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황성에서는 누구누구를 만났느냐?”
브라이언의 손을 잡고 식당으로 가는 사이에 그가 내게 질문했다.
엄마를 만나서 이미 대화를 나누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걸까?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엄마 말씀하시는 거예요? 방금 엄마한테 들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응? 아, 아니다. 미라벨, 네게 묻는 거란다. 오늘 네가 누구를 만났고, 또 어떤 일을 겪었는지. 불편하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만, 그게 아니라면 이 숙부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알려 주지 않으련?”
이어진 브라이언의 부연에 주체가 나였다는 것을 깨닫고 어색하게 웃었다.
“황제 폐하를 만나 뵙기는 했는데 엄마랑 황제 폐하께서 따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셔서 바로 나왔어요. 그러고는 황후 폐하를 만났고요. 그러고 보니까 황후 폐하께서는 엄마랑 친우 관계셨다고 하시더라구요. 정말인가요?”
“아, 황후 폐하……. 그래, 그분은 어려서부터 코넬리아와 친구 사이였단다. 코넬리아가 네 아버지와 함께 사라졌을 때 가장 충격을 많이 받았던 사람 중 한 명이지. 그리고 우리 때문에 많이 힘드셨던 분이고.”
씁쓸한 추억을 회상하는 듯이 브라이언이 중얼거렸다.
“좋은 분 같았어요. 처음 보는 저한테 다과도 내어 주시고요.”
“그랬니?”
“네. 사과주스랑 쿠키를 내주셨어요. 쿠키는 너무 달아서 안 먹었지만…….”
“다정다감하신 분이니 그러셨을 것 같구나.”
브라이언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럼 혹시 황태자 전하도 보았느냐?”
“네.”
“혹시 황태자 전하께서 네게 무례한 말이나 행동을 하지는 않더냐?”
아주 잠시 동안 에이드리안이 내게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는 엄마가 황제와 만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엄마에게 화를 내기 위해 응접실로 찾아왔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엄마가 떠나가고 난 후의 황제와 마리안느의 관계를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도 엄마를 잊지 못한 황제로 인해 마리안느가 얼마나 힘들었을지도 예상할 수 있었다.
황태자는 그런 마리안느를 보며 마리안느를 속상하게 했던 우리 엄마를 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았다.
“……아뇨, 그러지는 않았어요.”
“무슨 일이 있긴 했나 보구나.”
내 대답에 잠깐의 여백이 들어갔다는 것을 깨달은 브라이언이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해 주렴 혹시 황태자 전하께서 너를 괴롭혔다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별건 아니고 그냥 문을 열다가 부딪쳤어요.”
“뭐? 부딪쳤다고? 세상에! 조카야, 어디 다친 거니? 의원을 부를까?”
브라이언이 내 말에 기겁하여 나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어린 애들이 부딪쳐서 넘어져 봤자 얼마나 크게 다친다고 이리 부선을 떠는지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다. 하지만 나를 걱정해 주는 브라이언의 모습이 싫지는 않았다.
“저는 안 다쳤어요. 오히려 넘어진 건 제가 아니라 황태자 전하신걸요.”
내가 다친 곳이 없다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그럼에도 브라이언은 안심하지 못하는 듯이 보였다.
“다치지 않았다니 다행이긴 하다만……, 추후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라도 말하렴.”
“……그럴게요.”
내가 멋쩍게 웃으며 대답하자 브라이언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조카야, 황태자가 버릇없이 군다면 내게 얘기하렴.”
“숙부님한테요?”
“그래, 내가 이래 봬도 황태자의 검술 스승이란다. 네게 함부로 대한다면 내가 따끔히 혼내 주도록 하마.”
“그런 일이 생길까요?”
“없다면 다행이지만……. 언제든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얘기해다오.”
브라이언이 아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단순하게 그 말을 넘기려다가 문득 자리에 멈추어 섰다.
내 옆에 있는 이 사람은, 철의 공작이라 불리며 제국에서 제일 뛰어난 검사로 이름이 나 있었다.
지금도 황태자의 검술을 지도할 정도로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내게 도움을 주고 싶어 한다는 것은 굉장한 기회였다.
“왜 그러냐, 조카야?”
내가 자리에 멈추어 서자 브라이언이 같이 자리에 멈추어 선 채로 내게 물었다.
나는 혹시나 싶은 심정으로 브라이언을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숙부님, 혹시…… 저한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검?”
“네. 꼭 배워 보고 싶었어요.”
지금처럼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는 배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독학으로 익힌 검술이었다.
독학이라고는 해도 살아남기 위해 칼을 휘두르다가 어느 정도 형식이 굳어져 버린 경우였다.
나중에 여유가 생겼을 때 교본을 사 보기도 했지만, 글로 적혀 있는 것을 홀로 익히는 것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
브라이언의 검술은 내가 막무가내로 익힌 것과는 차원이 다른 체계적인 검술일 것이었다. 거기다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그에게 검술을 배운다면 이전보다 더 높은 경지까지 올라갈 수 있을 터였다.
어쩌면 다니엘이 끌고 온 병사들을 홀로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검술 훈련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힘들 텐데 괜찮겠니?”
브라이언이 망설이는 티가 많이 났다.
나도 너무 섣부르게 부탁한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브라이언이 비록 어머니의 오빠이면서 나에게는 숙부가 되는 사람이었지만, 만난 지 이제 하루밖에 되지 않은 내가 부탁하기에는 너무 일렀지 않았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안 될까요?”
최대한 브라이언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싫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정 안 되면 기사들이 수련하는 모습이나 엘리엇이 훈련하는 모습을 눈동냥하여 홀로 연습하는 수도 있었다.
그래도 용병 생활을 10년 가까이 했던 나였다.
아무리 생존을 위해 단련한 검술이라고 해도 용병으로서 자리매김하기까지 많은 검술 지도서를 참고하여 어느 정도 기초 실력은 쌓은 상태였다.
그러니 눈동냥으로 독학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배울 수 있을 터였다.
브라이언은 망설이는 듯이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한쪽 무릎을 꿇고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나를 바라보는 브라이언의 푸른색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정말로 검을 배우고 싶은 거니?”
다시금 물어보는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배우고 싶어요.”
내가 강한 어조로 대답하자 브라이언이 금방 다시 미소를 지었다. 무언가 흡족해하는 것 같았다.
“그래, 그렇다면 내일 새벽부터 한번 시작해 보려무나. 괜찮겠니?”
“네! 저는 준비되어 있어요.”
다행히도 브라이언이 꺼내 놓은 답은 긍정이었다.
그가 거절할 것까지도 생각했던 나로서는 다행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숙부는 훈련에 있어서 만큼은 조카라고 해도 봐주지 않을 거란다. 하지만 훈련이 너무 힘들게 느껴지거든 언제든 그만두고 싶다고 말해도 된단다. 알았니?”
“네. 그런데 제가 그만두는 일은 없을 거예요. 두고 보시면 알 거고요.”
훈련이 힘든 것쯤이야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리고 몸을 쓰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목숨이 걸린 일도 아닌데 내가 도망칠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래, 검술을 배울 생각을 다 하고, 기특하구나.”
브라이언이 흐뭇해하며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타인이 머리를 만지는 게 별로 달가운 일은 아니었는데, 머리를 만지는 사람이 내 가족이라고 생각하니 그렇게 싫은 느낌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슴 한쪽이 따뜻해지는 울림이 있었다.
“이제 식당에 가자, 조카야. 우리가 너무 늦은 게 아닐까 걱정이 되는구나.”
자리에서 일어난 브라이언이 다시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으며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브라이언과 함께 식당 앞에 도착했다. 이미 안쪽에서는 익숙한 목소리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고하겠습니다.”
식당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 한 명이 브라이언을 향해 말했다. 브라이언이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니 하녀가 우리의 도착을 알리며 문을 열어 주었다.
문이 열리자 탁하게 들리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식당 안에는 이미 할아버지인 크라이튼 대공과 엄마, 엘리엇, 그리고 다니엘이 앉아있었다.
“오, 드디어 왔구나. 어서 앉으렴, 아가.”
크라이튼 대공이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들어오기는 브라이언과 같이 들어왔는데 크라이튼 대공은 나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크라이튼 대공이 그의 옆에 비어있는 자리를 가리켰다. 엄마의 옆이기도 했고, 다니엘의 맞은편이기도 했다.
본래는 이 자리가 브라이언의 자리라는 것을 뒤늦게 상기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브라이언을 보았지만, 브라이언은 말석에 앉은 후로도 별달리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 앉아도 되나?
어쨌든 크라이튼 대공이 권한 자리이니 일단은 앉아 있어도 될 것 같았다.
“그래, 오늘 황성에 다녀오느라 피곤하지는 않았니?”
“전혀요. 오히려 주스도 마시고 좋았어요.”
크라이튼 대공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크라이튼 대공은 브라이언과 마찬가지로 흐뭇한 표정을 짓더니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보여서 다행이구나.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내게 꼭 말해 주려무나. 이 할아버지가 해결해 주마.”
브라이언에게 들었던 것 같은 말이었다.
이 집안은 아무래도 과보호하는 특징이 있는 것 같았다.
일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긍정했다.
“네, 할아버지.”
“…….”
내 대답이 이어진 후로 크라이튼 대공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대화가 여기서 종료되었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돌리려는데 크라이튼 대공이 흐트러진 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를 바라보자, 그가 크게 감격한 얼굴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할아버지?”
혹시나 내가 말을 이상하게 했나 싶어 물어보자 크라이튼 대공이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란다, 얘야. 그저 네가 나를 할아버지라고 불러 주니 너무 감격스러워서 그만……. 늙으니 주책이 느는구나.”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집사가 손수건을 꺼내어 크라이튼 대공에게 건네주었다.
크라이튼 대공은 손수건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톡톡 찍듯이 닦은 후에야 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