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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9)화 (19/174)
  • 19화

    새벽같이 일어난 김에 침대에서 벗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잠시 감상했다.

    어스름한 정원의 풍경은 얼핏 스산해 보일 수 있었지만, 낮인 것처럼 돌아다니는 사람들로 인해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에도 이런 걸까 싶었지만, 과거 의뢰 때문에 귀족 가문에 머물렀을 때도 이런 식으로 하루를 빠르게 시작하는 곳은 없었다.

    아마도 이들이 이렇게 분주한 것은 무도회 때문인 것 같았다.

    어제 저녁 식사 이후로 엄마와 나의 귀환을 환영하는 무도회를 개최하기로 결정되었다.

    크라이튼 대공은 대동할 수 있는 사용인들은 모두 불러 모아 금액은 상관없으니 여느 무도회에 뒤지지 않도록 화려한 무도회를 열 것을 지시했다.

    시간은 이 주일 뒤, 저택에서 무도회를 벌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창고를 풀어 가난한 자들에게도 먹을 것을 베푼다고 했다.

    시간도 촉박한데 할 일이 많으니 어쩔 수 없이 바쁘게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괜히 무도회를 열자고 했나 고민할 때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아가씨, 아니타입니다. 깨어나셨을까요?”

    문 너머에서 들려온 것은 앳된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나를 가까이에서 보필하게 되었다고 했던 아니타.

    “응. 들어와.”

    내가 허락을 내리자 아니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비교적 자그만 왜건을 밀고 들어온 아니타가 조막만 한 손으로 커다란 문을 열고 왜건을 안으로 들인 다음, 다시 문을 닫는 그 일련의 행동이 몹시도 귀여웠다. 절로 아니타를 보는 내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이곳 크라이튼 대공가에서 나를 보는 기분도 이러할까?

    내 기억 속에서 강건하고 냉철했던 그들이 봉인이 해제된 듯이 풀어지는 모습이 이제는 이해가 갈 것도 같았다.

    “세숫물을 대령했습니다.”

    아니타가 가져온 것은 어린아이가 사용할 법한 작은 세숫대야였다.

    미지근한 물이 찰랑이는 것을 보며 미안한 마음이 피어올랐다.

    “가져오느라 힘들었겠다. 미안해.”

    “아니에요!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왜건에 싣고 와서 하나도 힘들지 않았는걸요?”

    피곤하고 힘들었을 텐데도 배시시 웃는 아니타를 보며 나도 마주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세숫물을 사용하여 천천히 얼굴을 씻었다.

    적당히 미지근한 온도여서 씻는 것이 더욱 편안했다.

    한차례 세수를 마치자 아니타가 왜건에 준비되어 있던 수건을 내게 건넸다.

    얼굴의 물기를 닦고 나자 이번에는 아니타가 옷을 하나 건네었다.

    “공작님께서 이 옷을 입고 연무장으로 나오라고 하셨어요.”

    보아하니 승마복이었다. 설마하니 오늘 승마를 하려는 것은 아닐 테고, 저택에서 내 또래의 아이가 입을 활동적인 옷을 찾다가 이 옷을 찾아 보낸 모양이었다.

    쉽게 납득하고 침실과 연결된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제, 제가 도와드릴게요!”

    “응? 아냐. 나 혼자 할게. 괜찮아.”

    혼자 옷을 벗는 것을 보며 기겁하는 아니타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지금은 당장 귀족가에 들어와 있기는 했지만, 내가 살아생전에 누군가의 수발을 들어 옷을 갈아입은 것은 엄마의 손을 빌렸을 때 외에는 없었다.

    아니타가 눈에 띄게 당황하는 게 보였지만, 어차피 지금 다른 사람들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우리 둘뿐이었으니 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브라이언이 보내온 승마복으로 갈아입었다. 신기하게도 내 몸에 딱 맞는 크기였다.

    몸을 감싸는 옷 재질도 좋은 게 제법 값비싼 것 같았다.

    하긴, 대공가에서 구비한 옷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어때? 괜찮아 보여?”

    “네! 잘 어울리세요!”

    아니타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나는 그사이에 몸을 크게 움직이면서 활동성을 확인했다. 다행히 몸을 움직이는 데도 불편함이 없었다.

    “아니타 넌 쉬고 있어. 어차피 숙부님을 만나서 훈련하는 거니까 굳이 네가 따라오지 않아도 돼.”

    어린이는 아직 잘 시간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아니타에게 제안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작은 아가씨께서 가시는 길에 저도 꼭 같이 있어야 한다고 배웠는 걸요.”

    “이런 때는 괜찮아. 그러니까 좀 더 자 둬.”

    “아니에요. 따라갈게요.”

    “피곤할 텐데?”

    “하나도 안 피곤해요!”

    아니타가 괜찮다는 의미로 두 손을 불끈 쥐어 들어 보였다.

    어차피 아니타가 할 일이 없을 것 같아서 좀 더 쉬는 게 낫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아니타가 완강하게 나오니 나도 그녀를 두고 갈 수가 없었다.

    어차피 며칠 반복하다가 못 이기겠으면 그때 쉬라고 들여보내면 되겠지.

    짧게 생각하고 침실을 나섰다.

    그리고 그제야 아니타의 도움이 왜 필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아니타.”

    “네? 왜 그러세요, 작은 아가씨?”

    천진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아니타를 보며 나는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연무장이 어디야?”

    “……아! 저만 따라오세요!”

    아니타는 이제야 자신의 할 일을 찾았다는 듯이 밝게 웃으며 나를 연무장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아니타를 따라 도착한 연무장에는 이미 크라이튼 대공가의 기사와 병사들이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연무장 한쪽에 브라이언과 엘리엇이 있었다.

    “미라벨!”

    나를 먼저 발견한 엘리엇이 환한 얼굴로 양손을 흔들었다.

    나는 가볍게 달려 그들의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피곤하진 않아?”

    엘리엇이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물었다.

    “으응. 전혀.”

    “다행이네. 그래도 무리하진 마.”

    “알겠어. 고마워, 엘리엇.”

    엘리엇에게 고마움을 전하자 브라이언이 가볍게 쥔 손을 입으로 가져가 낮게 헛기침했다.

    “일단 스트레칭부터 해야겠구나. 자, 미라벨 나를 따라하렴. 엘리엇 너는 혼자 할 수 있지?”

    “예, 아버지.”

    브라이언의 말이 끝나자 엘리엇이 알아서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나도 용병으로 다녔던 세월이 있기에 스트레칭 하는 방법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브라이언에게 처음부터 배우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가 시키는 대로 몸을 풀었다.

    “훈련의 기초는 스트레칭이란다. 몸을 과하게 쓰다 보면 나도 모르게 부상을 입는 경우가 발생하기 마련이지. 그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거니 몸을 쓰기 전에는 까먹지 말고 스트레칭을 해 주렴. 그리고 훈련이 끝난 다음에도 스트레칭 해 주는 게 좋을 거란다.”

    브라이언이 내 앞에 서서 스트레칭 자세를 먼저 시범을 보였다. 그리고 내가 그 동작을 따라하는 순서였다.

    내가 미리 알고 있던 대로 아주 작은 부위, 손가락 관절부터 시작하여 손목, 어깨, 발목, 무릎 전체 스트레칭의 순서였다.

    20여 분을 스트레칭 하는 것에 시간을 쏟아부은 후에야 브라이언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다. 앞으로 매일 훈련 전과 훈련 후에 이 동작을 반복해서 하는 거란다. 나나 엘리엇이 도움을 줄 테니 언제든 방법이 기억나지 않으면 물어보렴.”

    “네, 숙부님.”

    “그럼 일단은 네 체력을 한번 확인해 보자꾸나. 엘리엇, 오랜만에 너도 같이 하렴.”

    스트레칭을 끝마치고 브라이언이 내게 가장 먼저 시킨 것은 달리기였다.

    연무장을 크게 한 바퀴를 뛰었을 때 걸리는 시간을 가늠하여 내 체력 상태를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그럼 출발!”

    브라이언의 신호를 시작으로 엘리엇과 함께 지면을 박차고 나갔다.

    체감상 달리는 속도는 예전 용병으로 일했을 때보다 현저히 느렸다.

    그때는 살아남기 위해서 하루 종일 몸을 단련해야만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반 바퀴 정도 뛰었을 무렵에 숨이 벅차기 시작했다.

    나는 최대한 복식 호흡으로 숨을 조절하며 엘리엇과 속도를 맞추려고 했다.

    그러나 엘리엇은 이미 이 속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나보다 점점 더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미라벨, 난 먼저 갈게. 힘내!”

    내게 응원하는 여유까지 보인 엘리엇이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거리가 벌리기 시작했다.

    점점 멀어지는 엘리엇을 보며 나도 안간힘을 다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숨이 벅차고 오금이 긴장되는 느낌에 정수리가 싸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에는 불쾌하게 느껴졌지만, 어느 순간에는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달려 브라이언의 앞에 도착했다. 모든 힘을 다해 달린 탓에 잠시 휘청거렸다.

    “괜찮아?”

    다행히도 엘리엇과 브라이언이 나를 잡아 주었다.

    나는 한참 가쁜 호흡을 고른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그래도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회복은 빨랐다.

    “속도는 처음치고 빠른 편이구나. 그래도 체력이 너무 떨어져. 아무래도 체력부터 보강하고 나서 검술 훈련을 하는 것이 좋겠다.”

    “네,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몇 가지를 더 체크해 볼 건데 괜찮겠니?”

    “그럼요. 아직 쌩쌩해요.”

    “다행이구나. 그럼 따라오렴.”

    브라이언을 따라 이번에는 실내로 움직였다.

    * * *

    달리기, 윗몸일으키기 등등의 기본적인 테스트가 끝나고, 완전 녹초가 되어 맨바닥에 주저앉았다.

    “작은 아가씨! 여기 이걸 깔고 앉으세요!”

    지켜보던 아니타가 화들짝 놀라서 달려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주었지만, 도저히 다시 일어나 앉을 여력이 없었다.

    “괜찮, 괜찮아.”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대답하자 바로 옆까지 달려왔던 아니타가 울상을 지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배려를 받을 여유가 없었다.

    결국 호흡이 멀쩡히 돌아올 때가 되어서야 바닥에서 일어날 수가 있었다.

    익숙하게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브라이언에게 다가갔다.

    “일단은 새벽마다 이런 루틴으로 체력을 만드는 게 우선이란다. 매일…… 할 수 있겠지?”

    처음에는 불신 가득했던 브라이언의 목소리에 미약하지만 기대가 실려 있는 듯했다.

    나는 흔쾌히 긍정을 표했다. 검을 다루려면 어차피 기초 체력이 받쳐 주어야 한다는 건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숙부님.”

    일부러 브라이언을 향해 상체를 숙여 꾸벅 인사했다.

    “오늘 처음이지만 정말 잘했다.”

    브라이언은 그 어느 때보다도 흐뭇한 얼굴로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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