마와 크라이튼 대공만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머, 벨 왔니?”

내가 식당으로 들어서는 걸 확인한 엄마가 푸근하게 웃으며 나를 반겼다.

요 며칠 사이 엄마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가지 않는다는 사실도 정말 마음에 들었다.

“어서 오거라, 미라벨. 브라이언에게 훈련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힘들지는 않느냐?”

크라이튼 대공도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네, 할아버지. 보람 있고 좋았어요. 앞으로 계속 배워 보고 싶어요.”

내가 대답하자 크라이튼 대공이 허허 소리를 내어 웃었다.

“이거 우리 가문에 유명한 기사가 또 나오는 게 아닐지 기대되는구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딱 한 사람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형님, 여자애가 굳이 검을 배울 필요가 있겠어?”

따뜻했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당연하게도 다니엘이었다.

다니엘은 아침부터 어디를 다녀왔는지 외출복 차림이었다.

“어딜 다녀오는 게냐?”

“볼일이 있어 잠시 나갔다 왔지.”

다니엘이 부러 어깨를 으쓱하며 재킷의 단추를 풀었다. 그러자 그의 왼쪽 옷깃에 달린 원 두 개가 교차하는 모양의 브로치가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 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그나저나 이 주일 뒤면 무도회도 열릴 텐데, 미라벨에게 예절 교육을 시키는 게 낫지 않을까? 적어도 귀족들을 만나서 대화하고 춤이라도 추려면 지금 당장 배우는 것도 빠듯할 텐데.”

“흠…….”

“보니까 어제 식사법도 서툴더라고. 얼른 가정교사를 한 명 붙이는 게 좋지 않겠어?”

“그것도 그렇겠군. 미라벨이 이곳에 있으려면 배우긴 해야 하니.”

크라이튼 대공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린 것 같구나. 그래도 처음으로 만나는 거니 한동안은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배려해 주고 싶었는데. 무도회를 괜히 이 주일 뒤로 잡았구나.”

크라이튼 대공은 미안하다는 듯이 내 눈치를 살폈다.

내가 무도회 준비로 예절이나 무도를 배우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할 것을 염려하는 모습이었다.

“괜찮아요, 할아버지. 저는 쉬는 것보다 몸을 써서 움직이는 게 더 좋아요.”

크라이튼 대공에게 힘을 북돋아 주기 위해 말을 꺼내었다.

“그래서 검술을 배우고 싶다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염려치 마세요.”

“우리 미라벨, 사려 깊기도 하지…….”

크라이튼 대공이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몇 번이나 생각하는 거지만 아홉 살의 나는 손이 정말 작았다.

지금도 크라이튼 대공의 손에 잡혀서 모습조차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코넬리아, 네가 미라벨의 교육을 담당할 가정교사를 찾아보겠니? 아무래도 나보다는 네가 더 잘 알 것 같아서 그렇단다.”

“네, 아버지. 수소문해 주시면 제가 확인하고 가정교사를 들일게요. 그리고 저도…… 자리를 비운 동안 너무 많은 것을 잊어버린 것 같아요. 벨과 함께 배울까 봐요.”

“그래. 네가 좋을 대로 하렴.”

나의 가정교사를 고르는 일이 엄마에게 위임되었다. 속으로 엄마에게 배우면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엄마도 잊은 것이 많다고 하니 나도 군말 없이 앉아서 고개만 끄덕였다.

“벌써 다들 와 계셨군요.”

“늦었습니다.”

뒤늦게 브라이언과 엘리엇이 도착했다.

“어서 앉거라.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다.”

크라이튼 대공이 브라이언과 엘리엇을 향해 권했다. 두 사람은 익숙하게 빈자리에 가서 착석했다.

이를 확인한 크라이튼 대공이 손을 들어 집사에게 입을 열었다.

“식사를 가져오너라.”

크라이튼 대공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식사가 차려지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벨, 시간 여유가 생기면 신전도 가 봐야 하지 않겠니?”

엄마가 문득 내게 말했다.

막 얇게 저민 햄과 치즈를 빵 위에 얹어 한입에 먹으려 입을 벌린 찰나였다.

나는 모여드는 시선에 조금 민망함을 느끼고 들고 있던 빵을 접시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엄마의 말대로 신전에도 방문하기로 했던 기억이 났다.

“가정교사를 들이고 나면 많이 바빠질 거야. 무도회까지 남은 이 주일이 굉장히 빠듯하거든. 그러니 아직 가정교사가 확정되지 않은 오늘 다녀오는 게 좋지 않겠니?”

엄마가 내게 제안했다.

가정교사에게 예법이나 무도를 배우는 게 얼마나 소요되는 일인지 모르기 때문에 엄마가 해 주는 말을 전적으로 믿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다녀올게요. 저도 빨리 가 보고 싶었어요.”

어쩌면 내게도 엄마의 병을 고칠 능력이 있을지도 몰랐다.

결과적으로 엄마를 치료하는 건 신전의 사제들 몫이었지만, 피치 못 한 경우에 내가 당장 달려가 엄마를 구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았다.

“그래, 다녀오거라. 식사를 마치고 나면 바로 갈 수 있도록 마차를 준비해 두마.”

말을 마친 크라이튼 대공이 대기하고 있던 집사를 불러 내가 언제든 탈 수 있도록 마차를 대기시켜 놓으라 일렀다.

집사는 크라이튼 대공의 말을 듣고 곧장 식당을 나섰다.

“자, 이제 다른 이야기는 없을 테니 편히 먹으렴.”

크라이튼 대공은 뿌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식사를 권했다.

나는 주춤거리다가 접시에 놓아두었던 빵을 다시 들어 한입에 넣었다.

짭짤한 햄과 부드러운 치즈의 맛이 고소한 빵 맛에 어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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