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6)화 (16/174)

16화

엘리엇이 떠나가고 난 이후, 방을 좀 둘러보다가 이내 커다란 침대에 누웠다.

가뜩이나 작은 몸으로 사용하기에는 지나치게 큰 침대였다. 그러나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침대는 넓으면 넓을수록 좋으니까. 게다가 이 침대는 여태까지 내가 사용해 본 침대 중에서도 가장 푹신하고 편안했다.

게다가 이불에서 포근포근한 향기까지 났다.

나른한 기분에 스르르 잠이 올 것 같았지만, 감기려는 두 눈을 똘망똘망하게 뜬 채로 버텨 냈다.

앞으로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을 정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 저택에 다니엘의 명령을 받고 엄마의 편지를 빼돌린 자가 숨어 있다.

다니엘의 끄나풀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이 저택에 적응하고 또 사람들의 얼굴과 위치를 외우는 것이 선행되어야만 했다.

대공인 할아버지에게조차 보고하지 않고 편지를 빼돌린 정도라면 아마 이곳에서 어느 정도 입지가 있는 인물일 것이 분명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조금 전 다니엘의 수발을 들었던 집사였다.

이름이 바든이라고 했던가?

바든이라는 이름의 집사는 다니엘의 도착 소식을 접하고 가장 앞에서 그를 모시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대화하는 내용으로 추측하건대 다니엘과 바든은 제법 안면이 있는 사이로 보였다.

하지만 무턱대고 바든이라는 자를 의심할 수는 없었다.

그의 역할이 크라이튼 대공가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일이라면 그가 다니엘을 맞이하러 간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닐 터였다. 게다가 그 손님이 크라이튼 대공의 동생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 우선 그를 목록의 최상위에 올려 두되 다른 사람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혹시 모르지. 어쩌면 한두 명이 아닐지도.

답답한 마음이 들었지만, 당장 크라이튼 대공의 집무실에서 로비까지 나를 안내한 하녀의 이름도 모르는 상태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곳 저택에서 지내며 천천히 알아 가야 할 터였다.

적어도 엄마에게 크라이튼 대공의 시선이 닿는 지금은 그가 일을 치르기 힘들 테니까.

이제부터 걱정할 것은 다니엘이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에 대한 것이었다.

다니엘은 엄마와 크라이튼 대공이 서로 만나지 않기를 바랐었다.

죽음의 직전에 다니엘이 했던 말에 따르면, 그 이유는 엄마가 황제의 전 약혼자이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그럴 만도 했다.

크라이튼 가문과 황제는 엄마로 인해 사이가 크게 틀어진 상황이었다.

크라이튼 대공과 브라이언이 수습했다고 하기는 했지만, 직접적인 원인이 해소되지 않았으니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하물며 그 사건은 단순한 남녀 사이의 이별이 아니라 황실과 대공가가 정식으로 맺은 약혼을 엄마가 일방적으로 깨 버렸다는 게 문제였다.

제국에서 다시는 없을 스캔들.

황태자의 약혼녀가 사랑을 찾아 도피해 버리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

당연히 황가와 대공가의 관계가 크게 틀어지고 말았겠지.

다니엘이 그동안 어떤 입장을 고수해 왔을지는 모르지만 드러나 있는 상황만을 분석해 보았을 때, 크라이튼 대공가를 다니엘이 장악한다고 해도 황제가 대공가에 도움을 줄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엄마가 돌아와 황제와의 묵은 해후를 풀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해묵은 앙금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대공가에게서 돌아선 황제의 마음을 다시 돌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 만일의 사태를 막기 위해서 다니엘이 엄마의 편지를 빼돌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엄마가 나로 인해 무사히 크라이튼 대공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뿐일까?

복귀한 다음 날, 황제와 대면하기까지 했으니 이를 경계하고 있던 다니엘은 입안이 바짝 말라 가겠지.

아직은 엄마가 이곳 크라이튼 대공가로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또 크라이튼 대공과 브라이언, 그리고 황제의 시선이 모두 엄마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장은 섣부르게 엄마를 건드릴 수가 없을 터였다.

하지만 다니엘이 이대로 계속 손을 놓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쩌면 호의를 가장해서 엄마와 나를 다른 곳으로 치워 버릴 수도 있겠지.

무리도 아니었다. 공식적으로 다니엘과 내가 처음 만난 그 자리에서 다니엘은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나를 팔아 치우듯 다른 귀족가에 보내 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그런 말을 내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예상한 건지 내 앞에서 뻔뻔하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엘리엇이 아니었으면 나 역시 분을 참지 못하고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 버릴 뻔했다.

어린 나에게조차 이런 생각을 품는 다니엘이었는데, 엄마에게도 그 생각이 미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비록 엄마에게 나라는 혹이 있기는 했지만, 황제의 다음 가는 권력을 쥔 크라이튼 대공가의 딸이라는 자리를 놓고 본다면 여느 귀족가에서 충분히 탐을 낼 만했다.

다니엘 역시 이를 모르지 않을 터였다.

적당히 엄마를 걱정해 주는 척하며 다른 귀족가로 쫓아내 버릴 수도 있겠지.

똑똑.

맑고 청아한 나무의 울림이 상념을 깨트렸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 창가를 바라보았다. 창 너머로 수도 중앙에 위치한 시계탑이 보였다. 시간은 어느새 6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작은 아가씨,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죄송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누워있던 몸을 일으키고는 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내가 허락을 내리자 곧 문이 열리고 하녀복을 입은 성인 여성과 내 또래의 여자아이가 들어왔다.

두 사람은 조용한 걸음으로 내 곁으로 다가와 나를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작은 아가씨? 식당으로 안내하기에 앞서 인사드리겠습니다. 칼리나 클로벳입니다. 편하게 칼리나라고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2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밝은 금발의 하녀가 내게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잘 부탁할게요, 칼리나.”

내 말이 끝나자 칼리나가 나와 마주 보며 빙긋 웃었다.

“말씀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아…… 응, 그럴게.”

아무래도 내가 크라이튼 대공의 손녀이니 칼리나의 입장에서는 존대를 듣는 것이 썩 편하지 않을 터였다.

내가 빠르게 적응하자 곧 칼리나가 함께 들어온 여자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작은 아가씨를 곁에서 모실 아니타 리오펠입니다.”

칼리나의 말이 끝나자 아니타가 나를 향해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곁에서 모실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숙였던 고개를 든 아니타의 뺨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자신의 행동에 실수가 있지는 않았을지 걱정하며 눈을 굴리는 모양새가 귀여웠다.

“저 역시 작은 아가씨를 모시겠지만, 아니타가 작은 아가씨의 전속 하녀가 되어 곁에서 말동무가 되고, 심부름을 할 겁니다.”

칼리나가 설명을 덧붙였다.

“잘 부탁해, 아니타.”

“네, 네!”

내가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자 아니타가 당황하며 두 손을 뻗어 내 손을 꼭 쥐었다. 그러더니 다시 화들짝 놀라 두 손을 회수했다.

“죄, 죄송합니다.”

아니타는 작고 숫기 없는 목소리로 나에게 사과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 추어올리며 그녀를 향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칼리나를 확인했다.

“그럼 칼리나, 식당으로 안내해 줄래?”

“네, 작은 아가씨,”

칼리나의 안내를 받으며 식당으로 향했다.

사실 안내를 받지 않아도 아침에 엄마를 따라 한번 식당으로 향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내 스스로 찾아갈 수 있었으나, 일단은 아무것도 모르는 양 그녀의 뒤를 따랐다. 내 뒤로 아니타 역시 속도를 맞춰 따라오고 있었다.

“조카야, 식사하러 가니?”

계단을 내려와 막 몸을 돌리려는데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숙부님.”

내 뒤에는 브라이언이 있었다. 내가 알은체하며 그를 부르자 브라이언이 기분 좋게 웃으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오늘 코넬리아와 함께 황성에 다녀왔다고 들었단다. 코넬리아는 괜찮았다고 하는데…… 혹시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지는 않았니?”

“무슨 일이요?”

그가 무슨 의도로 말을 꺼낸 건지 이해하지 못하고 되묻자 브라이언이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아니다, 없었던 것 같으니 되었다. 방금 질문은 잊어 주렴”

브라이언이 얼버무리며 다정하게 웃었다.

뒤늦게 그가 황성에서 황제와 엄마 사이에 별다른 일이 없었는지 물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나 역시 엄마와 황제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도 엄마가 황제와 대면하고 난 뒤에 표정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았고, 무엇보다 황후인 마리안느와 해후를 풀었으니 엄마가 브라이언에게 언급한 대로 괜찮은 성과였던 것 같기는 했다.

“미라벨, 같이 식당으로 가도 되겠니?”

브라이언이 주저하며 내게 물었다. 다시금 고개를 돌려 그를 확인하니 그가 내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한때는 어렵고 무섭게만 느껴졌던 사람이 내 앞에서 쩔쩔매고 있는 모습을 보니 신기했다.

내 기억 속의 브라이언은 언제나 매서운 표정으로 마물들을 도륙하던 사람이었는데…….

내가 멀뚱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브라이언이 어색하게 손을 빼려 했다.

“시, 싫으면 굳이 같이 안 가도 된단다.”

“아니에요. 좋아요. 같이 가요.”

도로 회수하려는 브라이언의 손을 잡았다.

브라이언의 손은 검술을 훈련한 사람답게 크고 투박했다.

아홉 살밖에 안 된 작고 여린 내 손에 비하면 거인의 손처럼 느껴졌다.

브라이언은 내가 그의 손을 잡았다는 것을 믿기 어려운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가에 얼핏 눈물이 어리는 것도 같았다.

“숙부님? 혹시…… 우시는 거예요?”

단도직입적으로 그에게 물었다. 내가 실수한 건가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브라이언은 부정하는 대신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렴. 이렇게 귀엽고 예쁜 조카가 생겼는데 눈물이 안 날 수 있겠느냐?”

칼리나가 옆에서 건넨 손수건을 받아든 브라이언이 눈물을 콕콕 찍어 닦았다.

내가 알고 있던 브라이언과 지금의 브라이언이 동일 인물이 맞는지 다시금 궁금해졌다.

그때는 무섭긴 해도,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모습을 보니 환상이 깨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싫지는 않았다.

어릴 때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이후로 의지할 곳 없이 세계를 홀로 방황했던 나였다.

그런 내게 나를 지지해 줄 가족이 생겼다는 사실이 믿을 수가 없었다.

0