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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8)화 (18/174)
  • 18화

    “하하하! 형님, 아무리 손녀딸이 생겼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갑자기 변해 버리면 안 됩니다.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죽는다잖아? 냉정하기로 유명하던 형님께서 눈물을 훌쩍이고 있다니, 사람들이 보면 놀라겠어!”

    내 맞은편에서 나와 크라이튼 대공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던 다니엘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듣기에는 호쾌하게 들릴 수 있는 소리였지만, 다니엘의 음모를 모두 알고 있는 나에게는 그의 웃음소리가 듣기 거북한 쇳소리처럼 들릴 뿐이었다.

    그러나 다니엘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크라이튼 대공은 다니엘의 말에 허허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 보니 너와는 처음 보겠군. 이쪽은 코넬리아의 딸인 미라벨이다.”

    먼저 크라이튼 대공이 다니엘에게 나를 소개했다.

    교활하게 찢어진 다니엘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 사이에 크라이튼 대공은 나를 향해 다니엘을 소개했다.

    “미라벨, 이쪽은 네 작은할아버지인 다니엘 크라이튼이란다. 내 동생이기도 하지. 인사하렴.”

    “……안녕하세요.”

    일단은 크라이튼 대공의 체면을 생각해서 인사했다. 아직 증거가 없는 한 조용히 그를 주시하기로 마음먹었다.

    내 모습을 보던 다니엘이 한쪽 입술을 올려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형님, 사실 미라벨과 나는 초면이 아니야. 구면이라고.”

    “흠? 그게 무슨 말이지, 다니엘? 네가 어떻게 우리 미라벨과 아는 사이일 수가 있지?”

    애매한 다니엘의 말에 크라이튼 대공이 의문을 표했다.

    “아까 작은할아버님께서 저택에 도착했을 때 미라벨에게 안내를 지시했습니다. 아직 저택에 온 지 하루밖에 안 돼서 길도 모르는 애한테요.”

    크라이튼 대공의 의문에 대답을 한 건 엘리엇이었다.

    엘리엇은 평소와 달리 정색하는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 끝에 다니엘 크라이튼이 있었다.

    엘리엇의 얼굴이 썩 유쾌하지 않아 보였다. 엘리엇도 당장은 나처럼 불쾌함을 참는 듯이 보였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크라이튼 대공이 미간을 찡그리며 다니엘에게 물었다.

    다니엘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랬지. 코넬리아의 딸이라고 하기에 너무 귀여워서 한번 안내를 시켜 봤어. 근데 생각했던 것보다 길을 잘 기억하고 있더라고. 영리한 게 역시 코넬리아를 닮았나 봐.”

    느긋한 어조로 내 칭찬을 하는 다니엘의 모습에 크라이튼 대공은 잠시 눈을 가늘게 좁혔다가 뜰 뿐, 별다른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장난으로라도 미라벨에게 길 안내를 시킨 건 무책임했구나. 미라벨은 아직 이 저택에 온 지 하루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라는 걸 명심하도록 해. 아직 적응도 채 마치지 않았는데 길을 잃으면 얼마나 무섭겠느냐.”

    “그래, 다음부턴 조심하도록 하지. 하하!”

    브라이언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크라이튼 대공의 말을 넘겼다.

    “그나저나 식사는 언제 나오는 게야? 오늘 점심을 굶어서 그런지 출출한데.”

    다니엘은 과장스럽게 배를 두드리며 배고픔을 호소했다.

    “그래, 빨리 식사하는 게 좋겠지.”

    크라이튼 대공이 오른손을 들자 대기하고 있던 집사가 고개를 숙였다.

    집사가 곧 주방과 연결된 문을 열었다. 이어서 하인과 하녀들이 트롤리를 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 앞에 요리를 하나씩 놓아 주기 시작했다.

    곧 식사가 시작되었다.

    크라이튼 대공과 다니엘은 형제라는 것을 증명하듯 식사를 이어 가면서도 많은 이야기들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화두가 되는 것이 바로 나였다.

    크라이튼 대공은 특히나 내가 처음 대공 저로 찾아와 크라이튼 대공을 붙잡고 도움을 청하던 것이 인상이 깊었는지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아주 상세하게 다니엘에게 털어놓고 있었다.

    “미라벨이 저택 앞에서 내게 그랬지. ‘코넬리아 크라이튼이 제 어머니예요. 제 어머니를 살려 주세요!’ 아마 그렇게 말했을 거야.”

    크라이튼 대공은 포도주를 거나하게 마시고는 다니엘에게 과장해서 말했다.

    내가 당시에 크라이튼 대공에게 했던 말과 크라이튼 대공이 기억하는 말 사이의 정확한 디테일은 달랐지만, 어쨌든 뜻은 통했으니 굳이 정정해 주지 않았다.

    그때 엄마가 내 손을 잡았다. 고개를 돌려 엄마를 확인해 보니 엄마가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지를 움직여 내 손등을 쓰다듬는 엄마의 손길에서 엄마의 미안함과 고마움이 내게 여실히 전해졌다.

    그러는 사이, 다니엘은 크라이튼 대공의 말을 듣고 짐짓 놀란 듯이 목소리를 키웠다.

    “세상에, 그럼 저 어린아이 혼자 델피아 마을에서 이곳까지 왔다는 말이야? 족히 사흘은 걸릴 거리인데.”

    “그래. 그 먼 길을 어떻게 혼자 올 생각을 했는지…….”

    크라이튼 대공은 연신 기특하다는 듯이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 크라이튼 가의 피를 이어받아 용맹한 게지.”

    굳이 따지자면 용맹한 것보다는 다시는 엄마를 허무하게 잃지 않겠다는 일념이었다.

    열 살의 나에게는 엄마가 세상의 전부였다. 세상이 나를 버리고 죽는 고통을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그 결심 하나로 떠난 것이 계기가 돼서 엄마의 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는 거지만, 돈만 있으면 충분히 고칠 수 있는 병이었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가슴 아프게 만들었다.

    “그러게. 크면 아주 훌륭한 크라이튼 가의 사람이 되겠어. 그 정도의 배포라면 후일 대공가를 이끌 가주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다니엘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말했다.

    누구보다 크라이튼 대공가의 가주 자리를 탐내는 게 다니엘 자신이었으면서, 그 스스로 욕심이 없는 척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것도 좋지. 물론 나중에는 정확한 자격을 심사해야겠지만, 미라벨 정도면 훌륭하지.”

    크라이튼 대공이 술에 취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와 만나 본 짧은 시간 동안 크라이튼 대공이 이리 즐겁게 웃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조용히 포도 주스를 마시며 크라이튼 대공과 다니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크라이튼 대공은 다니엘을 정말 많이 신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렴, 크라이튼 대공에게 다니엘은 동시대를 살아온 혈육이었으니 당연한 일일 터였다.

    그렇기에 다니엘이 크라이튼 대공가를 서서히 좀먹어 가고 있던 것을 눈치채지 못했겠지.

    편지만 해도 그랬다.

    엄마가 몇 년 동안 크라이튼 대공에게 사과하는 편지를 보냈음에도 크라이튼 대공에게 단 한 통의 편지도 전달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다니엘의 심복이 이 저택 어딘가에 녹아들어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간자를 잡아내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 저택에서 일정 기간 이상 일한 고용인들을 위주로 찾으면 될 테니까.

    “정말 경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형님. 집을 떠나서 소식조차 없었던 코넬리아와 코넬리아의 딸이 돌아왔으니. 게다가 이 모든 게 미라벨의 노력이라니!”

    “그렇지. 경사지.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있을 수가 없어.”

    “그럼 형님, 코넬리아와 미라벨을 위해서 무도회라도 여는 것은 어때? 사교계에 코넬리아의 복귀도 알릴 겸해서 말이야.”

    “무도회?”

    다니엘의 제안에 크라이튼 대공이 흥미롭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래, 그것도 좋은 방법이겠구나. 하지만 그 전에 코넬리아와 미라벨의 의견을 물어봐야겠지. 난 이제 내 딸이 싫다는 건 절대 하지 않을게다. 더는 사랑하는 딸을 잃고 싶지가 않아. 게다가 이렇게 예쁜 손녀까지 생겼으니.”

    “아버지…….”

    엄마가 작은 음색으로 크라이튼 대공을 불렀다. 크라이튼 대공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웃으며 우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 코넬리아. 네 생각은 어떻니? 나는 이제부터 네가 하고자 하는 바를 지지할 거란다.”

    엄마는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조금 망설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저는 괜찮은데, 미라벨이 조금 걸려요. 아무래도 우리 벨은 이런 것엔 아직 익숙하지 않고, 무엇보다 마음이 매우 여린데…….”

    엄마의 목소리에 나를 향한 걱정과 애정이 묻어났다.

    크라이튼 대공이 그러했듯, 엄마도 나를 생각해서 선뜻 결정하지 못하는 듯했다.

    정확히 엄마가 어떤 점에서 망설이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는 있었다.

    엄마와 내가 돌아왔다는 게 알려지면 귀환을 축복하는 사람도 생기겠지만, 반대로 뒤에서 제멋대로 떠드는 사람도 생기겠지.

    어쩌면 엄마는 내가 그런 사람들로 인해 상처받을 것을 걱정하는지도 몰랐다.

    그런 거라면 별로 상관없었다.

    남들이 떠드는 말에 휘둘리는 성격이었다면 용병으로 살지도 못했을 터였다.

    “엄마, 난 무도회 한번 가 보고 싶어.”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을 깜빡이며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는 손을 들어 내 뺨을 쓰다듬었다.

    “정말 괜찮겠니? 엄마는 조금 걱정되는데.”

    “난 괜찮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일부러 씩씩하게 대답했다. 엄마의 결정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래, 미라벨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한번 무도회에 참여해 보는 것도 좋겠지. 이것도 전부 미라벨에게 경험이 될 게다. 그리고 네가 돌아왔다는 소문이 벌써 수도에 퍼졌을 텐데, 얼굴 한번 비치지 않으면 또 어떤 소문이 퍼질지 모른단다. 그리고 그건 너뿐만이 아니라 미라벨에게까지 미칠 수 있어.”

    다니엘이 엄마에게 말을 보탰다.

    그가 왜 이렇게까지 엄마와 나를 환영하는 무도회를 열려고 하는 건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엄마가 내심 무도회에 참석하길 바라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잠시 다니엘을 흘겨볼 뿐 별다른 딴죽을 걸지 않았다.

    결국, 망설이던 엄마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크라이튼 대공을 확인했다.

    “그럼 무도회를 한번 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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